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와 유신,
    1970년을 되묻는다
    [책소개] 『1970 박정희 모더니즘』(권보드래, 천정환/ 천년의상상)
        2015년 04월 04일 10: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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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시대가 남긴 기억과 상처 그리고 유산의 양은 다른 어느 시대가 남긴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깊고 크다. 공이든 과든 그가 남긴 게 많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1970년대의 정치·사회·문화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고, 박정희의 유산이 여전히 흘러넘치는 이 땅의 오늘을 헤쳐나갈 지혜의 일단을 찾아간다.

    지금! 그때보다 어둠이 더 깊다

    보수 세력은 산업화를 자랑하고 진보 세력은 민주화에 대해 자부심이 크지만, 산업화와 민주화의 현재 모습은 초라하기만 하다. 입시에 시달리는 10대나 청년실업에 직면한 20대, 구조조정을 걱정하는 30~40대나 노후불안으로 우울한 고령세대를 보면 우리 사회가 일궈온 게 과연 무엇이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1. 1970, 박정희에서 선데이서울까지
    ― 문화와 문학, 역사학과 정치학의 사유로 1970년대를 재조명하다 

    보수에게 유신 시대(1972~1979년)는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영광의 시기다. 반면 진보에게는 1948년 제헌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가 압살당한 오욕의 시기다.

    두 입장은 1970년대 한국 사회가 경험한 근대화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정치·경제 영역에 중심을 두고 유신 시대를 파악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1970년대의 일상을 구성했던 구체적인 장면과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70, 박정희 모더니즘-유신에서 선데이서울까지》는 박정희부터 이름 없는 장삼이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말과 삶을 통해 유신 시대에 대한 기존 해석이 그동안 조명하지 않았거나 소홀히 다뤘던 부분에 주목하여 문화와 문학, 그리고 역사와 정치학의 사유로 1970년대를 입체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가 남긴 기억과 상처 그리고 유산의 양은 물론 다른 어느 시대가 남긴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깊다. 그 기간은 무려 18년이었다. 거꾸로 헤아려 이명박, 노무현, 김대중 시대 각 5년씩 15년에다 김영삼 시대의 일부까지 합쳐야 되는 참으로 길고 긴 기간이다. 1960~1970년대의 ‘시간의 속도’는 어땠을까? 변화가 빠른 대한민국의 시공간에서 18년이면 거의 겁(劫) 아닌가? 유신 시대만 해도 무려 7년에 이른다. 북녘의 김씨들이 더 질기긴 하지만, 조선의 이씨 왕 중에 18년 이상 통치한 경우는 얼마나 될까? 공이든 과든 박정희가 남긴 게 많을 수밖에 없다. ― 본문 4~5쪽, 〈들어가며〉에서

    2. 유신 시대 사람들의 삶과 앎,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독재권력과 대중의 날욕망의 만남

    최첨단 뉴 미디어 텔레비전, 그것은 산업화라는 변화의 중심에서 우리 삶을 새롭게 조직하고 관계를 만들어낸 핵심적 미디어였다. 가족공간의 주인공이었다. 텔레비전 보급률이 10퍼센트도 되지 않았던 때에 ‘바보상자’론이 통용되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어떤 내용이든지 선데이서울에 실리기만 하면 저급과 허위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선데이서울은 1970년대의 삼국유사 같은 미디어였다. ‘선데이’의 유흥을 즐기려던 당당함과 뻔뻔함, ‘성’과 ‘부’라는 당대의 터질 듯한 생생한 욕망은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1974년 3월 8시를 조금 넘은 출근길, 안암동 차로 한복판에서 20대 남성이 옷을 벗는다. 청년은 200여 미터를 달리다 골목으로 사라졌다. 외국의 스트리킹에 대한 신문 보도가 시작된 지 1주일 후였다. 청년은 무엇 때문에 옷을 벗었을까?

    지금 우리들의 일상, 향유하는 문화, 대중의 감성 등 여러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원형’이 만들어진 시기가 1972~1979년이다. 성장제일주의, 전체주의적 병영문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우위 등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이 이 시기에 깊이 뿌리내렸다. 1980년대는 이전 시대에 대한 의식적 ‘부정’이었으나, 그 의도는 제대로 관철되지 못했다. 유신 시대를 살았던 장삼이사들은 시장의 자유를 통해서 유신의 모더니즘을 실감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자유주의를 경계·혐오했으며 ‘서구식 자유주의’에 맞서 한국적/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박정희가 구상·실천한 것은 국가자본주의적 체제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자본주의를 위해서라도 박정희는 한국인의 삶을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재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적-자유주의적 삶을 상징하는 단위로서의 중산층 핵가족 역시 박정희 통치기를 통해 자라났다. 새마을운동은 생산성 증대운동이었으나, 그보다 도시-중산층적 삶의 모델을 농촌에 파급시킨 생활개조운동이었다. 이들은 오래된 촌락 공동체 및 대가족의 삶을 잘라내고 중산층-핵가족을 생산해 내는 주거기계인 아파트에 입주했다. 한국에서 아파트란 문화적·상징적 가치를 갖고 있는데, 그 핵심은 자본주의 이전(외부) 관계에 대한 거부다. 중산층과 개발독재의 관련은 이중적이다. 정권은 중산층 육성을 핵심적 과제요 성과라고 역설했지만 중산층의 자유주의적 욕망은 정권의 기획을 뛰어넘었다.

