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의 기원’에서
    ‘평화의 기원’으로의 전환
    [책소개]『판문점 체제의 기원』(김학재/ 후마니타스)
        2015년 03월 28일 09: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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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을 둘러싼 가장 뜨거운 논쟁은 그것이 내전이냐 국가 간 전쟁이냐, 즉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를 둘러싼 것이다.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격렬했던 것은 이 논쟁이 전쟁의 참혹한 결과와 고통, 상흔을 전쟁 발발의 기원에 있다고 여기고 전쟁의 가공할 결과를 모두 전쟁을 시작한 ‘적들의 책임’으로 귀속시키고 ‘단죄’하고 ‘처벌’하려는 형법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형법적 정서가 전쟁의 성격과 책임 자체를 냉정하고 깊이 있게 성찰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기보다, 어느 한쪽의 정치적 입장을 선택하고 강화하는 정치투쟁에 의해 압도된다는 것이다. 소련과 북한을 만악의 근원으로 만들려 해왔던 쪽이나, 미국의 책임에만 주목하는 입장이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국가 간 ‘비난 게임’을 강화해 온 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지켜봐야 했다.

    이 책은 이런 영구 투쟁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전쟁의 기원’이라는 문제의식에서 ‘평화의 기원’이라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제안한다. 즉 한국전쟁 자체가 처음부터 (내전이나 국제전 같은) 특정한 ‘형태’의 전쟁임과 동시에 특정한 평화 기획들과 맞물려 그 자장 속에서 전개되고 종식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연구 또한 미국의 냉전 연구, 즉 소련의 책임을 묻고 비난하는 전통주의와,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비판적 수정주의, 그리고 탈냉전 이후 소련과 동구권 문서고의 실증적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다시 기존의 정치적 주장들을 반박하고 수정하는 탈수정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왔다.

    특히 연구들이 오랫동안 전쟁 발발의 기원 문제에 천착했던 것에는 전쟁의 책임을 둘러싼 냉전의 정치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한국전쟁은 국제전인가 내전인가라는 이분법적 선택의 구도로 논쟁이 주도되었다.

    그 결과 특정한 평화 체제로서 판문점 체제의 제도적 ‘형태’와 ‘평화의 성격’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예컨대, 이런 질문. 한국전쟁은 왜 군사적 실무 차원의 정전 협상으로 종식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았는가?

    이 책은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진행된 전 지구적 자유주의 국제법 질서의 구축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한국전쟁을 종식시킬 평화 체제의 성격과 형태에 대한 논쟁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무조건 항복과 뉘른베르크 재판, 도쿄 재판, 그리고 유엔 헌장과 제네바 협정, 냉전과 중국의 개입 같은 무거운 국제법적 쟁점과 논란들이 연계되어 있었다. 이 책은 냉전 이전부터 형성되어 온 자유주의적 평화 기획의 장기적인 역사적 형성과 변화에 주목하며 20세기 자유주의 평화 기획을 분석하고 있다.

    한국전쟁, 최초의 유엔 전쟁,
    19세기적 국가 주권의 원칙과 20세기 기획의 충돌

    한국전쟁에서 내전이냐 국제전이냐 논쟁의 핵심은 외부의 개입이다. 사실 이 외부 개입의 정당성 논쟁에서 핵심은 미국과 소련의 개입이 아니라 바로 유엔의 개입이다.

    여기에 바로 기존 ‘냉전 연구’의 틀에서 미국과 소련 혹은 남과 북 가운데 어느 한쪽만을 비난하던 연구들이 간과해 온, 핵심적인 국제적 권위의 차원이 있다. 한국전쟁은 유엔이 설립된 이후 집단적 자기방어 원칙을 적용해 전면적인 무력 개입을 결정한 최초의(‘제1차 유엔 전쟁’), 그리고 냉전 시기로서는 유일한 전쟁이다.

    유엔이 개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유엔 헌장 내부에 존재하던 두 가지 이질적인 원칙이 충돌했다. 첫 번째 원칙은 유엔이, 국제 평화에 대한 위반이 발생할 경우 개입할 수 있다는 새로운 20세기적 원칙, 두 번째는 주권국가 내부 사안에는 어떤 외부 개입도 금지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근대적 원칙이었다.

    이 두 가지 원칙의 충돌이 바로 한국전쟁의 성격(내전/국제전)을 둘러싼 논쟁의 근원이자 국제법적 배경이다. 즉 이 논쟁의 최종적인 정치, 사법적 정당성의 근거는 궁극적으로는 서로 충돌하는 20세기의 전 지구적 자유주의 기획과 19세기적 국가 주권 원칙에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 충돌에서 미국이 승리한 결과가 바로 한국전쟁 초기 유엔에서 내려진 결정들이었다. 즉, 한국전쟁 초기 결정의 사례는 냉전의 전략과 결정권자의 문제만이 아닌 20세기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초국적 법치 기획이 적용된 사례인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모든 냉전 시기를 통틀어 유엔과 미국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중요한 결정들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1950년 6월 25일부터 7월 31일까지의 안보리 결정은 전례도 없고 이후 반복될 수도 없었던 매우 이례적인 결정들이었다.

