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의 모색,
    '영혼 상실 사회'와 맞서는 것
        2015년 03월 13일 04: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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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지금 잠깐 동안 서울에 와 있는데, 서울에 오면서 비행기 기내에서 좀 재미있는 영화를 봤습니다. “소울리스”라는 2012년의 러시아산 영화인데, 그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꼭 러시아에만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약간 다른 형태긴 하지만, 한국에도 적용될 만하죠.

    “소울리스”는 문자 그대로 “영혼 없는 이들”입니다. 러시아 문화권이라면 “영혼”이 들어 있는 타이틀은 벌써 많은 이들에게 고골의 고전적 소설 “죽은 영혼들”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소울리스

    영화 ‘소울리스’ 표지

    그런데 여기에서는 바로 “차이”가 감지됩니다. 영혼이 죽었다면 (고골이 본 말기의 농노제 러시아는 “죽은 영혼들의 나라”이었죠) 그 영혼은 애당초에 있기라도 한 거죠? 그런데 여기에서는 영혼이 아예 없다는 것이 처음부터 전제됩니다. 주인공들에게 영혼이 없다기보다는, 그들이 놓여진 “환경”은 영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주인공 “막스”는 거대한 은행의 중간간부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전체 인구 5-10%밖에 안되는 신흥 중산층의 상부에 속하는 인물이고, 서구 이상의 부와 안락을 누릴 수 있는 빈국의 “행운아”입니다.

    문제는 “백만장자의 천국”과 같은 자극적인(?) 이름의 최고 엘리트를 위한 주말농장을 마련하려는 그 은행은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대기업”이지만, 안에서 보면 정말 영혼을 갖고 살 수 없는 “전장”입니다. 여비서에 대한 성추행이나 간부들의 폭언 등부터 간부들 사이의 암투, 끝없는 권모술수까지 복마전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그런 암투의 결과로 주인공은 해고되기도 합니다. 그가 추진했던 “백만장자의 천국”은 알고 보니 스탈린시대 화학무기 폐기물이 매장된 발암물질이 많아 개발이 불가능한, 사람을 죽이는 곳에 세워졌어야 됐다는 거죠.

    참, 이런 장면들을 보다 보면, 신흥자본국(“백만장자의 천국”)으로서의 러시아 자체는 과연 사람을 잡는 발암물질 투성이의 “죽음의 장소”로 그려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죠.

    복마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인공은 알콜부터 난교 파티와 마약까지, 별의별 짓거리를 다 해봅니다. 물론 그러다 보니 더더욱 더 황폐화될 뿐이지만요.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 주변을 한 번 바라보죠. 문화적으로는 아직도 보수적인 탈유교 국가 대한민국에서는 마약이나 난교 파티는 강남에서조차도 그렇게 흔한 게 아닐 것입니다.그렇다고 해서 러시아만큼이나 그 이상의 복마전 같은 직장을 살아야 하는 한국의 샐러리맨들은 과연 그 소외와 인간성 상실을 그 어떤 “중독” 없이는 참아낼 수 있는가요?

    술에 중독되는 상습 주정뱅이들도 적지 않지만, 사실 그들이 쓰는 “아편”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마음 단련”을 할 수도 있고, 또 유사 성행위를 전문으로 하는 업소에 정기적으로 들려 전장 같은, 관과 같기도 한 직장을 거기에서라도 잊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뭘 하나 본질은 똑같습니다.

    중독적이며 무의미한 소비의 난무속에서만 이미 아무 의미도 발견하기 어려운 생산현장의 잔혹성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죠. 자기로부터의 도피를 매일매일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곳이야말로 “소울리스”, 영혼이 허용되지 않는 곳입니다.

    이 영화가 근거로 하는 2006년의 작가 미나예프의 (같은 제목의) 소설의 내용은 대체로 여기까지입니다. 무영혼의 자본의 세계 속에서 완전한 산 시체가 된 주인공은, 결국 소련 시대의 자신의 아동 시절로 자기를 다시 돌려줄 “주술적 꽃”을 찾으러 나서고 ‘율리야”라는 비교적 때가 덜 묻은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인간성 회복의 길에 나섭니다.

    한데, 세계공황의 도래와 커다란 반자본주의적 시위 등, 그 뒤의 역사적 경험까지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전개 논리는 조금 다릅니다. 영화 주인공이 만난 “율리야”는 단순히 “착한 여인”이 아니며 지하에서 급진적 활동을 하는 여대생입니다. 말하자면 “운동권 여학생”이죠.

    결국 “운동권 서클”과 함께 말기암 아동 환자를 위한 연극활동부터 각종의 기습공격까지 같이 하게 된 주인공은 “인간으로의 회복”, 영혼으로의 복원의 코스를 거치게 됩니다. 끝에 가서는 화염병이 난무하는 격렬한 가투의 현장에서 그가 그 애인이 진압봉 세례를 당하는 것을 보고서 일종의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맡게 됩니다.

    하늘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여태까지의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은 그는 잡혀간 “율리야”를 구출하러 경찰서에 갑니다. 그를 기다리는 “새 인생”을, 영화는 그다음에 물론 다루지 않습니다. “지하 혁명 셔클”의 활동에 주안점을 두는 영화라면 요즘 같은 러시아에서는 상영허가를 쉽게 받지도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포인트는 “영혼으로의 회귀”는 금지된 영역, 즉 “지하”에서만 가능하다는 영화의 논리입니다. 러시아에서도 한국에서도 의회 진출하거나 그런 진출을 노리는 “합법적 좌파 정당”들은 다 있지만, 그들이 “영혼 없는 삶”의 대척점에 서기에는 역부족인 모양입니다.

    “합법적 좌파 활동”은 사회에 기여하는 점들도 많지만, 꼭 영혼 없는 세계와의 어떤 급진적 단절, 그리고 그 단절을 이루기 위한 자기 희생이나 위험부담 담지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압봉에 맞아 불구자가 될 각오로 사는 삶, 즉 고통을 감수하는 삶은 이 영화에서는 “영혼”과 직결됩니다.

    이 논리 자체는 인류 문화의 어떤 “원류”와 연결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나 기독교의 “수행”의 의미를 되돌아보면, 결국 “타자를 위해 세상의 불가피한 고통을 대신 받는” 것으로 수행의 대타적 의미가 집약됩니다.

    종교적 “영혼의 부활”과 이 영화가 다루는 급진파적 “영혼 부활”은 물론 사회, 역사적 맥락이야 서로 다르지만, 하나는 확실합니다. 좌파라는 것은 인류 문화의 아주 깊은, 대단히 오래된 어떤 전통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영혼이 없는 후기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율리야”와 같은 “전문 데모꾼”들이야말로 인간 영혼의 마지막 저항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인간 문화의 지구력은 놀랍습니다. 아무리 스탈린화된 혁명의 실패를 딛고 자본주의 세계로 다시 회귀했다 해도, 지금도 러시아 문화 일각에서는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고리키의 <어머니>처럼 “인간성의 회복”은 타락된 주류를 벗어나는 일과 혁명가로 자기 개조하는 일 등과 연결됩니다. 지금도 20세기 초반처럼 “영혼”과 “혁명”은 직결된 모습으로 나오고요. 확실히 인류 문화가 버티고 있는 이상, 혁명의 모색은 계속 지속될 모양입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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