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네 조국으로 돌아가라"
    [기고] 이주민의 사회적 위치와 다문화사회
        2015년 04월 06일 10:28 오전

    Print Friendly

    결혼이주여성인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에 대한 강한 공격적 여론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이주민,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이는 단순이 우리와 다른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포함된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TWA(초국적아시아여성네트워크) 대표인 정혜실씨의 기고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

    최근 진보진영의 언론매체조차 ‘일베도, 오유도 모두 미워하는 그녀… 새누리당의 이자스민 의원’이라는 타이틀로 제목을 뽑아내는 기사들을 보면서, 보수나 진보진영 모두에게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한 이주여성을 통해 한국사회에서의 이주민이라는 위치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다문화사회라는 한국사회의 지향은 과연 진전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물론 다문화사회를 지향한다는 전제에 대해 동의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테지만, 정부 정책의 기조는 이주민 백만 시대를 운운하면서 다문화사회로 진입했다고 선언했고, 다문화사회를 지향하는 것을 표면적으로는 내세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자리에 이자스민 의원이 비례대표라는 제도를 통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적극적 조치의 일환처럼 사회적 소수자를 배려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만한 위치에서 대표성을 띠고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드러낼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법률을 제정하는 일을 통해 제도화되는 사회 시스템에 개입할 여지를 준 것이다.

    다만 놀라운 것은 그러한 제의는 마땅히 야당의 몫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여당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녀가 국회의원이라는 배지를 달게 되었을 때, 이주민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조차도 몇몇 우려의 목소리를 냈으며, 반다문화정책 진영에서는 그녀를 향한 공격의 화살을 조금도 늦추는 일 없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혀왔다.

    지금처럼 이주민 관련 법안 중 가장 취약한 공격의 대상인 소위 불법체류자들로 불리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그 아이들의 인권 보호적 처우를 개선하는 법률 제정을 추진할 때는 더 많은 위협적 발언과 혐오 발언에 노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혐오의 빌미는 개인적인 인신공격으로 나타나는데, 무엇이든 그 개인과 관련한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그녀의 공적인 의원으로서의 정치적 역할은 개인의 일로 인해 부정적인 측면이 증폭되어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이자스민이 아니었다면 달랐을까?

    그러면 이쯤에서 물어보아야 한다. 이러한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이자스민 의원이 아닌 다른 이주민이 대신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을까?

    사실 그녀를 발탁한 곳이 여당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가 가진 정치적 역량에 대한 평가가 폄하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그녀가 여당의 이미지 쇄신용으로서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고, 비록 그녀가 정치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보할 만한 경험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주민으로서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만한 근거도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녀가 KBS1의 ‘러브인 아시아’ 출연이나 영화 ‘완득이’ 또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는 EBS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라는 것 빼고는 말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그녀가 비례대표가 된 것에 대해 석연치 않은 시선을 거두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입을 통해 이주민의 대표로서 이주민을 위한 제도개선이나 이주민들이 한국사회에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변화의 조건들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되기 전 그녀 또한 이주민의 입장에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간간히 보았음도 사실이다. 포럼이든 토론회든, 인지도가 있든 없든 이주민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사례나 이주민 공동체들의 이야기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적응하면서 살아남기 애쓰는 이주민들의 삶의 힘겨운 이야기들은 당사자가 말해야 그 경험의 진정성이 담보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때의 그녀의 발언에 대한 공감은 호의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지금처럼 이토록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주민이 약자의 위치, 말하자면 소외계층이라고 불리면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서 가진 자가 베푸는 관용에 의존하는 존재일 때는 그나마 참아낼 수 있는 이방인지만, 그가 어느 새 주류사회로 성큼 들어서 중요한 사회적 지위라도 얻게 된다면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선주민으로서의 태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주민이라는 위치가 한국사회에서 갖는 독특한 위치로 오히려 정치적 권력의 자리에 쉽게 오른 듯이 보이는 그 상황이 이주민들에게는 참여의 기회가 확장된 것으로 인지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한국인들 중에는 말도 안 되는 특권을 누리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주민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왼쪽)과 이주노동자 집회 모습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그 미묘한 차이

    그러나 확신한다. 그것은 특권이라기보다는 선거라는 선전적 정치 행위를 위해 이주여성이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노동자를 대하는 계급적 차별에 대한 사회 인식 속에서 전략적으로 채택된 카드였을 것이다.