    무초 미 대사가 한국전쟁 발발을 보고한 지 5시간 만에 안보리 회부가 결정되고, 한국 상황에 대한 의제가 안보리에 상정된 당일에 바로 ‘평화에 대한 위반’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이런 초고속 결정은 유엔이 개입한 다른 주요 지역 분쟁들과 비교하면 분명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수많은 논쟁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유엔의 성격과 기능은 무엇이며, 유엔을 통한 무력 개입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유엔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의 도구인가, 아니면 전쟁 억제와 처벌의 도구인가, 유엔은 전 지구적 주권 질서의 상징인가, 아니면 국민 국가들끼리의 합의와 토론의 장인가…라는 국제법과 초국적 질서의 근본적 쟁점들에 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 관련 국제법 논쟁은 단순히 냉전의 대립이 아니라 초국적 기획과 관련된 논쟁의 산물로 볼 필요가 있다.

    체제

    포로 자원 송환 : 자유로운 개인의 발견과 적나라한 폭력의 역설

    최인훈의 <광장>에서 한국전쟁 포로였던 주인공 이명준은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전쟁 포로가 돌아갈 곳을 선택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한국전쟁은 포로들 개개인에게 송환에 대한 의사를 묻고, 동의하는 경우에만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자원 송환 원칙이 공식적으로 적용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공산 진영은 1949년 제네바 협약에서 합의된 19세기적 주권 원칙, 즉 전쟁이 끝나면 모든 포로를 즉시 송환시킨다는 집단적 원칙을 택했지만, 미국은 기존의 원칙과는 다른,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를 우선시하는 20세기적 원칙을 새롭게 도입했다.

    전쟁 초기에 미군에게 포로란 적대 국가의 정규군이 아니라 그저 ‘유엔 사령부에 의해 시설에 억류된 모든 사람’이었다. 즉 유엔군은 전쟁 초기에 전선에서 아군이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을 일단 포로로 잡아들인 후 후방으로 이송하고, 집결소에서 추후에 심사를 거쳐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결과적으로 전쟁 초기에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포로로 역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미군은 사후에 조사를 통해 필요에 따라 이들을 재분류했다. 이에 따라 포로수용소에는 군인들과 민간인이 섞여 있었고, 중국인과 한국인이 있었으며, 두 개의 중국, 두 개의 한국이 존재했으므로 포로들의 정치적 성향도 서로 달랐다. 이렇게 복잡한 정체성과 성격을 가진 포로들이 17만 명에 달했다.

    자원 송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별 포로들을 ‘심사’해야 했다. 문제는 심사를 통해 ‘자유로운 개인’을 선별해 그들에게만 새로운 권리를 부여하겠다는 선별 논리가 전쟁 상황이라는 현실에서 적나라한 위계와 폭력을 부추기고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또한 포로 심사가 실제로 진행되면서 ‘동양 공산주의자’라는 새로운 범주가 등장했다. 자원 송환 원칙이, 기존의 국제법적 근거들을 모두 넘어서는 새로운 자유주의 문명의 원칙으로 부상한 순간, 수용소 내부에서는 이 심사 자체를 거부하는 포로들에게 적나라한 폭력이 자행되었다. 즉 초국적인 이상과 규범이 새로 등장하자, 이를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이 마치 부정적 거울상처럼 등장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개인’은 이들의 정치/전략적 유용성을 식별하는 심사를 통해 선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로수용소 내부에서 시행된 재교육 같은 인간 개조 프로젝트, 개인(집단)의 정치적 망명이나 전향을 장려하는 배신자 프로그램을 통해 ‘창조’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합리적 이성과 존엄한 인격을 가진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이, 한국전쟁에서는 정치적 신념의 배신을 우대하는 차별적 보상 시스템, 정치체제에 가장 호전적으로 충성을 증명해야만 난민적 지위를 부여하는 망명 시스템으로 대체된 것은 이 전쟁의 진짜 비극적 결과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즉, 자유주의가 전 지구적 규모에서 가장 상위의 가치로 여겨졌던 바로 그 순간, 냉전 정치의 가장 밑바닥에서는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고 칸트가 말했던 그 개인주의의 근본적인 정언명령이 배반된 것이다.

