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일' 조선인' 배제,
    한국과 일본의 공통점
    남북 경계선을 넘는 연대를 위하여
        2015년 04월 20일 10: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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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지금 이 글을 미국에서 적습니다. 노르웨이로 귀환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이 부분을 정리하고 가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미국에 특강차 왔습니다. 저로서는 특강건이 잡히고 시간만 조금 나면 미국 나들이를 하는 것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그냥 비행기 타면 됩니다. 비자 따위 필요없죠. 제가 지니는 한국 여권의 힘(?)인 셈입니다.

    한국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먹이사슬 안에서 상당한 위치에 이른 만큼, 그 여권이 지니는 “이동권 확보의 특권”도 상당합니다. 한국 국적자만큼 세계자본의 중심, 즉 구주와 북미로 자유자재로 언제든지 왕래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는 국민 집단들은 과연 이 세계 총인구에서의 어느 정도 될까요?

    중국, 인도, 구 쏘련의 대부분 후속국가와 거의 모든 아프리카 국가들, 대부분 중남미 국가들은 구주와 미국, 캐나다로의 자유로운 여행의 특권을 확보하지 못하니 “상당한 특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또 한국 정부의 정책 덕택(?)에 아예 친척 일가와 친지들이 사는 한국 땅에도 못가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입니다.

    “조선적”은 뭘까요? 1947년, 미군정 하의 일본에서 아직도 형식상 일본 국적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지만 이미 타자시 됐던 재일조선인들을 외국인 등록했을 때 그 국적란에 “조선”이라는 옛 식민지의 이름으로 그 출신지를 적기했습니다. 조선국이란 그 때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뒤에도 존재한 적은 없었죠.

    1년 뒤에 한반도에서 북조선과 남한이 각각 분립됐는데, 재일조선인들이 그 뒤로는 그 국적란에 “한국”을 표기할 가능성을 얻었습니다. “한국”으로 표기한다는 게, 가면 갈수록 그 현실적 가치가 높아져갔습니다.

    1965년 한일수교 이후 “한국” 표기는 사회보험 가입을 의미하기에 이르고, 지금 같은 경우에는 한국 여권이란, 위에서 말한 대로 자본 질서의 상위에 있는 나라로의 “길”을 터주는 “열쇠”입니다. 반대로 “조선적”을 고수한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국민적 타자”를 자칭한다는 거나 마찬가지죠.

    “조선적”으로 표기한다고 해서 (북일수교 없는 상황에서 어차피 일본에서 인정되지 않는) 북조선 국적을 갖는 것도 전혀 아니지만, 대개는 한-일 양국에서 “조선적”이라면 “총련계”, 나아가서 “친/종북 분자”로 인식하여 그 만큼 타자화시켜 배제하고 이지메를 가합니다.

    한-일 사이에 공통 분모가 있자면 그 중의 하나는 바로 “조선적” 조선인들을 잠재적 적국국민으로 본다는 거죠. 양쪽에서 그 부분은 놀랍도록 흡사합니다. 대다수가 남한 출신인 “조선적”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출신지를 방문해 친척, 친지를 보자면 한국 정부의 여행증명서가 필요한데, 그런 증명서들을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 3천여명의 재일조선인에게 발급해주긴 했지만, 2008년 이후에는 거의 발급 중단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여권”이라는 특권을 스스로 포기할 만큼 모종의 “신념”이 있는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우파들에게는 “북조선 납치 작전의 공범”으로 보여 무조건적, 전국민적 이지메의 대상에 올랐지만, 한국에서는 “안보 위협”으로 간주됩니다. 약자집단을 따돌리는 데에 한-일 간의 이런 동질성이 있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수만 명 정도밖에 안되는, 군 복무 경험도 없는 일제 식민 정책 피해자와 그 후계자의 집단은, 60만 대군을 보유하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어떤 방식으로 무섭게 위협할까요? 최근에 불거진 “정영환 교수 입국 불허” 사건을 보면 그 위협(?)의 전모가 밝혀집니다.

    2009년에 세미나 참석 차원에서 한국으로 나들이하기 위한 여행증명서를 청구한 “조선적” 재일조선인 정 교수가 당연히(?) 입국을 거부 당하자 대부분의 다른 피해자들과 달리 그냥 체념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해서 소송을 걸었습니다.

    결국 정의(?) 구현이 하도 잘 되는 대한민국에서 물론 패소를 당하고 말았지만 (보수화 시대의 한국 법정에서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해서 이길 수 있단 기대를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겠죠?), 법적 절차 과정에서는 재미있는 부분들이 밝혀졌습니다.