    이주민이 한국사회로 유입된 이후로 이주노동자는 항상 결혼이주여성의 숫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이주노동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당당하게 거주할 정주의 권리를 귀화라는 제도를 통해 획득한 자들이기도 하다. 즉 국민이 된 자들이다.

    만약 정치적 대표성을 가진다면 그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출신의 남성이 정치 세력화의 힘을 가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 그런 위치에 도달하는 것은 아직 허락되지 않았고, 당분간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주노동자란 소모품처럼 필요에 따라 쓰고 버려지는 노동력일 뿐이기 때문에, 그 유효기간 즉 고용허가제에서 허락하는 고용기간이 끝나면 돌아가야 할 존재들인 것이지, 한국여성들과 결혼을 통해 정주하려는 욕망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인 것이다. 더구나 이주노동자의 장기 체류와 정주화는 한국사회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불안의 요소이지 정책적인 권장 사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주여성은 안전한 존재인 것이다. 결혼이라는 가족제도에 편입되어 며느리와 아내라는 위치에서 고령화와 저출산의 사회적 고민을 해결해 주는 이주여성은 가부장적 남성 중심사회가 필요로 하는 이주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코 위협적인 존재들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은 남성들이 가진 권력에 도달하기 어려운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젠더적 관점과 이주민의 관점이라는 복합적 층위에서 보자면, 한국사회는 상층부에는 한국남성이 그 아래에는 한국여성이, 그 아래에는 이주여성이, 그리고 그 맨 아래에 이주남성이 위치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것은 서구유럽에서 온 이주민을 제외하고 만들어낸 계급적 서열이다.

    서구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은 영어강사이든, 다국적기업의 소속이든, 투자자이든, 유학생이든 심지어 그들의 체류가 불안정한 여행객이든 한국인들의 호의 속에서 예외적 상황의 존재들인 것이다. 그와 반대로 서구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지역의 이주민들은 영어강사이든, 유학생들이든, 다국적기업의 소속이든, 여행객이든 그들은 다 하나같이 이주노동자라는 위치성으로 환원되기 일쑤다.

    여기서 노동자란 그들의 하는 일과 상관없이 그들의 출신지로 인해 하위계급에 위치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심리적 계급일 수 있다. 그것이 한국사회가 노동자를 향해 가져온 태도의 반영이다. 그래서 자신이 노동자임을 부정하는 의식체계로 인해 절대 계급투표를 하지 않는 현상처럼 말이다.

    이주노동자 남성들은 위험한 존재들이다. 한국여성을 통해 정주를 꿈꾸는 노동자들이고, 혹여 그들이 계급적 상층부를 향해 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한국남성들이 가진 일자리를 위협하고 빼앗을 수도 있으며, 낮은 임금으로 노동시장으로 잠식해 들어오다가. 어느 날 그들의 위치에 불만을 가지고 저항의 힘을 기르고 그 억울함을 폭발시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말이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권력의 그 어떤 힘도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여기며, 그들의 체류적 위치를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들고 쫒아내려 한다. 퇴직금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받을 수 없도록 아예 법률로 못 박는 일이나, 한국여성과의 결혼을 통해 정주하려는 그들이 혹여 교통법규라도 위반했다 치면 영주권이든, 귀화에서든 그 자격을 상실한 자들로 간주하며 거부한다.

    혹은 미등록상태 즉 불법체류라고 하는 상태로 노동을 하며 살아 온 삶의 경력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추방의 대상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결혼을 한 후라 할지라도 형벌적 고통의 차원에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서 국가가 재입국을 허락하기까지 자신의 한국인 아내와 강제 별거를 해야 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주가 거부되는 이주노동자 출신의 이주민에게 소수자 배려를 위한 적극적 조치의 일환이나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이라는 상징적 차원에서 발언의 기회를 부여하면서 제도를 바꾸는 법률의 제정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라는 사회적 지위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큰 부담 없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통제관리가 가능한 이주여성을 다문화사회에 걸 맞는 국회의원으로 발탁하는 것이 소수자 배려라는 명분과 어울리는 안전한 선택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자스민에게 특히 가혹한 잣대의 배경은?

