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보야, 문제는 노동이야!
    [말글 칼럼]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
        2012년 07월 12일 11: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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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각한 토론 중에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듭니다.

    “밥 먹고 합시다,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이 발언만큼 모두의 공감을 얻는 말도 드물 겁니다. 짓눌렸던 공기가 어느새 풀리고 다들 입가에 미소를 흘리면서 슬슬 배를 쓰다듬습니다.

    그런데 전 이상하게 이 말이 거북합니다. 이런 말 들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정말 내가 이 일을 먹고살려고 하는 건가?’

    그림 출처= 노동건강연대

    이 말은 어떤 때는 맞지만, 언제나 맞는 말은 아니라 봅니다. 지금 저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레디앙은 원고료 한 푼 안 줍니다. 그러면 이 글쓰기는 뭐죠? 분명 먹고살려고 하는 짓이 아니거든요.

    문제는 이처럼 맞지 않는 때조차 이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자칫 우리 하는 모든 일이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돼버리지 않으냐 말이죠. 먹고살기가 유일한 목적이 된다는 겁니다.

    주요 대선 후보들 공약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무슨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죄 먹고사는 데만 매달린다냐? 모두가 매달리니까 이게 주요 공약이 된 건지, 아니면 주요 공약으로 만들어서 모두를 먹고사는 데 매달리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노동이 신성하다?

    흔히들 노동은 신성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는 참말 이상합니다. 아니, 그 신성한 노동에서 해방되자는 게 말이나 됩니까, 어디?

    왜 일하는데? 물으면 십중팔구 ‘먹고살려고’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노동이 신성한 게 아니라, 그 노동으로 버는 돈이 신성한 것 아닌가요?

    이제 노동은 한마디로 ‘밥벌이’ 또는 ‘돈벌이’ 수단이 됩니다. 노동해방을 외치는 것은 돈벌이 수단밖에 안 되는 노동에서 벗어나 가급적 노동을 덜하고 좀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것이고요.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어떤 일도 즐거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부단히 반복되는 일정표, 일상의 규칙적인 반복, 단조롭기 짝이 없는 작업과정, 이렇게 평생 살아야 한다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노동의 기원을 살피노라면 꼭 들게 되는 게 구약성경 <창세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노동하지 않고도 잘 살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바람에 쫓겨나지요. 그때 신이 그들에게 내린 형벌, 기억나시죠?

    남자인 아담에게는 평생 가혹한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형벌을 내립니다. 여자 이브에게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아이를 낳는 형벌을 내렸고요. 이대로라면 노동과 출산은 말 그대로 형벌입니다. 그런데 어느 샌가 이 둘 다 신성한 것으로 둔갑해버립니다. 가만 놔두면 아무도 안 할 것 같으니까, 누가 그렇게 꾸민 건 아닐까요?

    노동의 프랑스말인 ‘travail’은 라틴어 ‘tripalium’에서 따왔다는데, 이것은 ‘고문도구’의 일종입니다. 훨씬 잘 와 닿지요?

    “오늘날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그 노동이 가장 훌륭한 경찰 기능을 하고, 각자를 속박하며 이성과 욕망과 독립심의 발달을 강력하고 능숙하게 구속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노동은 엄청난 양의 정신력을 소비시켜, 그 정신력을 성찰, 명상, 몽상, 관심, 애정과 증오에서 벗어나게 한다.”(니체, ≪아침놀≫에서)

    ‘노동이 가장 훌륭한 경찰’이라는 말은, 노동에 얽매인 이상 스스로 자기 통제를 잘 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알아서 긴다는 거죠. 그렇게 사노라면 이윽고 생각하기를 그만두게 되니 이보다 더 효율적인 경찰이 어디 있을까요.

     ‘저녁이 있는 삶’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는 ‘노동labour’과 ‘일work’을 구별합니다. ‘노동’은 ‘세계와 자신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는 있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일’은 다릅니다. 그것은 ‘먹고사는 것을 넘어선 창조 작업’입니다. 세계와 나는 노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을 통해서만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밥벌이를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밥벌이에만 매달리는 한, 그는 창조적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의 영역은 …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만 시작된다. 그래서 그 영역은 물질 생산의 저편에 위치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한 말입니다. 이거야말로 좌파가 꿈꿔야 할 이상향인 거죠.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은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닌 일, 화폐가치 아닌 가치를 추구하는 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가급적이면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손학규 후보의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가 정말 와 닿습니다. 이 좋은 구호를 좌파가 붙들지 못한 것이, 붙들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건 일종의 ‘노동해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짧은 구호는 아주 많은 것을 함축하지요. 무엇보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일자리를 나누어야 노동시간도 단축되겠지요. 자연히 비정규직에 대한 부당한 대우도 없애야겠지요. 교육이나 의료, 주택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평생 가혹한 노동에 얽매이게 하는 원인이니까요.

    아깝긴 해도 이런 구호가 대선 후보의 슬로건으로 나온 것이 반갑습니다. 문제는 바로 노동이었던 것입니다. 최소한의 노동, 최대한의 자유! 이 둘은 맞물리는 사이인 것입니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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