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나는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 ⑤
        2015년 04월 03일 12:4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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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나는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4 링크

    김승훈 신부의 폭로로 시작된 2차 수사

    1987년 5월 18일. 이날은 광주민중항쟁 7주년 기념일이었다.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기념미사가 끝난 후 김승훈 신부가 사제단을 대표해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낭독한다.

    경찰과 검찰, 안기부까지 동원되어 그렇게 막으려고 했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국민은 물론이고, 경찰은 물론 검찰, 그리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도 충격의 늪에 빠진다. 김승훈 신부는 여의치 않을 경우 본인도 감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다 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승훈

    1987년 5월 18일,고(故)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진상 조작 폭로 성명을 읽고 있다.

    검찰은 김승훈 신부의 폭로에 대해 처음에는 이를 부인하지만,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곧바로 5월 20일에 2차수사팀(부장검사 신창언, 안상수, 김동섭, 이승구, 박상옥)을 가동하여 추가수사를 진행한다. 이어 다음날인 5월 21일에 곧바로 정구영 서울지검장을 내세워 “고문경관 3명을 추가 구속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전광석화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수사결과 발표 내용은 말 그대로 거짓투성이였다. “검찰은 5월초에 새로운 사실을 처음 인지하고 수사 중이었다”고 한 말부터 사실이 아니었다. 검찰은 5월초가 아니라 최소 2월 27일에 ‘새로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수사 중 이기는커녕 5월 8일에 최종적으로 재수사를 포기한 상태였다. 검찰로서는 ‘석달 가까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여론의 비난이 두려웠을 것이다.

    사건의 축소은폐 조작이 “조한경 반장이 주도해서 고문경찰 5명이 공모하여 발생한 일”이라면서 “상급자는 물론 다른 동료 경찰관조차 공범은폐 사실을 몰랐을 것으로 안다”고 한 말 역시 거짓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때까지도 검찰은 축소은폐 조작과정에 개입한 윗선 문제를 수사할 계획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검찰은 또 다시 국민을 기만하고 꼬리자르기를 통해 축소은폐 조작의 실체를 덮으려 했던 것이다.

    박상옥, 2차 수사 가이드라인에 충실하게 또 다시 축소은폐 조작하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 박상옥 당시 수사검사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5월 20일 신문조서를 보면 그 해답이 나온다. 조한경을 담당했던 안상수든 강진규를 담당했던 박상옥이든 윗선이 처음부터 물고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나 축소은폐 조작과정에 윗선이 개입했는지 여부, 3월 이후 지속된 윗선의 회유협박 문제와 같은 진정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조한경, 강진규가 2월 27일 안상수 검사에게, 이어 3월 4일 신창언 부장검사에게 ‘3명의 추가공범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밝힌 바 있다는 것은 서로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박상옥은 시치미를 뚝 떼고 강진규에게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는 진술을 번복하고 있나요”라고 질문한다. 검찰의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 문제로 불거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박상옥은 심지어 강진규가 박종철 수사에 참가하게 된 경위를 1차 수사 때와 달리 진술을 바꿔 “사실은 박원택 계장의 지시를 받고 지원하러 간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조한경 경위가 저보고 전에 박종운 관계 수사를 하였으니 데려온 사람에게 박종운 관계를 물어볼 때 옆에서 도와달라는 말을 하여 따라 가게 되었”다고 했음에도 더 이상 추궁하지도 않는다.

