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어느 한 여성의 비극적 운명
    [책소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정병준/ 돌베개)
        2015년 03월 21일 12: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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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일제하 중요 독립운동 인사였던 현순 목사의 맏딸로 제1호 하와이 출생 한국인이자 박헌영, 김단야 등과 독립운동, 재미한인 진보운동에 헌신했던 현앨리스의 비극적 삶과 그 시대를 조망했다.

    현앨리스의 개인사에서 출발해 현앨리스와 아들 정웰링턴의 가족사를 거쳐 4세대에 걸친 현씨 집안의 근대사를 다룬다. 더불어 재미한인사, 한국 독립운동사, 한국 현대사, 북한 현대사, 냉전사와도 일정한 교집합을 형성한다.

    현앨리스는 다면적이고 중층적이며 경계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신민, 미국의 시민, 남한의 국민, 북한의 공민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경계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결과 좌익, 북한 첩자, 미국의 스파이라는 공존하기 어려운 극단적 정체성을 강요당했다.

    그녀는 우연한 선택이나 돌출적 행동으로 비극적 결말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와 노력의 결과 그 경로에 도달했다. 그녀는 한국 근현대사가 세계체제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뿌리 뽑힌 존재였으며, 늘 조국을 찾아 방황하는 방랑자,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런 경계적 삶은 한국 근현대가 경험한 파국이 반영된 것이다.

    이 책은 그간 ‘박헌영의 첫 애인’, ‘한국판 마타하리’ 등으로 잘못 소비되어온 현앨리스와 그 시대의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한 오랜 추적의 산물이다.

     ‘공산주의자’와 ‘미제 스파이’로 지목되어 추방, 처형되었던 여성

    저자가 오랜 시간에 걸친 추적 끝에 현앨리스와 그 가족, 당시의 상황을 복원해낸 책이다. 2000년대 초반 몇몇 일간지를 통해 ‘한국판 마타하리’로 소개된 바 있는 현앨리스는 실상 ‘마타하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며 그 삶을 추적해나갈수록 오히려 당대의 비극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생을 마감해야 했던 안타까움이 더 부각되는 여인이다.

    정 교수는 처음엔 막연히 현앨리스가 미국의 스파이거나 박헌영의 애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매혹적 상상만 있었는데, 체코 프라하에서 중요한 문서들을 발굴하고 1921년 박헌영과 현앨리스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하면서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 모자이크를 완성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현앨리스-1

    책은 위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2열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앳된 소녀가 바로 현앨리스다. 그리고 1열 가운데에 보타이를 맨 인물이 박헌영, 맨 오른쪽은 현앨리스의 동생 현피터다. 또한 그동안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으로 알려져왔던 인물(2열 왼쪽에서 세 번째)은 주세죽이 아니며, 2열 맨 오른쪽의 비스듬한 포즈로 앉아 있는 인물이 주세죽인 것으로 밝혀졌다.

    1921년 겨울 상하이에서 중국에 유학 중이던 한국 학생들이 모여 찍은 것으로 확인된 이 사진은 원래 박헌영이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시절인 1929년에 각국의 혁명가들과 찍은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런데 거의 한 세기 만에 이 사진의 실체가 이 책을 통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북한에서 주장해온 ‘박헌영 간첩사건’의 실마리 하나가 풀리게 된다.

    1955년 북한에서 김일성의 최대 정적인 박헌영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현앨리스는 1920년 상하이 시절 박헌영의 ‘첫 애인’이자 미국 정보기관의 첩자로 등장했는데, 이는 현앨리스가 미국 정보기관의 공작원으로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을 포섭하는 ‘한국의 마타하리’ 역을 맡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실상 박헌영과 현앨리스는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의 꿈을 함께 키워온 오누이 같은 사이였으며 사랑과 결혼의 대상도 서로 달랐다. 이후 25년여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박헌영이 미군과 정보기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던 현앨리스와 이사민을 북한에 입국시켜주고, 이들에게 외무성, 조선중앙통신, 조국전선 등의 일자리를 주선해준 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혁명동지들의 손에 처형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현 앨리스

     현앨리스와 그 가족의 파란만장한 일생

    현앨리스의 아버지 현순은 ‘조선독립단’의 상하이 특별대표로 활동하며 3.1운동의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중국.미국.유럽 등지에 전하는 한편 해외 정보를 국내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주요 독립운동가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도 기여한 인물이다.

