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소멸에 맞서는 일
[책소개] 『오래된 가게』(정진오 / 한겨레출판)
    2015년 03월 21일 12: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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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역사로

가게에는 사람이 오가고 물건이 드나든다. 그래서 이야기가 많다. 오래된 가게에서는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이야기들이 쌓여 기억의 지층을 이룬다. 저자는 그 기억의 지층을 한 켜 한 켜 들추어 원래의 이야기를 복원하고, 그것을 지역의 역사라는 더 큰 이야기 안에 자리매김하려고 애쓴다.

저자가 주목하는 가게들은 그리 특별한 데가 없다. 사진관, 철공소, 과자점, 양조장, 이발관, 건어물점, 다방, 양복점, 얼음집, 자전거포, 헌책방. 어느 동네에나 으레 한둘쯤 있을 법한 가게들이다.

새우잡이 배, 선구점(船具店), 염전, 조선소 정도가 색다른데, 이는 항구도시 인천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가게뿐 아니라 그 주인들도 그리 특별한 데가 없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이다.

어린 나이에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했고, 삶의 의미를 돌아볼 여유 없이 온 힘을 다해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들에게 오래된 가게란 대개는 ‘가업’이 아니었고 생애를 통해 이루어야 할 목표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오랜 고군분투의 결과물일 따름이었다.

오래된 가게

그럼에도 이 보통 사람들의 보통 가게가 품은 이야기들이 한데 모여 그려 내는 그림은 인천이라는 도시의 특성과 지나온 역사를 드러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들의 이야기에서는 바다, 일제, 전쟁, 실향, 미군, 화교, 공장 같은 공통점이 도드라진다. 모두 인천이 겪은 ‘근대’와 관련된 특징들이다.

그러나 이 공통의 배경 안에서 각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모두 독특한 맛이 난다. 같은 세월도 업종과 주인의 개성에 따라 살아 낸 방식이 저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매 이 책은 한 폭의 모자이크다. 인천에서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삶, 저마다 색깔과 모양을 달리하는 그 조각 그림들이 모여 인천의 삶이라는 큰 그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기억의 소멸에 맞서는 일의 소중함

그렇게 모자이크를 독해해 가노라면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모자이크의 작은 조각들, 오래된 가게가 들려주는 작은 이야기들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1978년 1월, 저자가 다니는 경인일보(당시 경기신문)에서는 신년 기획기사로 ‘고포(古鋪) 시리즈’를 연재한 바 있다. 그때 열한 곳의 고포가 소개되었는데, 30년 뒤인 2008년까지 살아남은 가게는 세 곳뿐이었다. 제2의 ‘고포 시리즈’라 할 만한 이 책에 소개된 열다섯 곳 가운데 다시 30년 뒤에도 살아남을 가게는 얼마나 될까?

전망은 밝지 않다. 이 책에는 지난 이야기는 넘치지만, 앞날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오랜 세월 가게를 지켜 온 할아버지 세대,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는 있지만, 뒤를 이어야 할 아들 세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소개된 가게 열다섯 곳 가운데 대를 이어 운영하는 데는 네 곳뿐이다. 그 말인즉 현재의 가게 주인들 대에서 가게의 명맥이 끊기기 쉽다는 것이다. 사정이 그리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일 테지만, 문제는 우리 생활사와 산업사의 소중한 조각들이 시나브로 소실되어 간다는 데 있다.

사회 변화에 따라 소멸해 가는 것들이 그 운명을 피하기는 어렵겠지만, 사회의 한 시절에 관한 그들의 기억마저 소멸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시대에 관한 작은, 하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기억들을 되살려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 책의 노력은 그래서 더욱 소중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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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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