    아시아 패러독스 : 왜 아시아에는 ‘유럽연합’이 없는가

    왜 아시아에는 공동의 협력을 위한 노력이 제도화되지 못하는가, 왜 아시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 유럽연합이 없는가라는 질문들이 제기된다. 필자는 활발한 경제협력과 달리 군사적 충돌의 위협이 상존하는 아시아의 상황을 ‘아시아 패러독스’라 부르고, 그것의 핵심 기반 중 하나인 한국전쟁 군사 정전 체제를 하나의 특수한 평화 체제로서 판문점 체제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정전 협상의 타결과 제네바 협상, 반둥회의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개에서 우리는 유엔을 통한 보편적 법치 기획의 실패와 퇴조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모두 유엔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심지어 유엔에 반대하며 전개되었으며, 보편적 국제법과 국제기구 대신 국가 간 권력 균형 체제와 군사 동맹 체제가 등장했다.

    결국 칸트적인 초국적 법치 기획은 한국전쟁 초기 국면에서 포기되었고, 대신 미국이 주도하는 홉스적 차별 기획이 대다수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정초한 제도적 틀을 만들어 냈다. 이른바 아시아 패러독스는 한국전쟁의 경험을 통해 본격화된 홉스적 차별 기획의 산물인 것이다.

    아시아 패러독스는 단순히 문화적 편견의 산물이 아니라 매우 격렬한 전쟁과 충돌의 부작용이다. 즉, 아시아 지역 질서에서는 민감한 정치 군사 문제를 직접 다루는 대신 경제나 문화 협력을 우선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문화적 편견 때문에 다자간 협력이 이뤄지지 못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이라는 격렬한 전쟁의 후유증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또한 미국이 동아시아 국가들을 무시한 결과라기보다, 한국전쟁과 동아시아 냉전에서 직면했던 국내외적 저항과 반발의 결과 탄생한 제도적 유산들이다. 이렇게 볼 때, 아시아 패러독스의 특징은 단지 다자주의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해소하는 것으로서의 ‘정치’를 적극적으로 회피하게끔 제도화된 것이다.

    판문점 체제: 불안하고 유동적인 임시 정전 체제

    판문점 체제를 구성한 두 가지 제도적 축은 임시 군사 정전 체제와,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한 군사 동맹 체제였다. 판문점 체제는 탈식민과 전후 처리 같은 동아시아 사회의 요구를 회피하고 유예시킨 탈정치적 군사/경제 질서이다.

    한국전쟁 당시 표출된 다양한 갈등과 문제들은 인정과 합의, 협상과 토론의 정치로 해결되지 않았고, 그저 군사와 경제라는 특화된 기능에 기반한 양자 관계들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종식은, 미국과 중국이 동남아에서 본격적인 냉전 경쟁을 벌이게 되는 기점에 불과했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아시아에서 한국이나 일본과 맺은, 양자 간 방위 협상과 같은 형태의 자유주의 군사동맹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동남아시아에 일종의 ‘판문점 모델’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판문점 체제는 자유주의의 보편적 원칙들을 군사력으로 강제로 관철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코 안정적인 영구 평화를 창출하지 못한 실패 사례이다. 즉 안정적인 영구 평화 체제가 아니라 합의의 수준이 매우 낮은 군사 정전 체제이고, 지난 60여 년간 현존 질서 유지에 대한 주변 강대국들의 강박에 의존해 겨우 유지된 불안하고 유동적인 체제이다.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

    판문점 체제를 극복하기는커녕, 이 체제가 영구화되거나 더 악화될 수 있는 현재 시점에서, 그동안 제기된 평화론들이 얼마나 유효한지 냉정하게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새롭게 필요한 평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필자는 뒤르켐을 이야기한다. 아노미에 대한 뒤르켐의 해법은 강력한 국가의 건설이나 보편적 국제법의 구축이 아니라, 먼저 사회 자체의 분업의 전개로 인한 사회적 연대의 발전이다. 서로 연대 의식을 가진 기관들이 충분히 접촉하고, 매개 단체들이 분업 관계에 필요한 규범을 형성하며 이때 발생할 수 있는 불평등의 외적 조건을 제거하고, 사회 내부에서 연대가 발생해 자연스럽게 완전한 평화를 요구하는 상태에서 비로소 사회적 평화가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판문점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평화에서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판문점 체제의 극복은 단지 한국전쟁을 종식할 국가 간 평화 협약의 수준을 넘어서, 궁극적으로는 아시아 연대 네트워크의 구축을 지향해야 한다.

    이는 “정부의 각료 회의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 내부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조금씩, 스스로 고양될 수밖에 없다. 지속적인 만남과 자유로운 교류가 이어지고 분업관계와 사회적 연대가 형성되며, 사회적 정의의 원칙으로 평화의 기반을 수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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