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정과 시혜 아닌,
    동등하게 살 권리 필요"
    420 장애인 차별철폐 대회 열려
        2015년 04월 20일 06: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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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다. 이날 서울 도심에선 오전부터 추모대회와 평화적 행진이 이어졌다. 장애인 인권을 위한 행진이었다. 참가자들은 이날을 장애인의 날이 아닌, ‘장애인차별 철폐의 날’이라고 불렀다. 도심 곳곳을 행진하는 그들은 장애인을 향한 동정과 시혜가 아닌 주체적 삶을 살아갈 권리를 달라고 외쳤다.

    1981년 정부가 지정한 ‘장애인의 날’은 외려 장애인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있다. 수많은 장애인들은 1년을 꼬박 시설에 갇혀 지역사회 주민들과 분리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그들이 1년에 단 하루, 장애인의 날에 언론을 비롯한 이 사회에 주목을 받는다. 사회는 장애인을 동정하고 시혜를 베풀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며 안타까워한다. 비장애인은 평범하게 누릴 수 있는 노동권, 건강권, 교육권, 이동권 등을 제대로 보장받고 있는 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정부 또한 마찬가지다. 장애인 단체는 많은 장애인의 목숨을 빼앗아 간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970일 째 무기한 농성을 하고 있지만 이에 전혀 답하지 않고 있다. 장애등급제 개선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날 거리에서, 한시적 동정이 아닌 장애인이 사회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정책 제정이 시급하다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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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 차별철폐 총투쟁대회사진=유하라)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 장애계 “동정과 시혜는 필요 없다”

    “2002년부터 장애인 차별철폐 투쟁하면서 14년 지났다. 우리는 그간 시설에 있었고, 집구석에 있었다. 사람 한 명 만나기 위해 이벤트를 했어야 했다. 장애인의 날, 남산 꽃 구경갔을 때 언론에서 기분이 어떠냐고 했다. 행복하냐고 했다. 남산 꽃구경 하면 행복하나. 정치인이 와서 목욕 시켜주면 행복한가. 우리가 행복한 건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이다.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를 가진 사회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공부하고 이동하고 일하고 문화생활 누리면서 즐겁게 살고 싶다. 우리에겐 그렇게 살 권리가 있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종로 보신각 앞, ‘장애인 차별철폐 총투쟁 결의대회’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섭 상임공동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안타까운 눈빛으로 봐야 하는, 동정하고 시혜를 베풀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이 사회의 태도를 따끔하게 비판했다. 장애계가 잘못된 제도와 인식을 개혁하는 주체의 중심에 서겠다는 뜻인 셈이다.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은 ‘장애인권리 끌어올려 보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장애인 차별철폐 총투쟁 결의대회’를 열었다. 보신각 앞을 가득 채운 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들, 일반 시민들은 ‘나쁜 제도’로 희생된 장애인을 추모했다.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양영희 회장은 “시혜와 동정을 받는 그런 삶을 넘어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장애를 인정하고 자립할 수 있는 존재로 봐야 한다”며 “오늘날 우리는 부양의무제, 그리고 장애등급제 폐지를 넘어 인권을 얘기하고 있다. 더 이상 억울하게 죽어나가고 누군가에 의지하는 삶을 묵과해선 안 된다. 끝까지 투쟁해서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의 생명권을 쟁취하겠다”고 밝혔다.

    장애인단체의 여는 발언이 이어질 즈음해서 보신각 주변을 둘러싼 경찰들은 연이어 해산명령 방송을 했다. 경찰은 이날 집회에 앞서 장애인단체에 ‘오늘 장애인의 생일이니 조용한 집회를 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권력인 경찰이, 국가가 ‘장애인의 날’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장애인을 어떤 대상으로 보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윤종술 공동대표는 “경찰이 오늘이 장애인의 날이라고 조용히 집회를 해달라고 한다. 4월 20일을 장애인 생일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장애인 인권 보장을 위한 길이 얼마나 막막한 지 느꼈다”며 “전국에선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라고 하루만이라도 생존권을 알아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럼에도 경찰은 더 큰 목소리로 해산을 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우리 장애인 투쟁 역사는 여러분 손으로,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다. 기본적인 장애인권리보장법, 부양의무제 폐지 등등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놓여있다”며 “지역사회에서 제 아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날을 위해 투쟁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경석 대표 또한 “우리가 행진을 하는 것은 교통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시설에 가둬 놓은 채 우릴 빼고 가는 이 세상을 막는 것”이라면서 “이 곳에서 살아갈 권리를 찾기 위해 장애인의 속도로 함께 끝까지 가자”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에선 이날 제 35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여의도 63빌딩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장애인과 그 가족을 초청해 장애를 훌륭하게 ‘극복’한 장애인을 발굴해 ‘올해의 장애인상’을 시상했다. 정부에게는 여전히 장애는 극복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앞서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15일 시각장애인 체험을 하는 등 장애인 날을 맞아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장애인을 죽이는 장애등급제 폐지하라