    유신 시대 대중문화와 문화적 모더니즘은 결코 부차적이거나 이차적인 것이 아니었다. 1970년대의 대중문화는 더 다변화되고 폭이 훨씬 두터워졌다. 그것은 탄압과 검열도 거스르지 못한 ‘대세’였다. TV와 라디오가 국민들의 가정으로 보급되면서 일상의 문화는 물론 미디어와 인간의 관계 자체를 바꾸어나갔다. 사회 전체가 보유한 근대적 앎과 교양의 양과 폭도 달라졌다. 개발과 경제발전의 결과가 축적됐을 뿐 아니라 20세기가 개막된 이후 축적돼온 앎을 향한 대중의 열망이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되고 실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여공들이 다닌 산업체 특별학급부터 탄압에 신음하던 대학까지, 한국 지성사는 새로워지고 있었다. 본격예술이나 서구적이고 전위적인 문화도 함께 유신의 검열체제를 뚫고 성장했다. ― 본문 24쪽, 〈1장 박정희 시대를 사유할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성적 수치심’과 ‘성적 흥분’이란 말이 여기서 시작되거니와 그 기준은 형편없이 자의적이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에 대한 단속 기준이 “속옷이 비치는 칠칠치 못한 여자”, “경찰이 보기 민망스러운 아가씨” 등 주관적 판단을 포함하는 상황에서 통제의 합리성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선데이서울』 화보는 대중의 선택을 받았고, 통제권력 또한 이를 적당한 선에서 존중해주었다. 『선데이서울』의 ‘쇼킹화제’, ‘놀랐지 정보’만 보면 한국 사회는 온통 성 해방에 도취된 듯 보인다. 그런데 『선데이서울』은 성적 문란의 반대급부로서 현모양처 여성상을 제안하기도 한다. 『선데이서울』은 성에 한없이 개방적인 여성상을 그리면서도 여기에 현모양처 여성을 병치함으로써 욕망과 검열의 극단을 적절히 얼버무려놓는다. ― 본문 252∼253쪽, 〈17장 『선데이서울』과 유신 시대의 대중〉에서

    3. 유신의 모더니즘, 그 주체는 한 사람이 아니라 대중이다
    ― 박정희 시대를 사유할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유신(維新)’은 후발성과 국가주의, ‘동원된 근대화’와 반민주의 상징어다. 1972년 10월에 발포된 유신은 총체적 억압과 불법적 통치, 인권말살의 기호였다. 비정상적인 체제나 암흑시대에도 ‘유신의 모더니즘’은 있는가?

    ‘개발독재시기’로 불리는 박정희 통치기는 한국 사회를 자본주의적으로 본격 재편한 시기였다. 비록 그 시절 헤게모니를 다투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자유주의로 일관되게 수렴되는 것이 아니었으나, 1960~70년대를 통해 일어난 가장 뚜렷한 변화는 근대-자본주의 체제가 확고하게 뿌리내렸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사회 구조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주체의 습관과 내면까지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이다.

    《1970, 박정희 모더니즘-유신에서 선데이서울까지》는 유신을 생각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세 가지 기본 관점을 제안한다. 첫째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근대화·산업화는 단지 한국이라는 일국 수준에서 성취된 것도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근대화·산업화 세계 분업체제에의 편입과 ‘서구화’였으며, 이는 동아시아 반공전선 구축을 위한 교두보의 건설을 의미하기도 했다.

    둘째,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이분법과 박정희 ‘리더십론’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그래도 이만큼 살게 된 건 그분 덕택’이라는 노예논리에 빠져 있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사실 1960년대에도 1970년대에도 박정희식 쿠테타와 통치 정책이 이 나라에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 일본, 타이완, 북한, 싱가포르, 홍콩, 인도네시아, 필리핀 같은 아시아 나라들의 경제성장과 정치적 상황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셋째, 박정희 체제의 시작과 종말 그리고 성장과 민주주의는 대중의 참여와 동원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체주의 뺨치는 철권통치가 8년 만에 끝장이 난 것은 대중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대중은 언제나처럼 근대화와 경제성장 그리고 복지에는 ‘동의’해주었는데, 박정희는 그런 정책과 몇 가지 성공에 대한 동의를 자신에 대한 지지로 오해하고 영구집권으로 횡령하려 했다. 그러면서 질문을 던진다. 박정희 치하 18년 동안의 총선과 대선에서 단 한 번이라도 노골적인 관권·금권·군권 개입 없이 공정하게 선거가 치러진 적이 있었는가?

    문화 면에서도 그랬다. ‘후기 식민국가’의 두령이었던 박정희는 필요에 따라 민족주의자 코스프레를 하곤 했다. 특히 유신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68혁명 전후 ‘우드스탁’이나 비틀스로 상징되는 급진적 청년문화와 세계적인 문화조류가 마치 섬 같던 한국에도 일부 유입되자 주체성과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검열체제를 ‘풀가동’한 것이다. 하지만 다 막지는 못했다. 한국 청년들도 히피처럼 머리를 기르고 청바지를 입고 존 레넌과 레드 제플린을 들었다. 하길종은 미국에서 영화를 배워 와서 청년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만들었고 신중현은 한국 록을 꽃피웠다. 이문구가 《우리 동네》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잔존하던 전통사회가 붕괴되고 일상적 삶의 양식은 근저로부터 서구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펼쳐진 ‘근대화’ 과정과 등가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 본문 19~20쪽, 〈1장 박정희 시대를 사유할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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