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의 한국인들이
    노회찬 전 의원을 초청한 이유
    노회찬과 함께 한 7일간의 네덜란드-벨기에 여행기 -1
        2015년 04월 06일 02: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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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중순 노회찬 정의당 전대표가 부인인 김지선 여성의 전화 부회장과 함께 네덜란드 동포들의 초대로 3월 13일부터 19일까지 7일간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방문하여 헤이그에서 에라스무스대학교 부설 국제사회연구소 초청 강연과 암스테르담지역 동포 강연, 네덜란드 사회당 사무총장과의 회담,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사회적 합의모델기구인 SER(사회경제위원회) 방문, 유럽의 중세 상업의 중심지 벨기에 겐트(Gent) 탐방 등의 빼곡한 일정을 수행하고 돌아왔다.

    이번 노회찬 전 대표 초청자 중 한 사람이었고, 6박7일간 노회찬-김지선 일행을 수행한 네덜란드 동포 장광렬씨가 레디앙에 이번 여행에 대한 여행기를 연재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장광렬씨는 2000년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여 그해 가을 중앙당에서 아셈(ASEM) 국제회의 당시 대안포럼 국제행사 담당자로 당 활동에 처음 참여하였고, 2001년 2월 대우자동차 대량정리해고 때 대우그룹회장 김우중 체포결사대 프랑스 원정 때 현지 지원을 했었다.

    그는 2003년 한국 정당사 최초의 해외지구당인 민주노동당 유럽지구당의 초대 사무국장을 지내고, 2008년 진보신당 초대 유럽지역위원장을 지내며 유럽 내 진보정당운동에 몸담았었다. 그런 장광렬씨의 시선으로 이번 노회찬 대표의 네덜란드 방문기를 몇 차례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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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차 파리

    2001년 프랑스 르몽드 신문사 앞에선 김우중체포결사대 왼쪽부터 유만형, 황이민, 박점규, 그리고 현지 지원에 나선 장광렬

    그가 노회찬 전대표를 초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민주주의가 역주행을 하고 있는데, 야당은 야당 노릇을 못하고, 진보정당은 사분오열되어 있는 이 시대에 진보정당운동의 대표적인 인물, 노회찬 대표에게 한국사회에 희망은 있는 지 묻고 싶었어요.

    한국에서 진보정당운동을 해온 이름 없는 많은 분들에 비하면 제가 한 일은 작은 것들이었죠. 유럽지역의 소식을 전하고, 한국에서 원정투쟁 온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권영길, 단병호, 이영순, 김창현, 조승수 등 진보정당의 지도급 인사들이 해외에 방문하여 국제 안목을 키우고 유럽의 진보정당들과 교류하는데 측면 지원을 주고, 복지국가를 먼저 꽃피운 유럽 진보정당들의 정강정책을 소개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게 뒷걸음치는 것 같아 보여요.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농민 등 민중들의 삶은 점점 힘들어지는데 그들을 대변한다는 진보정당들은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는 이 상황이 답답해서, 한국에는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어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노회찬 전의원을 초청했어요. 저에게는 마지막 기대주거든요. 이번에 6박7일간 노회찬-김지선 두 분을 수행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중요한 걸 건졌어요.

    진보정치에 아직도 희망은 있다는 거. 그리고 십년 넘게 진보정당에 헌신해 오다가 실망하거나 환멸하면서 이제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예전의 동지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생겼어요.

    우리 민중들의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는 진보정당, 다시 한번 만들어 보자, 실망, 배신감, 전망 없음, 이런 거 뒤로 하고, 제대로 된 진보정당,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는 정당 다시 한번 만들어 보자는 거예요.

    2004년 총선 때 저는 민주노동당 유럽지구당에서 동포들에게 2천 유로 넘는 돈을 모아서 전달하러 왔어요. 2천 유로면 약 3백만원 쯤 되는 돈이었어요. 풍족하게 하는 동포들이 낸 돈이 아니예요. 정말 알뜰살뜰하게 살면서 모은 돈을 내셨어요. 왜냐면 그분들도 살기 너무 어려워서 광부로, 간호사로 독일에 나오신 분들이거든요. 그런 분들에게 저는 민주노동당 잘 할 거라고 믿어달라고 했어요.

    장광렬2

    2004년 4월 총선 시기 민주노동당사에서 유럽동포 후원모금액을 노회찬 사무총장에게 전달하고 있는 유럽지구당 오복자 위원장과 장광열 사무국장

    근데 4년만에 당은 둘로 나뉘었고, 지금 진보세력은 완전히 무너진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돈 모을 수도 없고, 모아도 줄 당이 없어요. 예전에 저에게 굳게 손잡아 주었던 동지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2004년 총선으로 한창 바쁠 때, 중앙당사에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께서 오셨쟎아요.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분들은 아마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거예요.