    지난 4월 17일 장애인등급제 희생자인 고 송국현 씨의 사망 1주기였다. 송 씨는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로 나와 자립을 시작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화재로 인해 목숨을 거뒀다. 오른쪽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고, 휠체어 이동도 할 수 없는 몸 때문에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언어 장애도 있어 주변에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심한 화상을 입었고, 결국 4일 만인 지난해 4월 17일 숨졌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송씨의 죽음은 장애등급제로 인한 ‘사회적 타살’이라고 규탄했었다.

    이날 결의대회에 참석한 녹색당 이유진 공동위원장은 “송국현 동지는 우리 사회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목숨을 잃었다. 시설에서 나와 얼마 되지 않은 가운데 돌아가셨다. 장애등급제가 폐지됐다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는 돈으로 인간의 존엄과 생존을 재단하는 나쁜 제도”라고 질타했다.

    그는 또 “장애등급제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제도”라며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복지는 못할망정 상처를 주고 정부가 정부에 의해 장애 정도를 판단 받아야 한다. 잔인하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는 하루빨리 폐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이 제시한 13대 정책요구안 중 핵심은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다.

    장애등급제는 장애인 개인의 환경과 욕구를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서비스를 결정하는 행정편의적 기준이라는 지적이 제기된 바 있다. 2010년 장애등급 재심사 의무화를 계기로 장애계는 장애등급제 폐지와 그 대안으로서 개인별지원체계 마련을 요구하며 투쟁을 시작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장애등급제 폐지와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을 약속했었다.

    정부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약속하면서 ‘서비스 판정도구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장애종합판정체계’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또한 껍데기만 바꾼 또 다른 ‘장애등급제’라는 비판이 거세다.

    공동투쟁단은 “장애등급제 폐지는 단순히 하나의 제도를 폐지하는 문제가 아니라, 수십년 간 기능해왔던 장애인 지원체계의 절대적인 기준을 없애는 것이고 이는 패러다임의 변화이며 전달체계 전반을 바꾸는 과정이어야 한다”며 “개인별 지원체계를 중심으로 한 장애인권리보장법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제정될 필요성이 있다”며, 이에 따르는 예산 수반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이 외에 공동투쟁단은 ▲부양의무제 폐지 ▲활동지원 권리 쟁취-송국현·오지석 법 제정 ▲저상버스 100%도입, 시외 이동권 보장 등 장애인 이동권 쟁취 ▲자립생활 전환서비스 제도화, 탈시설 정착금 제도화 ▲장애인 건강권 보장 등 13대 정책 요구안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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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권, 장애인의 날… “성찰의 날 돼야”

    정치권에서도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브리핑을 잇따라 발표했다.

    정의당 김종민 대변인은 “장애인을 단순히 위로하는 날이 아니라 장애인 스스로가 이 사회에 얼마나 주인이 되어 있는가를 돌아보고, 이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성찰해보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대변인은 “해마다 장애인의 날에는 축제라는 이름을 빌려 동정과 시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는 전시성 행사가 이어지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고 위로한다”며 “장애인에 대해 사회가 관심을 갖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이런 행동이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노동당 강상구 대변인도 논평을 내고 “장애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는 이날을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로 만들 것을 주장한다. 장애인의 날이 오히려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은폐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주최하는 장애인의 날 기념식을 보면 그렇다”고 비판했다.

    그는 “장애등급제 폐지,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 장애인활동지원법 개정 같은 제도적 보완이 우선이다. 이러한 대책 없이 1년에 한 번 여는 장애인의 날 기념식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은폐’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며 “정부는 실제 장애인의 삶에 차별과 억압이 없도록, 정당한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상시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장애인의 날에 큰 기념식을 여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완주 대변인은 “매번 나빠지고 있는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를 보며,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며 “장애인의 일상 및 사회생활에서 사회적 도움이 절실하다는 의식 하에 정부주도의 실태조사만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을 위한 소득보장과 의료보장, 고용보장을 위한 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박대출 대변인도 “장애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은 선진국으로 가는 필수조건이며, 장애인의 불편과 아픔을 보듬어 주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전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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