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에 깃들다
    [다른 삶과 다른 생각] 10년 이야기를 시작하며
        2015년 02월 26일 09: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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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도시 대구에서 살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간 이의 10년 삶을 오늘부터 연재할 예정이다. 과거의 10년이 아니라 자연과 산과 더불어 계속 살아갈 필자의 미래의 이야기이고, 또 다른 누군가의 미래이기도 할 것이다. 그 삶에서 도시의 우리들 삶도 돌아보고 살펴볼 것들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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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10년이면 대통령의 이름이 세 번이나 바뀌고, 풍월을 읊던 서당개도 대학을 졸업할 시간이다. 그냥 65리터 배낭에 이것저것 쑤셔 넣고 무작정 내려왔다. 낯선 산골에서 낯선 버스를 타고, 처음 걷는 산골마을을 걸어올라 20년 만에 만나는 고등학교 선배 집에 도착했다.

    밤이 되면 온 천지가 깜깜해지고, 밤하늘엔 예상치 못한 별들이 낱낱이 밝았다. 귀농이고, 농사고 뭐고 다 생각도 없이, 그냥 도시를 떠나 지리산에서 살고 싶었기에 시작한 새로운 삶이었다.

    1년 동안 집 지을 땅을 물색하러 다니고, 틈틈이 지리산도 오르고, 선배의 염색일도 돕고, 자투리 땅에 농사 비스무리한 것도 짓고, 그러면서 어느새 지리산에서의 생활에 젖어들었다.

    처음엔, ‘생태적인’ 것에 꽂혔다.

    그래서 집도, 생활형태도, 농사도 ‘생태적인’ 것처럼 했다. 나무와 흙으로만 집을 지어야 했고, 생태 화장실과 생태 정화조도 만들어야 했고, 인터넷도 없이 살았다.

    10년.

    산속 외딴 오두막집이었던 우리 집이 귀농 주택단지에 둘러싸이고, 뒷마당 닭장엔 알 까고 나온 놈들이 또 알을 까고 몇 대가 지났는지 헷갈리는 닭들이 매일 아침 일용할 닭알을 낳아 주시고, 창고엔 갖가지 농기구와 목수 장비들이 빼곡하고, 2500원에 장에서 사온 감나무에서 딴 감은 곶감으로 변해 처마에 매달려있고, 두 뼘 남짓했던 사과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 석류나무, 복숭아나무는 내 키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농사라곤 학교 다닐 때 농활 가서 피 좀 뽑고, 콩밭 좀 메고, 뭐 그런 게 전부인데, 이젠 내가 먹을 것은 내가 키워 거둬들이고, 남는 것은 나눠먹고 또 팔아서 돈을 만들기도 한다.

    신강1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흙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지은 산속 오두막집

    지리산에 내려와 처음엔 집짓기를 했다.

    흙집을 짓는 후배들과 품앗이로 서로서로 집을 지어 주었다. 그러다 이웃 동네에서, 좀 더 먼 동네에서 집을 좀 지어달라고 부탁이 들어오고, 가평, 양평, 봉화, 영암, 고흥, 장수에도 집을 지으러 다녔다. 아마 스무 채는 지었을 게다.

    지붕에서 망치질 하다 엄지손톱을 내리 친 적도, 내일이 상량인데 흙벽이 통째로 무너진 적도, 구들장이 꺼져 다시 손보다가 구들장 밑에서 망치를 발견한 적도, 흙벽이 밤새 얼어붙어 다시 쌓기도, 우여곡절 끝에 그래도 흙집이든, 귀틀집이든, 한옥이든, 심지어 벽돌집이든 벽 있고 지붕 있는 집은 얼추 흉내라도 내면서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귀농하면, 자기 손으로 자기 집을 짓는 게, 귀농인의 로망이다.

    집을 지으면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지어 주는 게 아니고 같이 짓는 겁니다. 하지만, 처음 집을 짓는 사람들의 눈빛은 언제나 흥분과 왠지 모를 불안감에 흔들렸고, 그런 사람과 한 달 정도 같이 집을 짓다보면, 흔들리던 눈빛은 힘듦과 안도감의 눈빛으로 변하게 된다.

    그럴 때쯤이면, 상량도 마치고 지붕작업도 끝나고, 나도 슬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높아만 간다. 시간이 지나 한 번씩 찾아가면, 고맙다는 웃음과 자기 손으로 집을 지었다는 뿌듯함이 묻어나는 눈매 선한 농사꾼이 되어있다.

    10년.

    10년의 반을 집짓기를 하다, 문득 집짓기가 심드렁해진다. 집을 떠나는 것도 싫고, 집짓기 좋은 때가 늘 농사짓기 좋은 때와 놀기 좋은 때와 겹치는 것도 싫고, 그래서 실실 동네 창고나 짓고, 이웃 집 수리할 때 놀 겸 도울 겸 하는 정도에서 만족하며 지낸다. 그러면서 고사리 밭도 구하고, 쌀농사 지을 논도 소작으로 구하고, 목수 코스프레에서 농민 코스프레로 변신한다.

    쌀농사는 장비가 일의 반을 한다고, 그렇다고 트랙터와 이앙기와 콤바인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매번 돈을 주고 일을 시키면, 추수하고 돌아서면 남는 게 없다. 대한민국의 농사 실정이 그렇다.

    동네 소농끼리 트랙터와 이앙기 등 필요한 장비를 공동으로 구입하고, 공동으로 사용한다. 화학비료와 제초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유박퇴비와 제초제 대신으로 우렁이농법을 한다. 암만해도 관행농보다는 소출이 떨어진다. 우렁이가 제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오뉴월 땡볕에 논에 들어가 피와 온갖 풀들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

    신강2

    봄볕에 하루만 말리면, 소고기 맛도 능가한다는 지리산 참고사리

    이맘때쯤이면 고사리밭에 거름을 뿌려줘야 한다. 4월이 되면 땅속 깊은 고사리 뿌리에서 애기손 같은 고사리가 올라온다. 동네 할머니들은 이른 새벽이면 끊으러가지만, 게으런 농부는 아침 먹고 느지막이 고사리 밭에 당도하고, 한 짐 고사리를 끊고 내려가시는 할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지청구를 놓는다.

    매번 하시는 인사말이라 생각하고 나도 거저 웃으면서 에고 힘들어요 하며 댓거리를 한다. 끊어 온 고사리는 집에서 바로 삶아 말린다. 10분의 1로 줄어든 잘 말린 고사리는 봄철 돈이 궁할 때 요긴하게 쓰이는 환금작물이다.

    비록 농민 코스프레를 하는 중이지만, 농사로 돈을 벌어 먹고 살기에 농민회에도 가입한다. 죽창 들고 여의도로 한번 가야할 듯하다.

    10년.

    여름이면 깜장 고무신을 신고, 겨울이면 털신을 신고, 어쩌다 한 번씩 대처에 나갈라치면 갓 상경한 서울역 앞 촌놈 꼴로 변했다. 그 10년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다르게 세상을 보고 조금 다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조금 다른 사람들의 삶을 공감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필자소개
    지리산에서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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