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의 시(詩)
        2015년 04월 07일 10:29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 레디앙의 대표를 맡으면서 첫 인사를 드립니다

    조금 주저하는가 싶었는데 어느 사이 눈앞에 봄이 와 있습니다. 4월의 봄볕은 세상의 어떤 얼룩이라도 지울 것처럼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조금씩 길어지는 봄 해는 꼭 그만큼씩 꽃밭을 넓혀 가며 온 세상을 물들여가고 있습니다.

    때 아닌 봄 가뭄도 끝내 계절을 거역할 수 없었던지 봄비 앞에서는 그 힘을 다한 듯합니다. 서울 끝자락에 서면 마른 들판이 촉촉해지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사이 보리 잎이 파랗게 하늘과 맞닿는가 하더니 벚꽃은 산골마을 고샅에서 도심 한복판의 넓디넓은 대로까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이성부 시인의 말처럼 봄은 그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오는가 봅니다.

    꽁꽁 언 대지를 파랗게 색칠하는 자연의 변화는 경이롭기만 합니다. 매서운 칼바람을 견뎌내고 거친 호흡과 함께 다시 소생하는 생명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래서 봄은 늘 생명이라는 말위에 춤추고 희망이라는 말과 어깨를 거는 모양입니다.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고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해 벌였던 결전의 또 다른 이름이 봄인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일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 프라하에서 서울로, 그리고 카이로로 이어졌던 봄뿐이겠습니까? 그래서 박목월은 4월을 일러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 빛나는 꿈의 계절이자 무지개의 계절이라고 했나 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2015년 4월에는 선뜻 생명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감당해야 할 고통의 무게가 4월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습니다.

    1년이 다 되도록 진실은 캄캄한 바다 속에 묻혀 있고 희생자와 유가족의 피울음만이 팽목에서 안산으로, 광화문으로 떠다니는 이 오욕의 4월에 우리는 선운사 골째기의 동백꽃을 바라보며 벚꽃잎 날아와 앉은 술 한 잔에 취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날, 봄비를 불러 오는 검은 구름이 낮게 내려앉았던 4월의 그날, 돈으로 능욕하는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고 배․보상 절차의 전면 중단을 촉구하면서 삭발을 하던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어찌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는 생명의 봄을 함께 노래하자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도종환 시인의 시처럼 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에 저절로 떨어지는 그 눈물을 보며 희망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추운 4월입니다.

    4월의 모습

    정부 시행령안 폐기를 촉구하는 세월호 유가족(위)과 굴뚝 위의 차광호

    공장으로 돌아가길 꿈꾸며 구미의 스타케미칼 굴뚝 위에서, 320일이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고공농성의 신기록에 그 몸도 마음도 무거워지는 노동자 차광호에게, 도심 빌딩 사이를 휘감는 찬바람 보다 더 모진 비정규직의 설움을 온몸으로 맞으며 지난 겨울을 념겨야 했던 서울 중앙우체국 전광판 위의 LG U플러스, SK 브로드밴드 노동자들, 오체투지의 기륭전자 노동자들, 그리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온몸에 4월의 부신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걸어 가보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주 강정 주민들, 구룡마을 주민들, 순화동 철거민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에 나선 장애인들에게 안도현이 심어 둔 매화꽃, 산수유꽃, 조팝나무꽃, 목련꽃, 개나리꽃, 제비꽃이 시절을 쫓아 차례로 피는 봄의 들판으로 눈을 돌려보자는 말은 더욱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투쟁의 현장에 몸을 던져 놓은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재벌이 37조의 이익을 곳간에 쟁여놓는 동안 가계부채는 68조나 늘어나 태어나면서부터 2100만원의 빚을 안게 되는 우리들 모두에게, 더 쌓아 둘 수 없을 만큼 사내유보액이 넘쳐나는 곳간은 꽁꽁 잠가두고 노동자의 임금으로 돌려 막으려는 자본의 탐욕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노동자들에게, 아이들 밥그릇에 뿌려진 재를 보며 한숨짓는 이 땅의 부모들에게 진달래 꽃지짐 싸들고 온산 가득한 풋내를 맡으로 가자는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차가운 겨울을 견뎌 내고 맞은 이 봄을 저들의 것으로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식민의 얼어붙은 땅이지만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걸으며, 들을 빼앗겼지만 봄조차 빼앗길 수 없다는 이상화의 노래를 이 4월에 목 놓아 부르고 싶습니다.

    엘리어트의 말처럼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며 다시 일어서야 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동토를 뚫고 새로운 생명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죽음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이야기하는 4월은 그래서 가장 잔인한 달이지만 우리는 봄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역동적인 4월을 꿈꾸어야 할 것입니다.

    신동엽은 노래합니다. 4월은 갈아엎는 달, 4월이 오면 산천에 속잎이 돋아나듯 우리 가슴에도, 이 땅에도 분명히 새로운 속잎이 돋아날지니 그 옛날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그 옛날 광화문에서 목 터진 승리의 4월을 노래하자 합니다. 미치고 싶다고, 4월을 갈아엎는 달로 만들어, 출렁이는 우리 가슴만 남겨 놓고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고 비단처럼 물결칠 푸른 보리밭을 만들자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4월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봄조차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4월 16일, 광화문 세월호 광장이 노란 개나리꽃의 물결로 홍수가 났으면 좋겠습니다. 4월 24일, 붉은 머리띠를 맨 노동자들이 만드는 또 다른 붉은 진달래 산천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4월이 부활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이 4월에 레디앙이 또 다른 시작을 하고자 합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스스로 봄길이 되어 걸어가는 사람들과 늘 함께 하는 레디앙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캄캄한 밤이라도 마주잡을 손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저문 들길에 서서 늘 푸른 별을 바라보는 레디앙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이 글에는 언급한 시인 외에도 신경림, 서정주, 정호승, 고정희, 신석정 시인의 시구도 들어 있습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대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