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4월은 이전의 4월 아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6만여명 시민 추모 행렬
        2015년 04월 17일 11: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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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1주기. ‘왜’라는 물음으로 시작해 ‘왜’라는 물음으로 끝이 난 1년이었다. 아무 것도 밝혀진 건 없었고, 어떤 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정부의 탄압과 회유, 거짓말, 여론 호도, 죽음 앞에서도 정치적인 계산에만 몰두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유가족 가슴의 든 멍이 더 짙어졌다는 것 외에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거짓말처럼 멈추고 어둑한 하늘이 갤 때쯤 서울시청 광장은 가득 찼다. 대통령이 떠나고 없는 그 곳에서 6만여 명의 시민은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참사의 진실을 밝혀내라”고 하늘에 대고 외쳤다.

    4월 16일, 광화문 세월호 광장은 향냄새가 가득했다. 분향을 위한 조문의 발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길어졌다. 퇴근을 하고, 수업을 마치고 온 많은 사람들은 분향 후 시청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광화문에서 시청광장으로 지나는 길목 곳곳에선 ‘세월호 선체 인양’과 ‘정부 시행령 폐기’를 외치는 소규모 집회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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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1주기 집회(사진=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우리의 4월은 더 이상 지난날의 4월이 아닙니다”

    이날 오후 7시 세월호 1주기 추모제가 시작됐다. 바짓단과 어깨를 다 적실만큼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시청광장에 설치된 커다란 전광판은 세월호 침몰부터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난 1년의 여정을 보여줬다

    팽목항에서, 청와대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장소가 어디든 아이를 잃은 부모들은 애원하고 통곡하고 화를 냈다. 우리에게 잠깐이었던 1년이 그들에겐 얼마나 고통스러운 1년이었을까.

    도종환 시인의 ‘화인’ 등 세월호 1주기를 기리는 문학인들의 시 낭독이 이어졌고, 성우는 내레이션을 통해 “이제 4월은 내게 지난날의 4월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1년간 온갖 회유와 탄압과 배신을 당해온 유가족들은 물론, 그곳에 모인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4월은, 더 이상 설레는 마음으로 봄을 맞는 달이 아니었다.

    ‘우리의 손을 놓지 말아 달라’는 유가족의 호소에도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떠났다. 왜 하필 4월 16일인지, 유가족은 물었지만 대통령은 답이 없었다. 대통령은 결국 아무도 없는 팽목항에서 정부 인사들과 경호원에 둘러싸여 대국민 담화를 읽었다. 대통령은 선체 인양에 대해 “필요한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해서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선체 인양에 나서도록 하겠다”면서 “진상규명과 관련해서는 민관합동 진상 규명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여 곧 추가적인 조사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정부 시행령안에 대한 폐기 의사가 없음을 확실히 한 셈이다. 정부 시행령안은 세월호 참사의 피의자 격인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특조위를 지휘하는 직을 맡게 돼있다. 또 대한민국 전반의 안전 문제를 점검키로 했던 것에서 세월호 참사와 해양사고에만 국한해 특조위의 취지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4.16가족협의회 전명선 운영위원장은 “진상규명 제대로 해서 안전사회를 만들자는 요구의 대답을 국가에 수차례 요청했고 어제까지 기다렸다. 4월 16일 가족들이 모여 있는 위패와 영정 앞에서 기다렸다”며 “그러나 대통령은 유족을 피해 팽목항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후 해외로 떠났다. 오늘 정확한 대답을 들었다. 이 나라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우리를 위해 답을 해 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또 “사람의 생명을 돈으로 치부하는 정부를 두고볼 수 없다. 답을 줄 때까지 청와대 문을 두드리겠다. 몸으로 행동하고 실천해서 철옹성같은 청와대의 답을 들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외쳤다.

    “제발 이 나라에서 숨 쉴 수 있게 도와주세요”

    실종자 9명의 가족도 무대에 섰다. 유가족이 되고 싶다며 절규하던 이전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세월호 선체의 온전한 인양과 참사의 진실이 규명될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5월 이미 선체 인양에 대한 기술검토를 마쳤으나, 시기적절한 때를 보며 발표를 차일피일 미뤘다. 그리고 참사 1주기가 다가오는 4월 초순에 ‘뻥튀기’ 배보상 금액과 함께 선체 인양에 대한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 유가족은 공분했고 돈으로 여론을 호도하는 정부에 항의하며 머리를 깎았다. 정부가 발표한 인양 기술 검토에는 시신유실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은 없었다. 아직 차디 찬 바다에 있는 이들을 가족의 품으로 안겨줘야만 하는 국가의 도리는 아예 잊은 셈이다.

