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 그 과거와 미래
    [책소개] 『제국 평천하의 논리』(헤어프리트 뮌클러/ 첵세상)
        2015년 04월 11일 11: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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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부터 현대 미국까지 ― 제국의 역사와 논리를 밝히다

    전 세계적으로 서로 동등한 층위의 정치적·경제적 질서가 확립되고 국가 간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주변부를 지배하는 독자적 권력 집중국으로서의 ‘제국’은 이제 고루한 과거의 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흔히 제국은 ‘제국주의’와 연계되어 주변부를 침략, 착취하는 파괴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비판받아 왔다. 특히 일본의 식민 제국주의를 겪은 한국인들에게 제국은 불편한 주제이며 ‘나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국가를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만이 제국의 유일한 행동 논리일까? 제국은 청산해야 할 과거의 나쁜 정치 체제에 불과할까? 제국에 대한 비판에만 집중할 때 정작 그 해결에 필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럽 정치학계의 석학인 헤어프리트 뮌클러 교수는《제국 : 평천하의 논리》에서 ‘반제국주의’로 집약되는 ‘제국’에 대한 단선적 시각을 넘어, 제국을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정치적 조직 원리의 하나로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통념을 넘어서는 뮌클러의 ‘제국’과 ‘지배’에 대한 역사적·객관적 통찰은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기존의 국가 중심 방식을 넘어서는 제국적 해결방식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저자는 고대 로마부터 현대에 이르는 제국의 역사를 분석하여 제국에 대한 오해와 진실, 제국의 작동 메커니즘과 수천 년간 세계를 지배한 정치적 논리를 밝히고, 독재적이고 야만적인 체제가 아닌 합리적이고 건실한 권력 질서로서의 제국을 재조명했다.

    먼저 ‘국가’와 ‘패권’, ‘제국주의’와 구분되는 제국의 본질을 밝히고, 정치적 힘, 경제적 힘, 군사적 힘, 이데올로기적 힘을 바탕으로 제국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세력을 확장했으며 그들에게 닥쳐온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고찰했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제국이 평화와 번영의 보증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국 건설이 억압이나 착취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고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부흥의 시대를 가능케 한 대제국 건설도 있었다. 제국적 지배는 착취와 문명화가 혼재된 과정이었다.

    세계 정치의 지구적 보증인으로 군림하는 미국,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정치 무대에 복귀한 중국 등 오늘날에도 제국적 세력은 자신들의 행동 논리를 강화하고 있다. 고대 중국과 고대 로마,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제국 등의 초기 제국들이 위세를 떨칠 때 발현되었던 원칙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과 중국 등에서 이어지는 현대적 제국의 명맥을 꿰뚫고, 현 시점에서 새로운 제국의 주변국들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앞으로 정치적·문명적 중심지가 또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한다.

    제국의 역사와 특징을 통찰함으로써 오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제국적 국가들의 행동 질서를 드러내고 있는 이 책은 세계 정치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지구 공동체의 평화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옮긴이의 말처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베버의 지배사회학을 제국적 수준에서 다시 쓰고 있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21세기 제국의 시대를 관찰하는 거시적인 눈과 함께, 지배와 권력 일반의 논리에 대한 이해”도 얻게 될 것이다.

    제국 평천하

    국가·패권·제국주의와 구분되는 제국 개념

    제국은 단순히 큰 국가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국가는 다른 국가들과 함께 만든, 그래서 혼자 이용할 수 없는 질서에 편입되어 있지만, 제국은 자신의 고유한 세계 안에서 작동하며 스스로의 질서를 창조하는 동시에 보증한다.

    국가가 내부에서 단일한 정치적·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 정체성으로부터 다른 국가들에 대해 자기를 주장하기 위한 힘과 영향력을 얻는다면, 제국은 대립과 갈등을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가 아닌 자기 안에서 해결해야 하며, 그 대립과 갈등을 생산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이러한 제국은 때로 동의어로 사용되는 ‘패권’과 구분된다. 패권은 형식적으로 평등한 정치적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집단 내에서의 우세함을 말한다. 제국은 이 최소한의 형식적인 평등마저 인정하지 않고, 주변국의 지위를 자신의 종속국이나 위성국으로 낮춘다.

    다극 체계에서는 모든 강대국들이 패권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만, 제국은 다른 세력의 도전을 훨씬 덜 받으며, 그러므로 더 안정적이다. 제국 이외의 세력들은 두 번째, 세 번째, 심지어 네 번째 열에 있는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툰다.

    또한 제국은 ‘제국주의’와도 다르다. 제국주의는 제국이 되려는 의지가 있음을 의미하는데, 저자는 제국주의가 반드시 제국 건설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대부분의 제국이 그러한 의지와 무관하게 우연히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유형의 제국의 등장과 건설 과정

    역사적으로 육상 제국은 지배의 공간을 밀집시키면서 등장한 반면 해양 제국은 자신의 무역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팽창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양을 영해로 선언하고 마치 그곳을 통과할 때 관세와 세금을 내야 하는 닫힌 영토처럼 취급함으로써 수입을 얻었고, 그 수입으로 무역의 공간을 통제하는 데에 필요한 비용을 감당했다.

    한편 초원 제국은 대개 군사적 형태로 잉여생산물 수탈을 통해 제국을 건설했지만, 군사적 팽창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조공과 약탈에서 비롯하는 수입을 정규적 세금으로 대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로 단명하고 말았다.