    2차 수사에서 4반 소속이었던 강진규가 박종철 수사에 참여하게 된 경위에 대한 진술을 바꾼 이유는 명약관화하다. 상급자가 축소은폐 조작에 개입한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기 위함이었다. 결과적으로 5명이 박종철에 대한 물고문에 직접 가담한 사실이 드러난 마당에 박원택이 1차 수사 때 자신이 “조한경과 강진규를 박종철 담당, 황정웅과 반금곤을 ㅎ모씨 담당으로 지정했다”고 한 진술은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원택 계장도 강진규가 1차 수사 시 참고인 진술을 통해 자신의 지시로 박종철 조사에 참가했다’고 답변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축소은폐 조작과정에 상급자와 어떻게 모의한 것인지’ 등을 추궁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박상옥의 이런 수사 태도는 당연히 사전에 조율된 방침에 따른 결과였을 것이다. 검찰은 경찰의 협조를 얻어 ‘검찰의 직무유기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은폐함과 동시에 경찰 윗선의 개입 문제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재수가가 이루어진 직후 박상옥이 자행한 축소은폐 조작 수사는 다음날 정구영 서울지검장이 발표한 검찰 수사 발표 내용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안상수는 『안검사의 일기』를 통해서도 축소은폐조작을 기도했다

    그런데 안상수는 이후『안검사의 일기』를 통해서 “검찰은 급한 불을 꺼야 할 입장이었으므로 일단 고문경찰관들의 주장에 따라 자기들끼리 스스로 축소조작한 것이라고 밝힌 다음 시간을 두고 그 배후나 경위에 관하여 조사해 나간다는 입장이었다”고 둘러댄다.

    그러나 이는 검찰의 축소은폐 조작기도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21일 수사결과 발표 기자회견 당시 정구영 서울지검장이 기자들과 나눈 일문일답을 보면 검찰이 3명을 추가 구속하는 선에서 또 다시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당시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앞으로 기소할 때까지의 남은 조사는?”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공소유지를 위한 마무리 조사뿐이다.”라고 답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또 다른 공모자가 밝혀져 사회에 파문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인지?”라는 질문에는 “내가 전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수사의 진실은 모두 밝힌 것이라 앞으로 파문은 없을 것이다.”라고 답변하고 있었다.

    안상수도 『안검사의 일기』에서 ‘본의 아니게’ 당시의 검찰 내부 상황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한다.

    “기자회견까지 무사히 마치고 우리는 정구영 검사장 방에서 차를 마셨다. 정 검사장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일성을 내뱉었다. “이제야 밥을 먹겠다” …… 그 말은 서익원 차장, 신창언 부장과 나에게도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이어서 우리는 “예, 이제 우리도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고 화답했다. 정말 기나긴 3개월이었고 오욕과 고통의 세월이었다. 그런 뒤 나는 집에 돌아와 세상을 잊은 듯 곯아 떨어졌다. 이제 검사로서의 내 임무는 끝났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이를 통해서도 당시 검찰 수사팀이 윗선 개입 문제를 제대로 수사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안상수 박상옥

    19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당시 주임검사였던 신창언(오른쪽) 형사2부장과 안상수(가운데) 검사, 수사팀 막내 박상옥(왼쪽) 검사. 안상수 전 검사가 쓴 책에 실린 사진

    5월 20일의 고문경관 조한경과 강진규에 대한 신문조서는 그들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 조작사건을 수사함에 있어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검찰 본연의 임무보다는 국민적 불신에 직면해 있는 검찰조직을 보호하는 데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날의 조한경과 강진규에 대한 신문조서는 박상옥을 비롯한 검찰수사팀이 얼마나 비겁하고 비열한 자들이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제단과 국민의 반발로 시작된 윗선 수사, 그래도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은 무혐의

    애당초 5월 18일 발표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에는 “범인 조작의 각본은 경찰에 의해 짜여졌으며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사건 조작을 담당하고 연출한 사람들은 전 대공수사 2단장 전석린 경무관, 5과장 유정방 경정,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 홍승상 경감 등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일체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다. 보도지침이 판을 치던 시절 검찰과 경찰, 안기부 등 권력기관에서 ‘명예훼손’ 운운하는 협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일 ‘의외로’ 3명이 추가로 구속되는 상황으로 발전하는 걸 보고 언론도 사제단 성명 내용에 대한 확신과 함께 자신감을 얻는다. 좀 더 밀어붙이면 윗선 개입 문제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22일 조간신문에서 과감하게 위 내용을 처음으로 공개했던 것이다.