    어쩌면 그 때 청년이었던 동지들은 중년이 되어서, 예전만큼 활동 못하게 된지도 몰라요. 저 역시 앞에 나설 입장은 못 되요. 우리들의 활동 이야기를 해봐야 젊은이들에게는 철 지난 과거의 잔소리로 들릴 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보다 선배인 노회찬 전 대표도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적어도 우리가 못 이룬 것에 대한 교훈은 남겨주고, 젊은 세대에게 길을 열어주어야지요. 이번에 노회찬 전 대표를 초청해서 그동안 모르던 진보성향의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해요. 나의 생활조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요. “

    9년만에 다시 노회찬 대표를 초청하게 된 계기

    지난 겨울, 1월의 어느 날, 암스테르담에서 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한 사람이 말했다.

    “요즘 한국의 방송 뉴스는 안 봐요. 언론이 진실은 보도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유언비어만 전달하는 것 같아요. 한국에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국민뉴스만 들어요. “

    다른 사람은 고개를 끄떡이다가 입을 연다.

    “진보정당도 4개로 갈라져서 지지부진한 게 문제예요. 진보정당이 옳은 말을 해줘야 보수 정당들도 정신 차리고 국민 눈치 봐서 막 나가지 않을 텐데, 노회찬, 심상정 같은 정치인들이 진보세력을 새롭게 결집시켰으면 좋겠어요.”

    “맞아요. 저는 노회찬 아저씨, 심상정 언니 정말 좋아해요. 그런 분들 모시고 제발 단결해서 정권 좀 바꿔 달라고 직접 말하고 싶어요. ”

    “못할 것도 없죠. 노회찬씨는 작년에 영국 갔었더라구요. 영국의 동포단체에서 초청했었다던데,,”

    “그럼 우리도 초청할 수 있나요?”

    “그럼요. 물론 해외로 나오시려면 쉽지는 않지요. 비행기 타고 와야 하고, 일정도 비워야 하고. 적어도 일주일은 시간을 내야 하는 데 쉽지 않죠.”

    “아, 그럼 한번 물어봐요. 노회찬 의원 안다면서요?”

    “알긴 한데, 비행기표 값은 드려야 할텐데. 국회의원직 박탈되어서 야인으로 계신데, 오실려면 부담이 많이 될 거예요.”

    “그럼 우리가 비행기표 값을 드리면 되쟎아요?”

    “비행기 표 값이 백만원도 넘을텐데, 그 많은 돈을 낼 생각이 있어요?”

    “까짓거, 합시다. 열심히 돈 벌어서 만들면 되지. 몇 사람만 나서면 그거 못 모으겠어요?”

    이렇게 우연히 노회찬 전 국회의원을 네덜란드로 초청하려는 두 사람의 계획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노회찬 전의원은 두달만에 네덜란드에 오게 되었다. 몇 차례 해외에 나와보기는 했지만, 부인 김지선씨와는 한 번도 해외에 나와 본 적이 없어서, 이번엔 특별히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두 사람이 나오게 되었다.

    우리는 노회찬-김지선 부부의 이번 여행을 황혼여행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30년이 다 되가는 동안 해외여행 한번 같이 못 갔다. 그만큼 두 사람은 각각 진보정치와 노동운동, 여성운동으로 너무 바쁘게 살아왔다.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이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회찬 전의원은 벌써 십년 째 이날 동료 여성국회의원들과 사회활동가들에게 꽃을 보내왔다.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을 한 사람 치고는 여성을 존중하는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3월 13일 금요일 저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바람은 차가왔고, 두 사람을 마중 나온 사람들은 추위에 옴짝 움추린 채로 기다렸다. 프랑스 파리에게 기차로 오는데 그 기차가 연착되었다. 시간 약속은 칼 같이 지키는 게 네덜란드의 문화이지만, 기차는 늘 그렇게 연착되기 일쑤였다.

    민영화해서 경쟁체제를 도입해야만 기차 서비스가 좋아진다는 자유주의자들의 개혁이 네덜란드 기차의 서비스 질을 오히려 낮추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철도운행사와 철도관리, 정비회사를 갈라놓았다. 정비회사는 정비 비용을 낮춰야만 돈을 번다. 철도회사는 정비회사에 주는 돈을 낮춰야만 돈을 번다. 결국 정비예산은 계속 줄어들고 철도 전산망이 마비되는 사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철도끼리 충돌하는 사고가 점점 많아졌다.

