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나는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 ⑥
    박상옥 검사, 그는 과연 ‘고문 근절 의지’라도 있었을까
        2015년 04월 05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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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나는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 – 5 링크

    최환은 그래도 ‘고문은 안 된다’고 했는데

    사건 당일인 1월 14일 저녁 경찰의 화장을 통한 은폐기도를 막고 다음날 부검을 실시함으로써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최환 공안부장은 처음 경찰이 ‘변사사건 발생보고 및 지휘품신서’를 들고 왔을 때 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걸 직감하고 ‘고문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으로 서명을 거부하고 외압에도 맞섰다고 했다.

    사건 당시 이미 경찰의 김근태의장 전기고문사건(85년), 부천서 성고문사건(86년) 등이 발생하면서 경찰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상황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안상수 당시 수사검사는 이후 언론 인터뷰나 『안검사의 일기』등을 통해 “고문행위는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돼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힌 바 있다. 더군다나 안상수는 『안검사의 일기』에서 경찰 자체 수사결과 발표 내용을 언급하면서 경찰의 잘못된 사고를 비판하기도 한다.

    “19일 아침 조한경, 강진규에 대한 조사를 매듭지은 치안본부 측에서 구속영장 신청서류를 가지고 왔다. 영장을 보았더니 가관이었다. 피해자인 박종철의 학생운동 전력과 조사 당시의 혐의사실은 두 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기록해 놓은 반면 구속 대상자인 조한경, 강진규에 대한 법죄사실 부분은 한 페이지 밖에 되지 않았다. 주객전도라더니, 경찰측의 본심이 역력히 드러나는 듯했다.”라고 한 부분이 그것이다.

    아울러 “이번 사건은 일부 수사관들의 지나친 직무의욕 때문에 빚어진 불상사”였다고 반복적으로 언급한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도 비판한다.

    또한 1월 23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진행된 유정방 5과 과장 등에 대한 참고인 진술을 받을 당시를 회상하면서는 “그곳에서 어떤 수사관에게 “박군은 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심하게 고문했을까”하고 묻자 그는 “여기 한 번 들어오면 아무런 혐의가 없어도 똥물을 토해 낼 때까지 고문한다. 그래야 바른 대로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여기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한다”고 했다.”, “어떤 수사관은 동백림사건, 민비련사건, 인혁당사건도 모두 자기 손을 거쳤다고 자랑하였다. 고문으로 사건을 해결했다고 자랑하는 그를 보고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는 기록도 남긴다.

    경찰이나 검찰이나 고문을 대하는 태도는 마찬가지

    그런데 당시 검찰 수사팀이 그렇게 경찰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1월 24일 발표한 검찰의 공소장도 사실 경찰의 발표내용이나 문투와 하등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수배중인 선배 박종운을 검거하기 위해 참고인으로 연행했음에도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박종철군의 혐의내용을 장황하게 써놓은 것은 ‘박종철군 연행의 불법성’을 은폐하고 박종철군이 마치 ‘피의자’ 신분이었던 양 기술함으로써 경찰의 고문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희석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공소장에 나오는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중요 수배자인 박종운과 연계활동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대목도 두 고문 경관의 거짓 진술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것에 불과했다. 그들이 입수한 정보는 ‘박종운이 지난 11월 24일 박종철 하숙집에 들러 하루 자고 갔다’는 것뿐이었다. 이미 학생운동을 떠나 있던 박종운과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박종철은 직접 연계활동을 할 관계가 아니었다.

    “동인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자 사실을 알아내기 위한 위협수단으로” 물고문 했다는 대목 역시 사실과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고문 경찰관의 진술에 따르더라도 “박종철은 물고문을 당하면서 ‘박종운이 시내 독서실에서 지내고 있다. 그러나 어느 독서실인지는 모른다.’고 하자 독서실 이름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라면서 추가로 물고문을 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인데, 박종철이 박종운이 있다는 독서실 이름을 알고 있음에도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았다는 근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소장에 위와 같이 기술한 것은 고문 경찰관의 무모성과 잔혹성을 조금이라도 완화해보려고 한 경찰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였다.

    훗날 수배 해제된 선배 박종운의 증언에 의하면 “1월 초 박종철 하숙집에 들러 박종철에게 연락이 끊긴 몇 사람을 연결해달라고 부탁했고 얼마 후에 다시 하숙집에 들를 예정이었다”고 한다. 경찰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박종철은 파쇼경찰의 모진 고문에도 끝내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경찰은 헛다리를 짚은 채 무모한 물고문을 자행하여 박종철의 목숨을 앗아갔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경찰이나 검찰 수사팀이나 공안사건과 고문을 대하는 인식과 태도에 있어 큰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물고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방송화면

    박상옥, 고문 근절의지 전혀 보이지 않아

    그렇다면 박상옥의 경우 공안사건과 고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게 있을까. 당시 박상옥 당시 수사검사가 꾸민 강진규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1.20)’와 반금곤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5. 21)를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박상옥 수사검사는 “위 가혹행위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닌가요”라고 묻고 강진규는 “박종철이 박종운의 행방과 조직에 대하여 계속 답변을 회피하므로 겁을 주기 위하여 그와 같은 행동을 하였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라는 답변을 이끌어내 계획적이지 않고 우발적이었다는 변명을 그대로 수용한다.

