• 과학적 방법론,
    인문고전 중심론의 한계
    [교육담론] 과학은 필수교양
        2015년 04월 27일 09: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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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인문고전 중심론의 문제점을 거론할 때마다 드는 사례가 있다. 한국 고대사를 다룬 환단고기라는 책이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추적 환단고기 열풍”이라는 다큐를 방영한 바 있다. 이 다큐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단군세기라는 문헌의 고증을 천문학자가 하는 장면이다.

    단군세기에는 BC 1733년 ‘오성취루’라는 천문 현상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천문학자인 박창범씨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하자 BC 1734년 7.13 초저녁에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0년 쯤에 나타난 희귀한 천문현상의 오차가 1년 정도이니 정확한 기록으로 봐도 무방하다. 나는 이것으로 고대사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의 가닥이 잡혔다고 본다.

    오성취루

    오성결집 현상을 재연한 모습(@박창범)

    나는 이 다큐를 보면서 역사학 방법론과 관련해 큰 충격을 받았다. 역사학의 고전적인 방법론은 주로 문헌 해독이다. 근현대에 들어오면서 문헌 해독에 기초하여 현대적인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한 학문의 한 부류가 역사학이다. 그런데 그 역사학에서 첨예한 쟁점의 고증이 문헌 해독이 아닌 자연과학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역사학의 어떤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례는 역사학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맹자의 성선설이란 게 있다. 현 상황에서는 맹자의 성선설이 옳으니 그르니 논쟁하는 것보다는 DNA 구조를 분석하거나 수백만년 전 아프리카 동부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살펴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나오는 원시 상태도 마찬가지이다. 옛날에는 하나님부터 설명하면 그만이었는데 하나님을 빼놓고 무언가를 설명하려니 이론물리학에서 하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때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지금이라면 당연히 원시부족을 찾아 연구하거나 역시 진화론 관련 서적을 읽어야 한다.

    아담 스미스의 합리적 개인이나 맑스의 유적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주장은 그냥 아담 스미스나 맑스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한 전제로 머릿속에서 가상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를 고증할 방법이 없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그것을 얼마나 정확히 묘사할 것인가는 차치하고 어디서 그것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은 정해져 있다. 세월이 그렇게 달라진 것이다.

    필자는 7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칸트니 맑스에 대한 교과서의 서술은 지금이나 그 당시나 크게 차이가 없다. 이것은 전문 학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칸트나 맑스를 들먹이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 칸트나 맑스를 끊임없이 들먹이고 재해석한들 그것은 그들의 머릿속, 산더미 같은 책 더미,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토론의 산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연과학 교과서는 산천이 벽해할 정도로 달라졌다. 학원을 하면서 학생들 과학책을 뒤적일 때가 있다. 어떤 물리학 교과서에서 뉴턴은 그냥 서론이다. 뉴턴은 근대과학을 연 스타로 결정적인 순간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데모크리토스, 아리스토텔레스, 케플러 등과 같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설명하기 위한 서론쯤으로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 엊그제 본 초끈 이론과 관련된 다큐에서는 20~30년대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대해 저항하는 장면이 생생히 나온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자기 세계에 집착하여 과학의 흐름을 거스르는 노망난(?) 할아버지쯤으로 묘사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뉴턴은 연금술이나 신비주의에 빠진 중세 마녀와 비슷할 수 있다. (필자의 주장을 명확히 하기 위한 과장임을 이해하시길)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인문사회과학이냐 자연과학이냐가 아니다. 지식에 전공분야가 있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시대를 개척하는 사유. 신념체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있다. 그것을 위해 사고실험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일이고 그것을 위해 아프리카 동부를 누벼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밤새도록 현미경이나 전파 망원경과 싸워야 한다면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전공했느냐가 아니라 시대와 정면에서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새로운 방법론을 차용할 자세(자신의 전공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터놓고 말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7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이과였다. 한번 대학에 입학했다가 재수해서 문과로 재입학했다. 덕분에 문과 이과 모두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나는 70년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즐겨 읽었던 책들을 기억한다. 내 기억 속에는 토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함께 들어있다. 대학에 입학해서 두 가지 다른 패러다임에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한국사회를 봉건사회쯤으로 보는 인문사회과학적 패러다임과 다른 하나는 286 컴퓨터를 찾아 청계천을 헤매고 다녔던 공대 친구들의 궤적이다.

    불행히도 한국사회는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와 함께 전자(인문사회과학적 패러다임)가 대세를 장악했다. 덕분에 미적분을 몰라도 상관없지만 헤겔이나 맑스를 모르면 바보 취급 받았다.

    그러나 기저에서 한국사회를 근본에서 바꾼 것은 민주화와 같은 정치적 과제보다 인구구조나 과학기술 같은 보다 기저에 흐르는 추세이다. 전자가 엷어지고 후자가 지표면을 뚫고 올라오면서 사상지형이 뿌리로부터 흔들리고 있다. 지금은 자연과학이나 인구 구성 등을 모르면 바보이다. 그런데 문헌해독 중심의 전통 역사학이나 사색과 독서 중심의 인문사회과학이 여전히 철 지난 유행을 주도하고 있다.

    문과를 나왔어도 그 후 나름대로 공부하고 시대와 조응하려는 노력을 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문과를 나온 후 최신 과학기술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했다면 그 사람은 거의 바보 수준이다. 그 사람이 교수가 되었든 무슨 박사가 되었든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금의 과학기술의 수준은 문과생이면서 그냥 시대와 조응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수준이 아닌 듯 하다. 필수 교양이다. 누구나 어려서 장티푸스나 콜레라 예방 주사를 맞듯 당연히 해야 할 기초 작업이다. 거칠게 말하면 문자와 구구단을 강제로(?) 가르치듯 그렇게 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이냐 자연과학이냐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이다.

    필자소개
    전 범민련 사무처장이었고, 현재는 의견공동체 ‘대안과 미래’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서울 금천지역에서 ‘교육생협’을 지향하면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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