    당황한 검찰은 “22일 오후 당정회의를 계기로” 윗선개입문제 본격 수사로 입장을 급선회한다. “재판이 잘못돼 갈 땐 새로운 진상 더 밝히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김승훈 신부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태도도 검찰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런 검찰의 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도대체 뭐하는 곳이냐. 검찰도 경찰도 똑같다”는 검찰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증폭된다.

    견디지 못한 검찰은 결국 27일 대검 중수부로 수사주체를 바꾼다. 이로써 박상옥 검사를 비롯한 기존 수사팀은 보조 수사업무를 담당하면서 새로 구성된 대검 중수부 수사팀을 지원하는 치욕을 감내한다. 신창언 부장검사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검찰수사팀은 1차 수사에 이어 2차 수사에서마저도 국민적 불신과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사주체가 바뀌었음에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초등학생도 믿지 않을 거짓 발표로 사건을 덮으려 했던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은 단지 형식적인 참고인 조사만 받았을 뿐 “범인 축소조작과정에 전혀 가담한 바가 없으며, 고문경찰관 3명의 추가구속 시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고 면죄부를 준다.

    결국 대검 중수부가 주도한 새로운 수사팀도 윗선 개입 문제는 박처원(치안감), 유정방(대공수사3단 5과 과장), 박원택(5과 2계장) 등 경찰 간부 3명을 구속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한다.

    이런 대검 중수부가 사건 초기부터 축소은폐 조작과정에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어떻게 개입했는지, 특히 3월 이후 지속된 경찰과 안기부를 내세운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조한경과 강진규에 대한 회유협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등의 문제를 건드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윗선으로 가는 길은 널리고 널려 있었음에도 검찰은 이를 철저히 외면했다. 두 경관을 회유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통장에 담긴 총 2억 원의 출처를 캐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당시에도 ‘안기부 비자금’일 거라는 문제제기가 이미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기부를 비롯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개입 사실을 밝혀내는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수사팀 역시 2억원의 출처를 ‘박처원 치안감 차원에서 경찰 수사공작비에서 마련한 돈’이라고 덮으면서 더 이상 수사를 확대하지 않는다.

    안상수는 『안검사의 일기』에서 5월 25일 저녁에 부검의로 참여했던 황적준 박사가 “사건발생 초기부터 치안본부 간부들이 축소은폐 공작을 벌인 사실을 알려 주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88년 1월 황적준 박사가 당시 일기를 공개하면서 ‘양심선언’한 내용을 이미 2차 수사가 진행될 때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당시 안상수는 황적준 박사로부터 이런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 ‘참고인 진술서’(87. 5. 25)를 받는 것으로 ‘축소은폐 조작과정의 강민창 개입 문제’를 그냥 덮는다. 2차 수사팀의 일원이었던 박상옥도 이를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88년 1월에 시작된 재재수사(3차 수사) 역시 검찰 2차 수사팀이 사건의 축소은폐조작 과정에 강민창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그냥 덮어준 결과 다시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내포한 수사였던 것이다.

    박상옥이 핵심 역할을 하면서 무혐의 처리해 준 경우도 발생하는데, 지휘라인에 있던 최초의 허위보고서(초안) 작성을 주도한 혐의를 받던 홍승상(5과 1계장)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특히 홍승상 계장(5과 1계)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내용이 담긴 최초의 “사건 경위보고서” 초안을 주도적으로 만든 인물이었다. 홍승상은 조한경과 강진규가 기소된 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자 박처원, 유정방, 박원택 등과 함께 면회를 통해 회유 협박하는 일에도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당시 홍승상을 참고인으로 조사한 검사가 바로 박상옥이었던 것이다. <계속>

    필자소개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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