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올로기적 족쇄,
    칸트에 대한 두 가지 평가
    [민경우의 교육담론] 인문학들
        2015년 04월 20일 03: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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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최근 학원에서 수학과 인문학을 결합시키는 수업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수업은 0이 왜 그리스에서 출현하지 못했는가였고 4.17~18 진행된 두 번째 수업의 주제는 유클리드 기하학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유클리드의 원론이 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는가 둘째.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가? 셋째.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반드시 좋은가?가 화두였다.

    4.17~18 수업의 요지를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유클리드 원론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것은 원론의 서술이 정의-공리-정리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엄밀한 논증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엄밀한 논증의 세계가 근대사회의 기저에 흐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신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우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의 내용보다는 그것의 서술 방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 사회에서 수학은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바늘끝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하게 짜여진 유클리드 기하의 세계는 그런 수학의 보루와도 같았다.

    그런데 이 유클리드 기하의 세계가 19세기 가우스와 리만에 의해 무너진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유클리드의 5번째 공리인 평행선 공리(두 개의 평행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였다. 적도 상에 두 지점을 정한 후 해당 지점의 경도를 따라 가면 두 개의 평행선은 북극과 남극에서 만난다. 지구와 같은 곡면에서는 유클리드의 평행선 공리가 맞지 않는 것이다. 평행선 공리가 무너지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틀리게 된다.

    가우스와 리만의 새로운 관점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아인슈타인에 의해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운동이나 중력에 의해 변화하는 상대적인 존재이다. 이는 유클리드는 물론 근대를 상징하는 뉴턴이나 칸트의 관점을 넘어서는 것이다.

    나는 수업을 끝내고 수업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하나는 황광우씨가 쓴 “철학콘서트”(웅진 지식하우스)와 물로디노프가 쓴 “유클리드의 창: 기하학 이야기”였다. 두 권의 책에는 각기 다른 칸트가 등장한다.

    칸트

    임마누엘 칸트

    먼저 철학콘써트에서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위대한 철학자이자 근대적 자유를 제창한 위대한 철학자로 묘사된다. 황광우씨는 칼 포퍼의 말을 인용해 우회적으로 칸트에 대한 평가를 대신한다.

    “1804년 칸트의 죽음을 애도한 그 많은 교회의 종소리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남긴 메아리였다. …. 법 앞의 평등, 세계시민권과 지상의 평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식을 통한 인간 해방을 가르친 스승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그들은 몰려 왔다”

    그런데 믈로디노프의 평가는 많이 다르다. 가우스가 새로운 기하학을 발견한 뒤에도 이를 발표하지 않은 것은 “교회의 세속적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들”이었는데 특히 “가우스가 가장 두려워한 철학자들은 1804년 사망한 칸트의 추종자들이었다”(칸트는 절대 시공간을 제창한다. 그리고 황광우씨의 책에 지적해 있는 것처럼 칸트의 철학에는 근대 이성에 대한 찬양과 함께 낡은 종교적 가치관 사이의 교묘한 타협이 존재한다) 여기에 덧붙여 믈로디노프는 파인만을 인용하며 철학자들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덧붙이고 있다.

    누구의 평가가 옳을까?

    황광우씨의 글은 무척 재밌고 흥미로웠다. 오랜 기간 연구해 온 사람답게 그는 칸트의 면모를 짧은 지면에 매력적이고 설득력있게 기술했다.

    그런데 그가 칸트를 묘사한 소재와 전개 방식은 30년 전 내가 대학 시절 들었던 철학사 강의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합리론과 경험론, 독단과 회의, 근대철학의 종합….. 강산이 3번 변했는데도 우리의 철학은 여전히 어느 지점을 맴돌고 있다.

    황광우씨의 글은 철학 이야기라기보다는 철학의 역사이다. 터놓고 말하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주제를 던질만한 것이 없으니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철학의 역사를 철학인 것처럼 되새김질한다. 그리고 이 앙상한 인문학을 뒷받침하는 담론이 인문학 중시론 또는 고전 중시 태도이다.

    철학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철학의 역사로서도 의문이다. 역사는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을 조망하는 것이다. 근대 시민혁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황광우씨의 서술은 타당하다. 그런데 21세기 고도지식사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칸트로부터 도출해야 하는 것은 근대 철학의 종합이 아니라 그의 낡은 시공간론이다.

    뉴턴과 칸트의 절대적인 시공간은 그냥 틀린 이야기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의 근원이 되는 요소를 물.흙.공기.불 따위로 묘사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주장인 것과 같다. 이런 류의 주장들이 여전히 사회교과서나 인문사회과학 논술 지문에 빈번히 등장한다. 맹자의 성선설, 로크나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원시상태, 애덤 스미의 합리적인 개인……

    뉴턴과 칸트, 맹자와 로크를 말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다. 내가 문제로 삼는 것은 그 이면에 새로운 것, 최신의 과학기술 그리고 거기서 배태된 싱싱한 21세기 철학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을 고전과 과거, 소박한 자연주의로 몰고 가는 어떤 경향과 세계관이다.

    나는 학원을 하면서 이런 경향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본 연재에서 지적한 혁신학교의 탈지식 성향, 일반고 살리기 등도 그와 맥을 같이 한다. 교육현장을 개혁하고 진정한 대안을 만드는 과정과 함께 그것을 가로막는 이데올로기적 족쇄를 풀어야 한다. 필요하면 싸워야 한다.

    필자소개
    전 범민련 사무처장이었고, 현재는 의견공동체 ‘대안과 미래’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서울 금천지역에서 ‘교육생협’을 지향하면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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