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기억하는 자들의 고향
[다른 삶과 다른 생각] 골마다 서린 사람들 이야기
    2015년 04월 08일 10: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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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서북 허리를 삭둑 잘라 내어 놓은 성삼재 길을 차를 타고 올라와서 노고단을 지나오든, 반선에서 뱀사골을 걸어 올라오든, 서너 시간 땀을 내고 걷다보면 삼도봉에 다다르게 된다.

저 멀리 불무장등으로 뻗어가는 능선이 아름답고, 그 옆에 웅장하게 서 있는 반야봉의 자태에 놀라게 되는 삼도봉은 말 그대로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가 만나는 지점이다. 3도와 5개 시군(남원시, 함양군, 산천군, 하동군, 구례군)이 지리산의 자락에 자리 잡고 있고, 1967년에 국립공원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남한의 가장 크고 깊은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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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봉에서 반야봉으로 가는 길목에 이름 모를 무덤이 하나 있다. 산꾼들 사이에선 소금장수 무덤이라고도, 빨치산의 무덤이라고도 전해진다.

그곳에서 길 아닌 길로 들어서면 지리산의 원시림이 그대로 펼쳐지는 산길이 나온다. 뱀사골의 물들이 만들어지는 작은 샛골을 몇 개나 지나고, 벼락에 쓰러진 아름드리 나무 밑을 기어가다보면 열댓 명이 앉아 쉴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 나온다.

위로 올라가면 지리산꾼들만이 알고 간다는 묘향대가 나오고, 아래로 내려서면 노동당 전남도당 박영발 위원장의 비트가 나온다. 전라남도 빨치산 총사령관 김선우와 이현상 선생이 한 번씩 회의하러 왔다는 박영발 비트는 그 당시 그 모습 그대로이다. 그 아래 빨치산들이 기거했던 구들장비트가 지리산의 원시림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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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반야 박영발 비트 아래에 있는 구들장 비트, 소년빨치산 김영승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적들이 없을 때는 구들장터에서 생활하고 적들이 있을 때는 동굴에서 생활한 거여. 보위대 동지들은 그 주위에서 잠복을 해. 잠복을 해서 매일매일 적들을 동태라든가 이런 걸 보고하고 밥을 짓고 했었거든. 그리고 그 비트 안에서 뭘 했나하면 조국 출판사를 만들어서 거기서 등사를 했어. 거기 무전기도 있거든. 거기서 공화국 방송은 다 들어. 그 방송을 듣고 등사 다 해서 각 도로 알리는 일을 하다가 마지막 공세로 희생돼 종막을 고하고 만 거야.”)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가장 널리 알려진 길은 백무동 하동바위길이다. 그 하동바위길 초입에 옛 마을 두지터로 가는 자그마한 샛길이 하나 있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득한 적막함이 감도는 ‘빨치산 총사령관’로 알려진 곳이 나온다.

길을 따라 산을 계속가면 두지터로 혹은 창암산으로 가게 되고, 그 건너편으로 벽송사가 있다.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기에 전란 시에 모두 전소되고 지금은 새로 단장된 절집들이 가지런히 서 있고, 목장승과 절집 뒤 부도탑 3개 그리고 미인송 만이 그 옛날 벽송사의 내력을 말해줄 뿐이다.

벽송사 옆으로 난 ‘벽송사 루트’를 서너시간 걸어가거나, 지금은 ‘지리산 둘레길’로 유명해진 송대마을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선녀굴이 나온다.

지금도 총탄자국이 선명한 그 곳에서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과 이은조, 이홍희 3명의 빨치산이 숨어 지내다, 1961년 토벌대에 의해 이은조가 사살된 곳이다. ‘벽송사 루트’를 걷다보면 ‘산죽비트’ ‘바위비트’ ‘굴비트’ 등 빨치산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하긴 지리산 아흔아홉골 어디든 빨치산의 속내가 묻어있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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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선녀굴, 1950년 결혼 6개월의 신부였던 정순덕은 그해 12월 겨울 남편의 겨울 웃을 챙겨 산으로 들어간다. 그녀가 남편과 지리산에서 지낸 날짜는 겨우 20여일. 남편을 잃은 정순덕은 13년이란 세월 동안 지리산을 누빈다.)

지리산 주능의 가운데쯤에서 남부 능선이 갈라져 남쪽으로 뻗어져 나간다. 이 남부 능선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소변을 누면 섬진강이 되고, 왼쪽으로 누면 낙동강이 된다. 영신봉이다. 영신봉에서 갈라져 나온 이 남부 능선이 계속가면서 낙남정맥이 되어 섬진강과 낙동강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영신봉 아래 지리산에서 가장 ‘기’가 세다는 영신대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로 내려서게 되면 큰 세개골과 만나고 작은 세개골과 다시 합쳐져 대성골을 이룬다.