    1919~1920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가장 중요한 이승만의 지지 세력이자 응원자의 한 사람이었으나 후에는 외교적 방략과 정치적 견해차로 이승만 진영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63년에 건국훈장을 받았고 1968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작고했다. 이후 1975년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회고록인 『현순자사』玄楯自史를 남겼다.

    현앨리스(현미옥)는 현순 목사의 여덟 자녀 중 맏딸로 1903년 하와이에서 태어나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성장했다. 그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미국.기독교.민족주의가 그녀의 존재론적 기반을 이루었다.

    다섯 살이던 1907년 가족과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성장하며 이화고보를 졸업했고, 이화대학을 다니던 중 1919년 3.1운동 직전 상하이로 망명한 아버지를 찾아 이듬해 남은 가족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3.1운동의 진정한 후예였던 그녀는 상하이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러시아.혁명 등의 뜨거운 에너지와 대면했고, 이후 진보주의자와 혁명가로서의 삶을 열렬히 추구했다. 그녀는 상하이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하와이에서의 노동운동, 재미한인 사회에서의 공산주의 활동, 해방 후 남한 혁명운동의 민족주의적 에너지에 매료되었고, 진보운동에 헌신했으며, 강한 생활력과 의지력을 바탕으로 가족을 이끌었다.

    특히 동생인 현피터와는 1930년대 후반부터 현앨리스가 체코로 떠난 1949년까지 인생의 행로를 함께했다. 남매는 1930년대 하와이에서 노동조합운동.미국공산당과 관련되었고, 해방 이후 재미한인 사회에서 가장 급진적인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 나아가 1948년에는 미국공산당 당원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개인적.가족사적으로 현앨리스에게는 불행이 끊이지 않았다. 행복한 대가족에서 성장한 현앨리스는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정준이라는 양반의 후예와 결혼했지만 봉건적 구식생활과 나태한 지주생활에 젖어 허송세월을 하는 남편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택했다. 한때 독립투사였던 정준이 결혼 후 조선총독부 산하의 관리가 된 것도 네 살 난 딸을 두고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이혼 당시 그녀는 태중에 아들이 있었으며 하와이로 건너와 혼자 아들을 낳았다. 두 번의 임신과 출산, 이혼 과정을 겪으며 불행과 좌절을 겪어야 했던 그녀에게 남겨진 아들 정웰링턴은 불행한 결혼의 유산이었지만, 그녀의 삶을 증명하는 유일한 희망의 끈이기도 했다.

    이후 외조부모의 손에 자라난 정웰링턴은 체코로 건너가 고투 끝에 외과의사가 되었다. 한때 어머니인 현앨리스와 함께 ‘사회주의의 이상향’ 평양으로 들어가기를 희망했으나 그 꿈은 끝내 이룰 수 없었으며, 1963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적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상징

    현앨리스는 일본인이나 미국인이 되길 거부하고 해방 한국의 진정한 한국인을 꿈꾸었다. 이상주의자이자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자였던 그녀는 상하이에서 사회주의를 접한 이래 서울과 상하이의 ‘혁명동지’들을 꿈꾸며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지만 1930~1940년대 식민지 한국과는 격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1930년대 자유주의가 만연한 대공황과 뉴딜 시대의 미국 공산당 당원이었고, 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국의 대소對蘇 포용정책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했다.