    철도운영사는 정비회사에 책임을 돌리고 정비회사는 정비요금을 낮추려는 철도운영사에게 책임을 돌린다. 정부는 둘이 알아서 할 문제라면서 물러난다. 그 사이에 대중교통 서비스 질은 낮아지고, 차 없는 서민들, 학생들만 괴롭다.

    정부는 그 사이에 도로 까는 데만 열중이다. 도로 깔면 차 타고 다니는 자기들 좋고, 자동차 회사 좋고, 네덜란드 석유회사 쉘도 좋다. 중산층은 기차보다는 자동차로 먼 거리 여행을 선호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차 시스템은 점점 더 낙후되어 간다.

    항공사들도 좋다. 암스테르담에서 파리 가는 항공료가 기차요금보다 더 싸다. 그까짓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은 거야 누가 걱정하랴. 당장 경제를 살리려면 비행기를 많이 타는 게 기차보다 낫다. 이렇게 유럽도 점점 미국화 되어가고 있다.

    아무튼 우리는 마냥 기다렸다.

    저녁 약속이 잡혀 있는데, 기차는 오지 않고, 마중 나온 사람들은 초조해졌다. 예정 시간을 30분 이상 넘겨서 날이 어둑어둑해 질 때 노회찬-김지선 두 사람이 역 밖으로 나왔다. 노 의원과 나는 굳게 악수를 나누고 포옹까지 했다. 우리에게는 약 2년만의 재회였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추우니까 빨리 차에 타시죠?”

    짧은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우리는 저녁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노회찬 전의원에게 네덜란드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 방문은 2006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의 법사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헤이그의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있던 유고슬라비아의 밀로소비치 재판을 보러 왔었다.

    토요일에 일행이 도착하여 다른 의원들은 주말에 함께 골프를 치기로 했는데, 노회찬 의원은 혼자서 민주노동당의 당원들을 만나겠다고 하여 유럽당원들이 많이 있는 독일로 1박2일 주말여행을 따로 계획했다. 나는 그때 노회찬 의원을 수행해서 독일로 함께 갔었다.

    2004년 총선 때 재치 있는 비유와 유머스런 화법으로 방송토론에서 갑자기 뜬 당시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노회찬, 이전에 두 번 짧은 만남을 가졌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적지 않게 긴장했었다. 방송에선 코메디언 뺨치는 유머로 정치인으로서 인기 스타 대열에 올랐던 그였기에 내심 얼마나 웃겨줄지 기대를 많이 하기도 했었다.

    열 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와서 다시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에서 독일 뒤셀도르프로 가서 당원, 지지자들과의 간담회를 가지고 나니까 벌써 밤은 깊었고, 우리는 한 당원의 집으로 몰려 갔다. 평소 인터넷 동영상으로만 봤던 노회찬 의원을 본 당원들은 밤새 노회찬 의원에게 이야기를 던졌고 노회찬 의원은 그 질문들을 일일이 받아주며 날이 샐 때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그때 진보정치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보았다. 그는 국회의원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해외까지 나와 당원들과의 대화로 밤을 새는 사람이었다. 벌써 10년이 지난 일이지만, 꼭두새벽까지 당원들과 술잔을 맞대고 같이 이야기하고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다음 날 또 당원들과 나들이에 나선 노회찬 의원의 인상이 그 때 깊이 남아 있었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는 대중을 웃기는 몇 안되는 정치인이었지만, 당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차분하고 냉정하기까지 했다. 그때 우리는 뒤셀도르프 인근의 과거 탄광지역을 돌아보고, 서둘러 기차를 타고 헤이그로 돌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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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9년 후 나는 다시 노회찬 대표를 모시고 네덜란드-벨기에 방문 길을 수행하게 되었다. 두 분과 공항역에 마중 나온 세 명이 동포 집으로 초대되어 정성껏 준비된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와인 잔을 마주치며 네덜란드의 첫날 저녁을 보냈다.

    이야기 주제는 다양했다. 네덜란드는 자유주의가 꽃피운 나라다. 다른 나라에서는 심각한 논란거리지만, 마약을 사용했다고 감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안락사가 가능하고, 동성 간의 결혼도 가능하다. 매춘도 합법화되어서 암스테르담 시내 한 가운데에 홍등가는 국제적인 관광거리가 되었다.

    두 분은 우리를 위해서 프랑스에서 산 사과주를 사 오셨다. 알콜 도수가 꽤 높았지만 사과주라서 홀짝홀짝 잘 들어갔다.