    당시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던 안기부, 보안사, 경찰 등의 고문 행위를 모르고 있었을 리 없건만, 박상옥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이를 파헤쳐보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박상옥이 고문경관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도 의미심장하다. “피의자에게 유리한 진술이나 증거가 있는가요”라고 박상옥이 던지면, 이에 대해 강진규는 “하루 빨리 위와 같은 좌경조직이 와해되어 국가발전이 이룩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답변하고, 반금곤은 “이 땅에 공산주의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제 희망이고 제 상사들에게도 더 이상의 누를 끼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나라를 위해 충성하다 벌어진 일이니 이 점을 충분히 감안해 달라’는 취지의 답변으로 보이는데, 이걸 그대로 받아 적으면서 피의자 신문조서를 마무리한 박상옥의 심정도 고문경관과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상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박상옥과 달리 조한경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87. 1. 20)를 작성하면서 “일반적으로 엄문의 방법에 의하여서라도 좌경 용공분자를 색출하라는 묵시적인 승인과 관행이 소속 상관들에 의하여 인정되어 온 것이 사실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비롯해 상부의 지시나 고문 관행과 관련한 질문을 비교적 집요하게 한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은데 제가 지나친 의욕으로 인하여 생긴 결과입니다.”라는 답변을 듣고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

    1월 23일 치안본부 대공분실(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어떤 수사관에게’ 고문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듣기까지 한 ‘정의로운 검사’였다면 조한경에 대한 추가 신문을 통해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이 결코 우발적인 게 아니었음’을 추궁할 만도 한데,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박상옥은 강진규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 2회(1.23)에 이르러서야 1회(1.20)에는 보이지 않던 고문 관행이나 상급자의 지시 여부에 대한 신문내용을 포함한다. 아마도 안상수 검사의 1회 신문조서를 보면서 본인도 부족한 부분을 채운 것이 아닐까 추측되지만, 이 과정에서도 “저도 본 건 외에는 그런 행위를 한 일이 없습니다.”, “대공업무에 종사하면서 직무에 충실하다가 보니 박종철이 거짓말을 하여 혼을 내주려 하다가 이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답변을 얻어내는 것으로 만족함으로써 강진규의 거짓진술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었을 뿐이다.

    박상옥이 고문 근절 의지를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는 2차 수사에서도 발생한다. 5명의 고문경관이 서로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여 진술하려는 과정에서 상호 갈등이 생기면서 박상옥을 비롯한 2차 수사팀은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를 조사하다가 조한경과 강진규가 “고문을 즐겨 사용하는 전문가”라는 진술을 받아낸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서 발생한 고문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진술을 확보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껏 “고문 전문가로 통한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도의 상투적 질문만이 있을 뿐 “전혀 사실이 아니다”는 답변을 얻어낸 후에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

    만약 박상옥을 비롯한 2차 수사팀이 ‘고문 근절 의지’가 확고했다면 과거 이들이 담당한 사건 수사에서 고문을 사용했는지 여부도 확인했어야 했다. 조한경과 강진규는 물론 황정웅과 반금곤 등이 최근 담당했던 사건 수사 관련 피의자 중 단지 몇 명의 진술만 들었어도 이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결국 이러한 검찰 수사팀의 잘못은 조한경 등이 이후 재판과정에서 “박종철에 대한 고문 말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문해 본 적이 없다.”는 뻔뻔한 진술을 용인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박상옥은 최소한 ‘간첩이나 좌경세력은 고문을 해도 된다’, ‘경찰이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할 경우 고문이라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수사하면서도 고문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도 없었던 결과는

    박상옥을 비롯한 검찰수사팀이 박종철군고문치사 사건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직접 수사했음에도, 국민과 언론 등에서는 이미 고문 근절 요구가 빗발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고문 근절 의지가 없었다는 점이 비록 충격적이지만, 우리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박상옥이 역사적인 박종철군고문치사 사건의 수사 검사를 맡았음에도 이를 계기로라도 ‘고문 근절 의지’를 확고히 하지 못했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5년 후 발생한다.

    박상옥 검사는 92년 부산지검 근무시절, 길 지나가던 무고한 시민을 강도 피의자로 몰아 파출소로 연행한 후 반인륜적인 물고문을 벌인 경찰관에 대해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만으로 피의자를 불구속 수사하는 충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같은 역사적 사건을 담당했으면서도 ‘반인륜적인 고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한 검사가 취할 수 있는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박상옥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충격적인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후에도 안기부, 경찰 등의 고문 관행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일반형사 피의자에 대해 고문이 가해졌던 2010년 ‘양천서 고문사건’에서 확인되듯이 최근까지도 고문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박상옥을 비롯한 검찰 수사팀에게 확고한 고문 근절 의지를 가지고 박종철군고문치사 축소은폐사건 수사를 진행했다면, 그를 통해 국가권력에 의한 고문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춰내면서 관계자들에 대한 단호한 처벌을 통해 ‘고문없는 세상’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졌다면, 하는 아쉬움을 표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한 일이었다. <계속>

    필자소개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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