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나는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 ②
    사망과 동시에 시작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축소은폐 조작
        2015년 03월 31일 09: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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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나는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1 링크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만큼 그 진상이 많이 알려진 사건도 드물지만

    사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만큼 그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많이 알려진 경우도 드물다. 그러나 그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조차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28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진상이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는 사실에 오히려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당시 검찰 수사탐의 역할을 미화하고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 작성된 『안검사의 일기』는 당시 검찰과 검찰 수사팀의 역할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어 진실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당시 검찰 수사팀이 축소은폐 조작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최근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970-80년대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수많은 죽음의 대부분은 그 진상이 철저히 은폐되어 여전히 ‘의문의 죽음’으로 남아 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에도 수많은 의문사 사건이 있었다. 85년 우종원군(서울대생) 변사사건, 86년 김성수군(서울대생) 변사사건과 신호수씨(노동자) 변사사건 등이 대표적인 의문사였다.

    정보기관에 의한 잔혹한 고문도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해 있었다. 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김근태 씨 전기고문 사건과 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세상을 온통 분노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경찰과 검찰 등은 끝내 이런 국가기관이 자행한 인권유린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었다.

    박상옥 반대

    자칫 그냥 묻힐 뻔했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도 다른 여타의 사건같이 사건 발생초기 경찰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축소은폐 조작으로 그 진상이 영원히 묻힐 번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경찰은 수배중인 선배 박종운의 거처를 파악하기 위해 박종철군을 불법연행한 후 물고문을 자행하다 사망케 하자 사건을 철저히 은폐조작하기로 결정한다. 이제 ‘물고문에 의한 사망’은 ‘단순 쇼크사’로 둔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그 유명한 말이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였다.

    사건 다음날 경찰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찾아온 박종철군 유족들에게 사건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갑자기 책상을 ‘탁’하고 치면서 깜짝 놀라는 유족들에게 “깜짝 놀라셨죠? 이렇게 했는데 박군도 갑자기 ‘억’하고 쓰러지더라니까요!”라고 시치미를 뚝 뗐다고 한다. 당시 경찰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집단이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경찰은 ‘물고문을 할 시간도 없었다’는 알리바이를 성립시키기 위해 연행시간도 되도록 늦게 연행한 것으로 조작한다. 박종철군을 수사한 수사관의 숫자도 5명이 아닌 2명으로 축소 조작한다. 이것도 모자라 경찰은 박종철군의 시신을 사건 당일 저녁에 화장처리하기로 결정한다. 일체의 증거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경찰의 이러한 기도가 가로막힌 건 정말 극적이었다. 경찰은 사건당일 저녁 ‘변사사건 발생 경위 및 지휘품신서’를 들고 서울중앙지검을 방문한다. 그런데 하필 당직 검사가 부재중이어서 마침 자리에 있던 최환 공안부장을 찾아 서명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때 최환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직감하고 서명을 거부한다. 오히려 시치미를 뚝 떼고 “당신들 정말 고문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무슨 소리냐. 절대 그런 일 없다”고 하더란다. “그렇다면 걱정할 게 뭐 있냐. 내일 사건을 정상적으로 처리하자”면서 서명을 거부했다고 한다.

    최환은 이후 청와대를 비롯한 윗선에서 무려 20-30통의 회유 전화를 받았음에도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최환이 공안부장이었음에도 이렇게 대응한 데에는 경찰에 의해 자행된 김근태 씨 고문사건이나 부천서 성고문사건으로 검찰이 곤욕을 치르고 있던 상황이어서 경찰에 대한 반감도 한 몫을 했고, 이 과정에서 ‘고문은 더 이상 안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당시 당직 검사가 자리에 있었다면 사건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검찰, 직접 수사를 포기하고 경찰에 수사를 맡김으로써 경찰의 축소은폐조작을 방조

    검찰(검찰총장 서동권)은 사건 초기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밝히는 데 핵심역할을 한 최환 공안부장을 윗선(청와대)의 요구에 따라 수사지휘체계에서 배제한다. ‘시신을 화장 처리하여 증거를 없앤다’는 방침을 어그러뜨린 장본인인 최환이 수사를 맡을 경우 통제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검찰은 “그렇다면 특수부에 맡기자”는 최환 공안부장의 요구마저 묵살한 채 일반 형사사건으로 취급하여 형사2부에 사건을 배당한다. 그렇게 해서 신창언 부장검사를 필두로 안상수, 이승구로 내사팀을 구성하여 본격수사에 대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17일 오후 서동권 검찰총장은 모처에 다녀온 후 “경찰에게 명예회복 기회 부여”라는 미명하에 수사권을 사실상 포기하고 경찰 자체 수사에 맡긴다.

    서동권 검찰총장은 2009년 과거사위원회 조사에서도 ‘스스로 한 결정’이라고 주장하지만, 안기부가 주도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결정에 따른 조치였다.

    이미 사건 발생 초기 화장을 통해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고,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면서 단순 쇼크사로 거짓 발표했던 경찰에게 수사를 맡기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경찰에게 사건의 축소조작은폐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배려(?)를 검찰이 그대로 수용한 결과였다. 이로써 검찰은 사건 초기 초동수사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보다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경찰이 경찰 자체수사를 통한 해결을 주장하고 관철시킨 배경에는 83년에 이른바 ‘사직동팀’에서 자행된 한일합섬 이사 ‘김근조씨 고문치사 사건’의 처리 전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근무하고 있던 오수만은 83년 당시 ‘김근조씨 고문치사 사건’을 수사하던 수사팀을 옆에서 지켜본 인물로 초기 경찰이 ‘자체 수사를 통한 명예회복’이라는 논리를 개발하여 관철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결국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경찰은 어쩔 수 없이 물고문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도 사건을 다시 한 번 축소은폐 조작함으로써 조한경과 강진규 2명의 경관에 의해 벌어진 ‘지나친 직무 의욕으로 인한 불상사’였다고 왜곡 발표하고, 1월 19일 두 고문경관을 구속 송치한다.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기존 내사팀 멤버 중 신창언 부장과 안상수 검사는 그대로 둔 채 이승구 검사를 박상옥 검사로 교체하면서 뒤늦게 수사를 시작한다.

    현재 대법관 후보자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박상옥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조작 은폐사건의 수사검사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내사팀에 합류해 있던 이승구를 왜 박상옥으로 교체했는지 이번 청문회에서 밝혀질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까지는 그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검찰 수사팀은 1월 20일부터 두 고문경관이 갇혀 있는 영등포교도소로 가서 ‘출장 수사’를 진행한 후 1월 24일에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수사를 마무리한다.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볼 때, 아니 일반적인 사건 수사 관행에 비추어 볼 때도 불과 4일 수사하고 5일 만에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마무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박상옥을 비롯한 검찰 수사팀은 윗선의 지시에 의해 서둘러 사건 수사를 마무리했던 것이다.

    이제 이들 검찰 수사팀이 얼마나 졸속적이고도 엉터리로 사건 수사를 진행했는지, 특히 그 과정에서 박상옥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 <계속>

    필자소개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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