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의 피해자 그리고 지식인
    고통의 망각과 외면은 가해집단에 대한 면죄부 부여
        2015년 02월 23일 09: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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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박유하 교수(세종대)의 <제국의 위안부> 문제로 세상이 다시 시끄러워졌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일부 문장/단락들을 삭제해야 한다는 법적 판단이 나오고, 삭제 거부에 따라 책의 차후 유통이 법적 제재를 받고…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까지 인터넷 시대에 무슨 검열제 부활이냐고 오히려 이 책의 저자를 피해자로 보는 모양이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인터넷 시대에는 그런 판결은 진짜 피해자, 즉 할머니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책 일어판의 판매고를 높이는 효과 이상의 노릇을 하지 않을 셈입니다.

    인접 국가에서 애써 ‘반일’을 찾아내고, 인접 국가들의 ‘반일’ 만큼이나 전전 시대 회귀적인 민족주의 열기를 불태우는 일본의 우익이나 그 보수적 주류로서는 이런 판결들은 하늘로부터의 선물 격입니다.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지일파 작가가 무식한 대륙국가에서 박해 받는다”는 이미지 만들기에 제격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부분들과 무관하게, 저는 이 책을 사유할 때에 한 가지 기본적 물음이 나옵니다. ‘주장’의 구체적 내용들과 무관하게, ‘이 책과 같은 방식으로 현재성이 있는 약자의 고통을 말한다는 것 자체는 과연 지식인으로서 적절한가’라는 부분입니다.

    이 세상을 산다는 것 자체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우리로서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먼” 고통에 동감하고 의분을 느끼고 자비심을 발휘한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고통은 그냥 스쳐지나가고 망각됩니다. 임진왜란에 정말 무고한 생명들이 무수히 희생됐지만, 과연 지금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고 이야기하면 무슨 특별한 감정이 느껴집니까? 반 천 년의 시간 속에서는 그 당시의 고통과 절망이 녹아버리고 말았죠.

    마찬가지로, 최근 보도에 의하면 독일의 첩보기관들은 동부 우크라이나 내전의 희생자 수를 이미 약 5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도네츠크나 루간스크에서 사람들은 매일매일 포격으로 고통스럽게 죽어나갑니다. 그런데 그 이름도 모를 도네츠크의 고통을, 솔직히 대한민국에서 누가 특별히 “생각해주기”라도 합니까?

    “우리” 안에서도 세월호 투쟁 때문에 경기가 나빠진다고 유가족들의 현수막을 뜯어버리는 상인들은 오늘날 한국인의 “평균”에 가까운데, 이런 곳에서는 머나먼 도네츠크까지는…어림도 없죠.

    결국 인간의 타자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시-공간적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고, 또 자본주의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둔화되고 무뎌지고 와해됩니다. 원자화된 사회에서는 타인을 직시한다는 것 자체는 이미 너무나 비범한 일이 되는 거죠.

    문제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 우리가 다 대응하지 못해도, 적어도 우리로서 현재성이 있는 고통의 경우에는 대응의 실패는 결국 그 고통의 현재적 연속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인들 대다수는 사실상 거의 외면하지만, 동아시아로서 현재성이 아주 강한 문제입니다.

    위안소

    일본군 위안소 관련 방송화면

    일본의 주류가 <제국의 위안부>에 열광하는 이유도 사실, 군대를 가진 “보통국가”가 되려는 판에 전전 일본 “황군”의 적당한 명예회복이 중요한데 “위안소 운영 문제는 업자 때문이고 황군과 위안부는 동지”라면 그 명예회복에 엄청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이 망각되고 외면되는 순간, 또 다른 타자들에게 새로운 고통을 줄 또 가해집단이 정당성을 득하여 다시 활개를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위안부 문제는 그 현재성이 지극합니다. 황군의 후예라고 할 한국군이 한국전쟁 때도 일제의 모범(?)대로 위안소를 운영했는데, 그 피해 규모에 대한 조사조차도 아직 제대로 안 돼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을 피해자들에 대한 배/보상과 사과는? 그런 말들도 잘 안 들립니다. 사회주의적 활동을 전개하는 여맹의 간부를 납치, 감금하여 “위안부”로서 성폭행한 한국군이라는 가해집단은 (관련 기사 링크) 그 당시의 가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이상 각종 병영 내 성폭력 피해가 계속 일어날 것도 안 봐도 뻔한 일입니다.

    한국군의 베트남에서의 각종 성범죄 등 베트남인에 대한 가혹행위는, 지금도 한국 국내에서의 베트남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구타와 살해로 이어집니다. 타자에게 준 고통에 대한 무감각은, 결국 새로운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이런 차원에서 볼 때에 사회의 문제 전반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서 객관화해야 한다는 “지식인”이라면, 과거의 타자 고통을 이야기할 때에 당위적으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의 상황 개선과 존엄성 회복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피해자의 권리 주장을 지지,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이 호의호식하고, 기계적인 단순 노동을 사회적으로 면제 받고 거기에다가 명망성까지 갖는 합리적인 이유라고 있다면, 결국 사회에서 고통의 고리를 끊는 데에 대한 그의 계몽적 역할에 대한 기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제국의 위안부>는 “지식인으로서 쓰면 안 되는 글”의 표본에 가깝다는 것은 제 독후감의 핵심이었습니다. 조선인 등 인신매매업자의 잘못과 황군의 “책임의 한계”에 주안점을 두고 딱 그 테제에 필요한 증언만을 선별적으로 뽑은 그 책에서는, 피해자의 눈물도, 그 눈물에 대한 저자의 그 어떤 자비의 마음도, 군대 성폭력 피해자의 눈물을 사회가 언젠가 닦아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군대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황군의 논리로 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지식인”이 고통의 주체들에게 연대를 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해결”해서 두 국가의 “관계”를 “개선”시켜야 할 “문제”로 본다면…차라리 “지식인” 없는 세상이 더 편할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피해자에 대한 책임의식이 결여된 “지식인”이란, 결국 가진 자들의 지능적인 인간병기에 불과합니다.

    사실 이 사태를 보면서 우리가 뭔가를 배우고 뭔가를 가르치는, 글을 쓰면서 사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울 기회를 얻는 것 같습니다. 단, 이 사태를 바라보는 국내 식자들의 사회는 과연 구 누구도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책임도 없는 포스트 시대, 반동과 反계몽 시대의 주류에 반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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