    해방 후인 1945년 말 미군정의 민간통신검열단 소속으로 도쿄를 거쳐 한국에 들어온 현앨리스는 1946년 주한미군 내 공산주의자들인 제플린, 프리쉬, 클론스키 등과 박헌영을 면담했다는 이유로 북한의 첩자로 몰려 추방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독립』 신문과 재미조선인민주전선 등 진보진영에 깊숙이 관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 현앨리스의 마지막 소망은 좌익 친구들을 따라 북한으로 가는 것이었다.

    당시 그녀는 현실사회주의, 해방 후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입체적 경험과 판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체코 프라하를 거쳐 1949년 평양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낯선 세계였다. 그곳은 그녀가 깃들고자 했던 이념과 사상의 조국이 아니었다. 북한은 그녀를 이질적 존재이자 위험 요소로 간주했고, 그녀를 통해 박헌영까지도 미국의 스파이로 규정한 후 제거해버렸다.

    고향을 상실한 채 끊임없이 떠도는 방랑자,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의 삶은 그녀가 맞닥뜨린 한국적 근대의 종착점이었다. 낯선 곳에서의 쓸쓸한 죽음은 그녀가 당면한 근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어디에도 동화되지 않고, 어느 나라에도 귀속될 수 없었던 그녀의 정체성과 부동하는 경계적 삶은 결국 그녀에게 스파이의 굴레를 씌우고 말았다. 일본의 입장에서 그녀는 ‘위험한 좌익 혁명분자’였고, 미군정의 눈에는 좌익과 소통하는 ‘악마적 존재’로 비쳤으며, 북한에서는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으로 낙인찍혔다.

    한국 근현대사의 경로는 그녀의 한 몸에 다중적이고 역설적인 정체성을 강요했다. 현앨리스를 투과한 근현대의 빛은 공존 불가능한 극단적 스펙트럼을 보여주었고 자기 의지로 생을 개척해온 그녀는 한국적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상징이 되었다.

    비극적 진실이 전하는 역사적 울림에 귀 기울여야

    남북한의 누구도 현앨리스의 굴곡 많은 인생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박헌영 간첩사건의 조연으로 다양한 역할을 부여받았지만, 그녀가 인생의 주인공으로 조명받은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현앨리스를 미국의 고용간첩으로, 남한은 그녀를 ‘한국판 마타하리’로 호명했지만 그녀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없었다. 그녀는 미국의 간첩.이중첩자.역공작.미인계 등 첩보.애정 소설의 통속적 여주인공의 이미지로 소비되었을 뿐이다.

    그 인생에 드리워진 식민.분단.전쟁의 굴곡진 근현대사는 전쟁, 첩보, 공작, 권력투쟁, 사랑, 배신, 여간첩 등의 현란한 표상에 가려지고 말았다.

    3.1운동이라는 독립과 혁명의 찬연한 빛에 매료되었던 한 청춘은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하와이, 뉴욕, 도쿄, 서울, 로스앤젤레스, 프라하, 부다페스트, 평양으로 줄달음질치며 역사와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비극적 역사의 경로만큼 쓰라린 개인적 불행과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의지와 열정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마침내 이상향에 도달했다고 믿던 순간 샹그릴라는 죽음의 하데스임이 드러났다. 그녀와 비슷한 선택을 했던 많은 재미한인들도 같은 운명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 비극적 한국인들의 운명은 제대로 기억되지 않았다. 거친 시대가 남긴 상처라기엔 너무나 가혹했고, 그들에게 덧씌운 ‘스파이’라는 오명은 비극을 우화로 만듦으로써 치열했던 삶에 모욕적 기억만을 남겼다. 그리고 비극적 진실이 전하는 발현되지 못한 역사의 가능성과 교훈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갔다.

    저자는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이 비극적 삶들을 복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끝맺는다. “한국 현대사는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한 여성의 치열했던 삶을 스파이의 우극愚劇으로 마멸시켰지만, 미래 한국은 묘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그 삶이 전하는 역사적 울림에 좀더 진지하고 관대한 성찰을 갖게 될 것이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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