    하지만 학력 위조라는 논란으로 인해 그녀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오르며 이주민에 대한 공격으로 비화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자신과 그리고 자신들이 뽑는 국회의원들 내지는 정부 관료들이 보여주는 도덕적 흠들보다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며 마녀사냥이라도 하듯 광기를 부리는 자들을 목도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녀가 이주민의 위험성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미등록이주민 즉 불법체류자들의 아이들에게 한국에서 출생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과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해주고, 그 부모 중 한사람이 함께 거주할 권리를 준다는 법안을 마련한다고 하니 그녀를 향한 공격이 한층 가해진 것이다. 한국사회가 지닌 범죄의 불안함을 전가시키며 색출과 추방이라는 칼날을 들이대는 대상인 소위 불법체류자들로 부르고 싶어 하는 미등록 이주민들을 위한 일을 실질적으로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고분고분 한국사회에 순응하면서 사회통합의 기치에 맞게 행동해야만 하는 이주민이 도움을 받는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이주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드러내었을 때 어떻게 한국사회가 반응할 수 있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반응을 통해 감지하는 것은 다문화사회라는 표방은 선언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정치적 참여라는 그 한발의 진전도 실상 상징적 의미 외에 실질적 진보를 이룬 것이라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녀가 발의한 법들 중에 다문화가족의 혈연적 가족 관계 또는 제도적 가족 관계 안에 포섭되지 않은 난민들 또한 다문화가족 지원에 포함 시켜야 한다는 법안이 계류 중이며, 다문화사회 인식 개선을 위한 대중매체를 통한 홍보물의 제작 지원 및 배포에 관한 법률도 계류 중이고, 이주아동권리보장법안 또한 별 성과 없이 계류가 되면서 통과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다문화사회로의 진전이 더디고 느린 것이 아니라 아예 시작도 되지 않은 것이라는 본다.

    “너네 조국인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일본 극우파와 다르지 않아

    이미 귀화해서 한국인이라는 국민의 자격을 가지고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하는 이주여성을 향해 ‘필리핀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부끄러움 없이 쏟아내는 한국인들을 보며,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살면서 극우주의자들로부터 몇 세대를 거쳐 일본인들로부터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 그 모습을 본다.

    경제적 불황 속에서 불안한 고용 사회를 살아가는 자들이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 놓이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문제를 제기하며, 저항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한 채 스스로 불평등을 감수하며 자발적 복종에 길들여진 채 이주민에게 부당한 편견과 왜곡된 시선으로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쏟아내는 차별과 배제의 그 모습을 본다.

    제조업 분야에서, 그리고 농축산업 및 어업 분야까지 이주노동자들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 현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이 있기에 한국사회가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들은 환대받지 못 하는 이방인들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다문화 논의에서 비가시화되는 이주민들이다.

    그나마 다문화 논의에 중심 대상이 되는 결혼 이주여성들도 한국사회의 주체적인 존재로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자 할 때는 언제든 국외자로 취급받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때때로 자신의 이주민이라는 위치 때문에 주어진 ‘자리’가 기득권인 줄 알고 착각할 때 스스로 순응적 위치에 자신을 내려놓고 침묵하며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도 발견한다.

    근본적으로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이주민 스스로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잠시 주어지는 그 ‘자리’가 일시적이고 임시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것을 지키겠다고 이주민에게 가해지는 불이익과 차별들에 눈 감고, 귀 닫으며 둔감해지는 걸 선택하는 모습도 본다

    그러나 이주민 당사자들 중 일부가 그러한 ‘자리’까지 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은 다른 이주민과 선주민들이 다져 온 공존의 모색이었다는 점이다. 그건 단순히 어느날 하늘에서 주어진 것들이 아니라, 이주민의 유입이 시작되던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싸워 온 투쟁의 시간들이기 하고, 교육의 시간들이기도 하고, 의식을 바꾸는 날들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주민으로서 한국인들과 이주민으로서 한국인 그리고 여전히 불안한 체류지위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와 난민 모두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누구로부터 온 것이며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 지 제대로 보는 것이다.

    내가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과연 가진 것인지, 아니면 착각에 불과한 것들인지, 아니면 가진 것을 나누고 좀 더 차별 없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 오히려 더 풍부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공존의 이익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다문화 사회가 되는 것이 손해가 아닌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토대가 될 수 있는 삶의 진보가 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필자소개
    TAW(터)(Transnational Asian Women's Network)대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