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긴 겨울이 지나간다
[다른 삶과 다른 생각] "인자부터 농사지어야지"
    2015년 03월 18일 11: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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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겨울은 길다. 우스개 소리로 6개월이 겨울이고, 나머지 6개월 동안 봄과 여름, 가을이 있다고 한다.

시월 말이면 아궁이에 불을 때기 시작하고, 11월이면 집집마다 겨우내 필요한 땔감을 마련해야 한다. 처음 내려왔을 땐 뒷산에서 간벌하고 남은 나무를 지게로 겨우내 져다 날랐다. 한 3-4년 져다 나르니 지게로 질만한 나무는 사라지고, 이젠 속 편하게 돈 주고 화목을 산다.

기름값이 오르는 거에 따라 화목값도 오르고, 요샌 기름보일러 트는 게 나을지도 모를 만큼 나무값도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지리산 산골에선 겨울이 오기 전 켜켜이 쌓아올린 장작더미가 없으면 내심 불안하다. 올 겨울도 부지런히 나무를 자르고, 도끼질을 해서 쌓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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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날 땔감을 준비하고, 밭에서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을 하고, 집집마다 처마에 곶감이 매달리면, 지리산의 긴긴 겨울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어 번 눈이 내리고, 눈앞으로 펼쳐진 지리주능이 하얗게 눈 모자를 쓰고, 마을 앞으로 흘러가는 만수천의 강물이 잽히고, 굴뚝마다 옅푸른 연기가 피어오르고, 다섯 시만 되면 어둑 땅거미가 지는 겨울이면, 여기 지리산은 눈밭에서 복수초가 피어오르고 노란 산수유가 망울을 터뜨리는 봄을 기다리며, 하염없는 겨울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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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 골바람을 타고 눈발이 날리고, 귀때기가 얼얼하게 시린 겨울 어느 날, 온 동네가 시끄럽다. 꽹과리 소리가 앞서고 장구와 북소리가 어우러지고, 나발의 긴 저음이 뒤를 감싸는 흥겨운 풍물소리 위로 마을마다 이장님의 안내방송 멘트가 이어진다.

마을청년들이 겨우내 심심해하시는 어르신들을 위해 흥겨운 놀이마당을 마련했다는, 그래서 동네 초등학교 강당으로 모이시라는, 이왕이면 일찍 오셔서 준비한 떡국도 드시라는, 재미지게 노시고 가시는 길에 준비한 조그만 선물도 받아 가시라는 안내방송에 따라 노니 장독 깬다는 심정으로 초등학교 강당에 다들 옹기종기 모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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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시골에는 약장수들이 돌아 댕긴다. 요샌 약을 파는 게 아니라, 값비싼 건강보조제품, 건강식품, 옥 매트 등을 파는 소위 ‘떳다방’ ‘홍보관’이 생겨나서, 시골 어르신들에게 공연과 무료체험을 미끼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떳다방’이 기웃거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르신들이 그런 것에 현혹되지 마시고 또 춥다고 집에만 계시지 마시고 다함께 즐겁게 놀자고, 마을청년들이 이런 흥겨운 자리를 마련한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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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놀이단’, 이름도 거창하고, 내용은 더 거창하다. 다들 생업이 있는 마을청년들이지만 어르신들을 위해, 생업도 내팽겨 치고(?) 다들 한줌씩 힘들을 보탠다. 2주에 한번 씩 총 4회에 이르는 대규모 버라이어티쇼다. 판소리 춘향전도 있고, 어우동 한복을 입고 뽕짝도 부르고, 어정쩡한 마스크를 끼고 타이즈를 입고 어설픈 차력 쇼도 하고, 농사꾼으로 민박집 주인으로 식당 아줌마로 동네목수로 숨기고 있던 끼를 마구 발산하면서, 다들 함께 지리산의 겨울을 따땃하게 댑힌다.

2월이 되고, 설이 지나고, 아직은 겨울이지만 입춘도 되고, 우수도 지나면 찌뿌둥한 몸이 근질근질 되살아나고, 먹고 노는 농한기 한겨울을 저 멀리 밀어낼 채비를 한다. 각 마을마다 당산제를 지내고 올 한해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한다.

지리산에서 젤로 유명한 당산제는 뭐니뭐니해도 와운말 천년송 당산제일 게다. 뱀사골 계곡을 한참을 올라가면 골짜기 골짜기 그 깊은 곳에 구름도 누워간다는 부운말이 나오고, 마을 입구에 천년을 살아온 천연기념물 소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할매 소나무 할배 소나무, 그 아래서 매년 정월 초열흘이면 어김없이 당산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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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당산제가 있기 전, 음력 12월 15일 경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제관을 선정했다고 한다. 모든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뽑을 제관은 지난 일 년 동안 초상집이나 출산한 집을 다니지 않고 어린이가 없으며 집안에 사고가 없었던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한바탕 당산제가 마치고 나면, 마을사람이나 구경나온 외지사람이나 할 것 없이, 마을에서 준비한 잔치상 앞에 모여 앉는다. 한상 가득히 마을사람들의 인심이 차려져 나오고, 막걸리 한잔에 벌써 불콰해진 지리산의 봄이 마중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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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마다 당산제가 이어지면서 정월 대보름이 다가온다. 어떤 마을은 대보름날 당산제를 올리기도 한다. 며칠 전부터 온 마을을 떠들썩하게 지신밟기를 하면서, 마을마다 달집을 만들기 시작한다.

대보름날 저녁이면 장관이 펼쳐진다. 뉘엿 해가 지고, 저만치서 정월 대보름달이 덩실거리면 저 멀리 골안 마을에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고 점점 마을마다 훤한 달집들이 앞 다퉈 피어오른다. 마을마다 사람마다 올 한해 안녕을 빌고, 식구들의 건강을 빌고, 풍년을 기원한다. 올해는 뭘 빌까, 고민하다, 소원종이에 이렇게 써넣는다. ‘로또대박’, 진짜로 로또가 되면 어떡하지, 괜한 걱정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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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살 때는 정월대보름을 몰랐다. 그냥 보름달이 뜨는 날이겠거니 했다. 시골살이를 하면서 옛사람들이 설과 대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즐기는 연유를 알게 된다.

설날이 식구끼리의 피붙이의 명절이라면 대보름은 개방적이고 집단적인 마을공동체 명절이다. 농경사회가 주를 이루었던 우리네 선조들은 농사의 특성상 마을을 중심으로 뭉치고, 또 그렇게 농사를 지었기에, “설은 나가서 쇠어도 보름은 집에서 쇠어야 한다”고 했다.

설날부터 시작된 잔치는 정월 대보름 달집을 태우면서 보름간 이어진다. 달집 앞에선 어른들의 술추렴이 거나해지고, 저만치 논둑과 밭둑엔 아이들의 쥐불놀이가 펼쳐진다. 어느 마을에선 풍등도 띄우나 보다. 한바탕 떠들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머리꼭지 뒤에 떠 있던 보름달이 이렇게 말한다.

“마이 놀았다 아이가, 인자부터 농사지어야지.”

필자소개
지리산에서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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