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로잡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
    [책소개] 『역사와 책임』(한홍구/ 한겨레출판)
        2015년 04월 11일 11: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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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기시감(旣視感)을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1970년대와 과연 얼마나 다른가? 아니 1940년대, 1950년대와는 또 얼마나 다른가? 왜 부끄러운 역사는 극복되지 않고 반복되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 앞에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그리울 뿐이다. 절망의 오늘을 견디는 이들에게 던지는 한홍구의 가슴 뜨거워지는 역사 에세이 ≪역사와 책임≫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박근혜 정권 2년차, 구체적으로는 비서실장 김기춘의 등장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까지의 기간 동안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들을 바라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교훈을 찾는 내용이다. 특히 이런 문제의식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오기까지는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역사와 책임

    속옷 바람으로 도망친 세월호 선장…한강다리 끊고 도망친 이승만

    저자는 세월호 사건이 우리 역사에 1980년 광주 못지않은 충격을 안겨줄 것이라 진단한다. ‘광주’가 국가가 총칼로 국민을 직접 죽게 했다면, ‘세월호’는 국가가 죽어가는 국민을 눈앞에 두고서도 이를 구조하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여기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이 국가를 운영하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족속인가?”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대한민국을 운영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현대사를 복기한다. 본문을 시작하는 ‘세월호, 역사 그리고 책임’은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 그랬던 것처럼 북한의 공격으로 함락 위기에 빠진 수도 서울에서 제일 먼저 달아난 ‘국부’ 이승만과 그 주변 세력을 조명한다.

    이준석은 그나마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과 그 세력은 서울로 돌아와서는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남아있던 이들을 북한의 부역자로 몰아가면서 이들을 처단하고 나섰다. 이 부역자 처벌에 앞장선 이들이 바로 냉전과 분단의 틈바구니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서 애국적 반공투사로 변신한 이들이었다.

    세월호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사회 분열 세력으로 몰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다리 끊고 도망갔던 친일파가 돌아와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간첩 조작, 내란 음모, 정당 해산 -한국의 엘리트가 사는 법

    이 책의 집필 시기인 박근혜 정부 2년차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시기이다. 간첩 조작 사건, 내란 음모 사건 그리고 정당 해산 심판까지 ‘우리 사회가 유신 시대로 돌아간 것 아닌가’ 하는 시기에 청와대 핵심 자리에는 ‘유신헌법의 설계자’로 알려진 김기춘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일찍이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승승장구하여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등의 요직을 거쳐 3선 의원까지 역임한 이 시대의 엘리트다.

    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일제 시기, 일제 시기에서 해방, 군사독재에서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숱한 변화에도 한국 엘리트 집단의 본류는 단절된 적이 없다고 분석하는 저자는 오늘날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엘리트 집단의 중핵을 형성해온 사법 엘리트의 단면을 김기춘이라는 사례를 통해 드러낸다.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 장학생 출신인 김기춘은 박정희 집권 시절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을 두루 지낸 신직수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한다. 그 밑에서 극비리에 유신헌법을 만드는 과정에 깊숙이 간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당시에는 묵비권으로 일관하던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 시절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지만, 5공 시절 밀려나 있었던 덕에 제6공화국이 되면서 화려하게 검찰총장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이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지역감정 조장의 극단을 보여준 ‘초원복집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살아남았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국회 법사위원장으로서 대통령 탄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비단 김기춘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 <변호인> 속 차동영과 같은 자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자들은 여전히 안녕들 하다. 부림 사건의 주임 검사 최병국은 얼마 전까지 울산에서 3선 의원을 지냈고, 부림 사건의 원조인 학림 사건의 판사였던 황우여는 새누리당 대표를 거쳐 현재는 교육 부총리로 1,000만 학생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까지 국무총리를 맡았던 김황식은 재일동포 김정사 간첩 조작 사건의 판사였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과 엘리트 집단의 기원에 대해 새삼 조명하게 되는 이유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어제의 야당’은 역사의 시곗바늘이 역주행하고 있는 이 시점에 야당의 분발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지난 역사에서 야당이 정부의 잘못에 맞서 단호하게 싸울 때 국민들은 이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투쟁성을 읽고 표류하는 지금의 야당에 쓰디쓴 충고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우리 시대의 시민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우리 사회 기득권들은 국민에 대한 책임을 져버리고 저 혼자 잘 살겠다고 염치없이 행동하기 일쑤다. 하지만 대한민국호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무책임한 선장을 두었음에도 선원들의 책임감으로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이다.

    저자는 세월호 이후 관련 강연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로 강연을 마쳤다고 한다. “해방 후의 역사만 보더라도 세월호보다 더 끔찍하고 광범위한 참사를 당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대통령이라는 자가 다리 끊고 도망가고 선장이라는 자가 혼자서 속옷 바람으로 도망쳐도, 기관장, 항해사, 갑판장 등속이 다 무책임하게 도망쳐도 대한민국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시민 대중들이 간직한 숨은 복원력 때문이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이 복원력밖에 없다. 더 이상 대한민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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