1952년 1월, 토벌대의 2차 대공세, 일명 대성골 천불사건. 토끼몰이로 대성골 사십리로 몰린 2천여 명의 빨치산들이 말 그대로 떼죽음을 당한 곳이다. 수도사단의 3개 연대 병력이 포위하고, 공군기 5개 편대가 소이탄으로 불바다를 만들었다.

이 전투에서 빨치산 300여명이 사살당하고 250여명이 생포 당한다. 경남도당 위원장 남경우를 비롯해 부위원장 허동욱과 조영래, 조직부장 강명석, 선전부장 안병화 등 14명의 경남도당 수뇌부가 전멸했고, 57사단 정치위원 김의장, 9연대장 오재복, 전남유격대 지리산파견대장 오신태, 구례군당위원장 조용길 등이 사살됐다.

‘피의 전적, 원한의 대성골’ 남부군 정치부원이었던 시인 이명재는 대성골 전투를 그렇게 적었다. 지금도 지리산꾼들 사이에는 대성골에서 비박을 할라치면, 어느새 술자리에 슬그머니 끼어드는 그 때 그 사람들을 가끔씩 만나곤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리산에는 10경이 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라는 ‘벽소명월’, 달이 밝은 날이면 지리산 능선의 어느 길이든, 랜턴 없이 걸을 수 있지만, 유독 ‘벽소명월’이라는 이름이 난 걸로 봐선, 벽소령이 젤루 달밤이 아름답다는 걸게다. 벽소령 대피소 뒤쪽으로 개방된 탐방로이지만, 사람들이 즐겨 찾지 않는 길이 있다. 두어 시간을 내려서다 보면, 지리산 오지마을 중 하나인 삼정마을에 다다른다.

그곳에 빗점골이 있다. 1953년 9월 18일. 이현상 선생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다. 지금도 그 날이 되면 머리 하얀 어르신들 몇몇이서 제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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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빗점골 이현상 아지트, 아지트 아래로 내려가면 이현상의 최후격전지 바위가 나온다. 지금은 이현상 선생의 흔적을 알려주는 이 게시판마저 누군가의 손에 훼손되어 사라졌다)

인터넷에 ‘지리산 비가’ 혹은 ‘지리산 곡(哭)’이라고 치면 노래 하나가 뜬다.

남부군 제81사단의 문화지도원으로,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서 ‘최문희’로 나오는 최순희 선생의 노래이다. 지리산 지기로 유명한 고 함태식 선생은 ‘그곳에 가면 따뜻한 사람이 있다’라는 저서에서 그녀의 위령제를 이렇게 그려냈다.

‘최순희라는 여인이 찾아왔다./…/새벽녘 섬진강이 보이기 시작하자/…/노고단에 올라와서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온 산에 대고 절을 했다/…/그녀는 노고단 정상에 뜨거운 커피를 뿌렸다. 인텔리 빨치산들이 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죽어가면서도 커피 한 잔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혼이라도 있는지 노고단의 붉은 땅에 뿌려진 커피가 금세 땅 밑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철쭉이 피고 지던 반야봉 기슭엔

오늘도 옛 같이 안개만이 서렸구나

피아골 바람 속에 연하천 가슴 속에

아직도 맺힌 한을 풀길 없어 헤매누나

아-아- 그 옛날 꿈을 안고 희망 안고

한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간 푸른 님아

오늘도 반야봉엔 궂은 비만 내리누나”

(지리산 비가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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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당시 뿌려진 삐라에는 최순희 선생이 뒤로 돌아앉아 피아노를 치는 사진을 담고 있다. 사진은 ‘피아노를 치고 있는 전 남부군 81사단 문화부 지도원(전 북조선 국립예술극장 오페라 가수 최순희양)’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당시 그녀는 문화대원 15명 중 11명을 잃고 생포된 뒤 지리산 빨치산의 자수를 권유하는 삐라에 활용됐다. 삐라는 그녀에게 영원한 멍에가 된 듯했다.-부산일보 인터뷰에서 인용)

최순희, 그녀는 철쭉은 꽃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성골 전투, 함박눈 속에 점점이 박힌 빨치산의 피가 철쭉이라는 것이다. 눈 내린 겨울, 반야봉에 올라서면, 가끔씩 눈 속에 붉은 철쭉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산을 내려서는 내 맘이 먹먹하다.

지리산에는 문명 대신 원시림이 있고, 사람 대신 산꾼들이 있고, 능선마다 골마다 그 때 그 사람들의 속내가 있다. 내가 지리산에 들어와 사는 까닭이다.

필자소개
지리산에서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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