    노회찬-김지선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을까? 노회찬 대표가 인천민주노동자동맹(인민노련) 활동으로 수배된 상태로 활동하고 있을 때 노회찬은 김지선씨를 보고 이 정도의 여자라면 결혼할만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는 사람을 통해서 소개시켜달라고 해서 만나자마자 결혼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연애의 ABC를 건너뛰고 바로 결혼으로 갈만큼 두 사람의 눈에는 불똥이 튄 것일까? 거기다가 김지선씨는 노회찬보다 두 살이 위다. 당시라면 연상의 여인이라 하여 흔치 않은 경우일 텐데,, 김지선씨의 얘기는 이렇다.

    김지선씨는 70년대부터 노동운동을 해서 감옥을 세 번이나 갔다 왔다.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고 애기 낳고, 집안 살림하려는 생각을 가진 게 아니라, 계속 노동운동을 할 생각이었다. 근데 ‘이 정도 남자라면 내가 사회활동을 계속해도 막지 않고 이해해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다. 그것이 1988년 겨울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깨가 쏟아지는 신혼을 즐길 틈도 없이 정보경찰과 안기부의 감시망을 피해가며 노동운동에 정열을 쏟아야 했다. 그러던 중 결혼 1년만에 노회찬은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체포된다.

    노회찬은 7년 동안 수배를 당해서 피해 다니다가 결국 체포당한 것이다. 그만큼 그는 피해 다니는 데도 능력이 좋았다. 마치 남파간첩들끼리 접선하듯이 조직원들을 만나야 했고, 약속 시간 5분이 지나도 상대가 오지 않으면 미리 약속해 놓은 전화박스로 가서 전화번호부에 몰래 넣은2차 접선 계획을 받고, 피신을 준비하며 비밀리에 노동자들을 조직했던 살벌한 시절이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당시에는 시국사범이 들어오면 정보과 형사들에게 죽도록 맞았다. 특히 그는 경찰들의 미행과 체포시도를 번번히 피해왔기 때문에, 형사들을 많이 고생시켰고, 그 때문에 더 많이 맞았다고 한다.

    그렇게 맞고 나서 한 검사가 자기를 불렀다고 한다. 그 검사는 고등학교 동기 동창이었다. 십여년 전 같은 학교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있던 두 사람이 검사와 시국사범으로 만난 것이다. 그 검사는 고등학교 동기라 수갑을 풀게 하고 그 귀한 담배도 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동기는 검사였다. 담배로 구스르는 검사 앞에서 노회찬은 담배 반 갑을 다 피웠다고 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머리속에서는 생각했지만 손은 계속 담배로 갔다. 그 때 노대표는 인간의 의지가 본능 앞에서는 약할 수밖에 없다는 걸 강렬하게 깨달았다고 했다. 동기인 검사가 물었다. “감옥 생활은 어때? 지낼 만 해?”

    “응, 그런대로 괜찮아”

    “아, 이거 감옥이 너무 좋아졌어. 감옥 들어오면 좀 힘들어야 다시는 감옥 들어오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할 텐데,,”

    노회찬은 그때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역시 동기는 검사스러웠다.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지만, 우리는 끊어야 했다. 내일은 암스테르담 동포를 상대로 강연이 있었다. 9년 전에야 당원들과 밤새워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만 이제 노회찬 대표는 50대 후반이 되었다.

    차로 호텔로 모시는 중에도 우리는 간간히 이야기를 했다. 노 대표는 네덜란드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어느 정도냐고 물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통계를 뉴스에서 들은 기억이 없었다.

    네덜란드가 더 잘 사는 거야 다 아는 것이지만, 여기선 언론이 일인당 국민소득을 4만 유로로 올리자는 식의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의 구매력이 작년에 비해 얼마나 올랐냐 떨어졌냐를 얘기할 뿐이다. 그런 질문을 듣자니 한국은 아직도 높은 경제성장율과 일인당 국민소득 그래프의 가파른 상승을 자랑하던 과거에 미련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한참 네덜란드와 독일의 경제가 얼마나 긴밀한 지 얘기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노 대표가 졸고 있는 게 눈에 들어 왔다. 이제 그는 2004년 불판을 갈 때라며 외치던 젊은 정치신인이 아니었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일으켰던 진보정당은 무너졌고, 사람들은 그에게 사람은 좋은데 당이 너무 작아서 아깝다는 말을 하고 있다. <2부에서 계속>

    필자소개
    네덜란드 거주 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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