    단원고 실종자 허다윤 학생의 아버지 허흥환 씨는 “세월호에는 9명의 실종자가 있다. 정부는 1년이 다 되도록 말이 없다. 국가가 국민을 버린다면 그런 국가는 필요없다”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전진하고 어떠한 역경에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울고만 있을 시간이 없다. 정부에 개 같은 시행령말고 똑바로 된 것 가지고 오라고, 똑바로 된 인양을 하라고 국민 앞에 공식적으로 밝히라고 당당히 말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4.16가족협의회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작년 11월 실종자 가족들에게 ‘너희 자식 찾으려면 인양해야 한다’고 하더니 미루다가 이제야 기술검토 결과 발표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며 “시신유실 방지 대책은 검토되지 않았고 해수부에 물었더니 검토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신 유실방지 대책부터 검토하라. 인양을 위한 진짜 방법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에 맞춰 대한민국과 가장 먼 남미로 순방을 떠났다. 제 아무리 외교가 좋다지만, 외교가 대통령의 지지율을 올려주는 가장 큰 무기라지만 이번만큼은 여론도 ‘해도 너무하다’는 반응이었다. 대통령은 비행기에 오르기 전 팽목항에 들렀다. 안산 합동 분향소로 와달라는 유가족의 부탁도 거절한 일정이었다.

    단원고 고 최윤민 학생의 언니 최윤아 씨는 “사고 이후 사람들이 미안하다고 했다. 어른이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에게는 듣지 못했다. 부탁드린다. 살려주세요. 제발 이 나라에서 숨 쉴 수 있게 도와주세요. 세월호 좀 인양해주세요”라며 “1년 전 4월 16일 저는 동생이 죽어가는 것을 생방송으로 봐야했다. 제발 저희들이 죽어가는 건 지켜보는 일이 없게 해달라”며 울먹였다.

    최 씨는 또 실종자인 허다윤 학생의 언니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을 가눌 수 없다면서 “대통령님, 지금 이 나라는 병들어 있다. 너무나 아프니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을 아시는지요. 가정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바깥 일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제발 저희가 내민 손 외면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추모제에선 세월호 선체 모형을 인양하기도 했다. 여론수렴과 비용을 운운하며 1년을 미뤄왔던 선체 인양을 유가족과 시민이 함께 하겠다는 뜻이다.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선체의 온전한 인양을 촉구하며 열흘간 단식 농성을 했던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박래군 공동위원장도 무대에 올랐다. 단식을 중단하고 정부에 맞서 싸우겠다고 밝혔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에서 혼자 살겠다고 빠져나온 선장처럼 해외로 도망갔다”며 “피해자들이 울 수 없게 하고 슬퍼할 권리조차 박탈하는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니다. 유가족들과 함께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싸우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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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차벽으로 평화적 헌화행진 가로 막고 캡사이신까지 살포

    오후 9시 추모제를 마치고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 마련된 분향소로 가 헌화를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시청광장과 세월호 광장의 중간 지점에 차벽을 세우고 유가족과 시민의 발목을 잡았다.

    ‘개미 한 마리’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차벽을 세운 경찰은 다른 시민들에게 불편을 준다며 연이어 해산 명령을 내렸다. 헌화행진을 하던 한 시민은 “또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왜 막나. 아이들에게 꽃 한 송이 주는 것도 안 되나”라고 항의했다.

    결국 헌화 행진은 청계천 쪽으로 우회 행진을 하기로 했으나, 조금 걷고 나니 또 엄청난 규모의 경찰 병력이 가로막고 있었다. 행진단은 그야말로 경찰에 둘러싸인 독 안에 든 쥐였다. 사람들은 “평화 행진을 보장하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경찰은 그런 시민들을 향해 캡사이신을 뿌렸다.

    그렇게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행진단은 결국 종로 YMCA 방면으로 돌아서 행진키로 했으나 경찰은 이곳에도 차벽을 세우고 막아섰다. 경찰은 불법 도로점거이니 해산하라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결국 10시 40분을 조금 넘은 시각에 경찰이 세운 차벽 위로 올라갔다.

    차벽 위로 오른 단원고 고 김민지 학생의 아버지 김창호 씨는 “참사 이후, 정부는 유족들에게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갔었다. 정부를 믿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며 “어떻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맞서겠다. 진실규명과 세월호 인양을 요구하겠다. 끝까지 저희와 함께 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손에 들고 있던 국화꽃을 머리 위로 흔들며 함께 행동할 것을 약속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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