    과거에는 이처럼 영토의 통제가 제국의 질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면, 20세기 이후부터 이 영역은 하늘과 우주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경제적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로마 공화정이 로마 제국으로 바뀌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아우구스투스의 개혁 조치들을 가리켜 마이클 도일이 ‘아우구스투스의 문턱’이라 부른 이후로 이것은 제국으로의 이행기에서 필수적으로 거치는 결정적인 관문으로 이해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몇 가지 개혁 조치를 결합하여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하고 내전을 종식시키기를 원했고, 이 개혁 조치들을 통해 로마의 정치 질서는 근본적으로 재편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은 팽창기를 끝내고 질서 있는 지속, 장기적인 존속의 시기로 넘어갔다.

    비슷한 예로 저자는 중국 제국이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벽으로 만리장성을 쌓고, 그들을 공격하는 대신 중국식 교육을 시켜 ‘문명화’하면서 그들의 제국을 공고화하여 아우구스투스의 문턱을 넘었다고 설명한다.

    권력의 네 가지 원천과 중심부·주변부 사이의 균형

    마이클 만은 권력의 네 가지 원천으로 군사적 힘, 경제적 힘, 정치적 힘, 이데올로기적 힘을 꼽았다. 이 네 가지 원천은 제국이 건설될 때 서로 다른 정도로 발현하지만, 이 네 가지 권력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결핍돼 있으면 제국에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가 생긴다.

    제국은 권력의 네 가지 원천 모두에 의해 동일한 정도로 지지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아우구스투스의 문턱을 넘어 그 네 가지 힘을 평형 상태로 만들었을 때 가장 안정적이다.

    어떤 종류의 힘이 제국의 상승과 안정에 결정적인지는 제국의 내적인 요소에만 달려 있지 않고 외적인 환경에도 달려 있다. 이 둘 사이에는 비대칭적 관계가 있는데, 이것이 제국의 그때의 ‘이성’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제국의 엘리트들은 어디까지나 제국이성의 범위 안에서 성공적으로 행동하거나 실패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제국이성을 ‘세계 지배의 논리’라고 일반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제국의 행동 논리는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로마는 동쪽에 대해 패권국으로 행동했지만 야만인들이 있는 서쪽과 북쪽에서는 제국으로서 지배했다. 제정 러시아의 경우에도 동쪽은 문명화하는 지역이었고, 서쪽에 대해서는 그곳의 발전 수준에 이르려고 오히려 노력했다.

    그런데 오로지 군사적이거나 상업적인 잉여생산물 착취에만 치중하고 주변부의 기반 시설에 많이 투자하지 않는 제국은 주변부를 확실하게 자신의 세계 질서 안으로 편입시킬 수 없다. 그 일을 성공하느냐 여부가 제국의 안정과 지속에 결정적일 수 있다.

    제국이 주변부를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중심부에서 불만이 증가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불확실한 지방의 상황들이 중심에서의 불안보다 더 자주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제국적 사명 ― 제국의 정당화와‘신성한 제국’

    아우구스투스의 문턱을 넘으면서 로마 제국은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착취적 관계에서 문명화하는 관계로 넘어갔다. 오래 존속한 모든 제국은 자기 존재의 목적과 정당성의 근거로서 어떤 세계사적 임무, 즉 제국에 우주론적 또는 구속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사명을 선택했다. 특히 로마 제국의 지배는 세계의 평화를 보장하면서 정당성을 얻었다.

    제국으로의 통합은 문명의 혜택을 누릴 기회를 주었다. 제국의 경계 바깥에서는 야만이 지배하고 심지어는 전쟁이 터진다. 저자는 제국의 평화는 황금시대의 신화와 연결되고, 이런 방식으로 신성하게 드높여진다고 설명한다.

    호엔슈타우펜 왕가는 제국을 ‘신성한 제국’이라고 불렀고, 그 명칭은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제국의 사명은 제국의 중심부에 있는 엘리트를 주로 향하고, 야만인 담론을 통해 제국적 공간의 질서가 그것을 둘러싼 무질서와 구별된다. 그리고 번영에 대한 약속이 제국의 모든 거주자에게 전달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때 제정 러시아는 광활한 시베리아에 철도망을 깔아 중앙아시아에서 이루어지던 무역을 효율적으로 대체했다. 이 철도 체계를 통해 군사적으로도 대규모 부대를 신속하게 먼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으며, 경제 공간들이 서로 연결되며 경제성장이 촉진됐고, 제국 전체의 번영을 확대했다.

    이는 제국적 질서와 경제적 번영의 상관관계를 잘 드러낸다. 이때부터 제국의 과제는 ‘과잉 팽창’과 ‘과잉 수임’을 경계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지적했듯, 제국이 직면하게 되는 가장 위험한 도전은 공간적으로 과도하게 팽창하려는 경향과 무제한적으로 임무와 책임을 떠맡으려는 경향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국의 탄생

    국제 연합 중심의 세계 질서가 성립되고 국가들 간의 연결망이 공고해지면서 쇠퇴하는 것처럼 보였던 제국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처럼 보인다.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고 1991년 제2차 걸프전쟁이 벌어진 이후 미국이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전 지구적 지배자의 자리에 올랐다. 군사적 능력을 기반으로 평화를 지키는 제국의 임무를 맡고, 국제 연합에서 실패한 질서 유지를 위한 활동에 뛰어들어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미국은 지구적 권력으로 부상했다. 특히 미국은 ‘인도적 군사 개입’과 ‘테러에 맞선 전쟁’을 내걸고 막강한 제국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제국은 정치경제적 질서 모델로서 다시금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제국은 이전의 시대와는 다른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새로운 제국이다. 이제 유럽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고 경계를 획정하여 경제적·정치적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했다. 그 일은 과거 제국들의 지배 논리를 통해서만 제대로 기능할 것이다.

    앞으로 미국이 쥐고 있는 경제적 힘과 군사적 힘, 정치적 힘과 이데올로기적 힘이 어디로 흘러갈지, 미국과 주변부의 관계 설정이 어떤 국면으로 흘러갈지가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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