    알고 보니 입국 거부의 구체적인 사유는 정 교수의 “남조선” 표기를 수회 사용한 사실과 북조선 왕래 기록, 범민련 대회 참석, 그리고 조선학교 출신이라는 점이었답니다. 말하자면 “이적 활동”을 한 만큼 국내로부터 무조건 차단돼야 한다는 논리인 셈이었습니다. 본인의 학술활동이나 국내 친척 유무 여부 등은 아무 상관도 없었죠. “안보”가 나오기만 하면 개인 인권이 아예 사라지고 마는 게 군대 같은 대한민국의 실정입니다.

    북조선 악마화를 주된 이데올로기적 자본으로 삼는 한국의 극우보수 정권이 정 교수의 입국을 거부한 것이야 대체로 십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사건 앞에서 한국 좌파가 왜 침묵해왔는지, 이 부분을 조금 따져봐야 합니다.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이 한국 여권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렇게 “조선적”을 고수하는 데에 제각기의 아주 다양한 사연들이 다 있죠. 통일염원도 그렇고 특히 제주 출신들의 4.3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이 수많은 사연들 중에서는 북조선과의 “특수한 역사적 관계”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피해자, 일본에서의 차별의 피해자 입장에서 반제 투장의 유경력자들이 세운 “우리 나라”에 대한 감상도 처음부터 각별했지만, 또 남한의 “비즈니스”와 체제경쟁 위주의 교민정책과 질적으로 다른 이북의 재일조선인 정책, 특히 조선학교 지원책 등은 특히 힘이 돼온 것입니다.

    우리학교

    조선학교 이야기를 다룬 김명준 감독의 <우리학교> 한 장면

    크게 봐서는, 주체사상이 내포하는, 단순하고 권위주의적이면서도 위력적인 반제 의식이, 제국의 그늘에서, 식민지 식의 차별에 계속 노출된 피해자들에게 호소해왔다고 봐야 합니다. 호소했다고 해서 물론 북조선을 무조건 이상화하거나 북조선의 모든 정책에 무조건 찬동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북송된 재일조선인들의 일본 방문 제한도 재일조선인에게 아픔으로 다가오고, 북송 조선인들의 북조선 사회 적응 실패와 배제 피해의 많은 사례들도 상처를 남기고, 또 특히 최근 납치 사태 때에 북조선의 일본에서의 납치 작전에 대해서는 재일조선인들이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추진했던 냉전식 군사모험주의이었다는 거죠.

    결국 일본에 대해서도, 북조선에 대해서도 재일조선인들이 늘 거리가 유지될 수밖에 없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늘 배제의 위험성이 개재되는 월경적 타자집단입니다. 그래도 제국주의적 차별이 태심한 만큼, 조선학교들이 배제당하는 만큼 조선학교들을 지원해온 “반제 국가”의 존재가 고마웠다는 것이죠.

    문제는, 한국의 좌파는 과연 이와 같은 매우 복잡한 북조선과 재일조선인들의 “특수 관계”를, 인권과 소수자 배려/연대 차원에서 친화적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입니다. “종북”이라는 말이 계급론적 운동권 안에서 쓰였다가 조선일보 따위에 의해 전유된 만큼, 북조선의 극단적 민족주의 등이 한국 계급운동으로서 대단히 문제적이었으며, 그런 문제제기도 당연했습니다. 한국 노동계급의 세계관이나 이해관계는, 북조선 주도층의 세계관/이해관계와 동일하지도 않고 동일할 리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수령주의나 주체사상 식의 몰계급성, “민족”의 절대화 등에 대한 비판성과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배려 등에서 나타난 “반제 국가”의 긍정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반제국가”와 재일조선인 관계의 역사성에 대한 적극적 이해 등을 상호 모순적으로 보지 않는 방법을 익히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북조선의 사상이나 실천이 더이상 노동계급의 해방과 무관한 만큼 노동계급으로서 거리를 두어야 하되, 그렇다고 해서 북조선 역사의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나아가 “반제”를 매개로 하는 북조선과 재일조선인들의 관계도 죄악시만 해야 한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북조선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당연 필요하지만 비판과 비난 내지 전적 부정은 다릅니다. 진보가 남한의 모든 정책들을 부정하지 않듯이 (예를 들어 민중의 압력에 의해서 쟁취된 제한적 복지정책들을 환영하듯이) 과연 북조선의 모든 정책을 다 부정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요?

    나아가서는, 진보는 남한의 지배층으로부터도 북조선의 주도층으로부터도 거리를 두어 한반도의 모든 중생들, 모든 민중들의 이해관계를 총체적으로 표방해야 하지 않을까요? 남북 지배자들 사이의 갈등에서 중립을 찾아야 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재일조선인과 북조선 사이의 “특수관계”를 이해하고,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의 이동권 보장을 위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까 합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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