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소년 노동, 내 주위를 돌아보라
    [서평] 청소년 노동자 목소리 경청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2015년 02월 02일 03: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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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 겨울

    우편 포장을 벗기고 <십 대 밑바닥 노동>이란 제목의 책을 꺼내든 이후, 나의 기억은 자꾸만 이십여 년 전 어느 겨울로 거슬러 올라갔다.

    1996년 말, 그러니까 IMF가 터지기 일 년 전 어느 날이었다. 고등학교 연극반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향에 내려오면 자기 집에 한 번 들르라는 것이었다.

    타지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연말을 맞아 고향에 내려간 김에 후배에게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우리 집에서 시내버스로 30분 가량 떨어진 조용한 주택가 2층이 후배의 집이었다.

    갖가지 과일향이 나는 음료 한 박스를 사들고 들어간 집은 어두컴컴하고 적막했다. 당시 고3이던 후배와 중3이던 동생, 두 자매만이 형광등도 켜지 않은 채 집을 지키고 있었다.

    후배는 담담하게 요 몇 달 사이에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설명했다. 회사 부도 이후 아버지는 빚쟁이들을 피해 객지로 도망 다니고 있어 거취를 알 수 없고, 어머니는 신경쇠약으로 손아래 이모네로 옮기셨다고 했다. 이모네도 그리 넉넉지 않아 자매는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후배는 빚쟁이들이 올까봐 밤에도 불을 꺼놓는다고 했다. 아버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면서 술 마시고 뻗어 자는 이상한 아저씨들도 있다며, 후배는 웃었다.

    스물한 살 철부지 대학생이었던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노을빛이 들이치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내 삶에는 그 때까지 후배와 같은 경제적 고통이 없었다. 후배의 삶에 끼어든 불행이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현실이었다.

    음료를 하나씩 나눠 마시고 한참을 얘기한 후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서야, 후배는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서울에서 대입 실기시험을 치르고 싶으니, 그 기간 동안 내 자취방에서 생활하게 해달라는 거였다.

    나는 흔쾌히 응했다.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두 자매를 어두컴컴한 집에 남겨두고 시멘트로 된 층계참을 내려오는데 오들오들 몸이 떨렸다. 겨울바람 때문이겠거니, 했다.

    그 해 겨울, 후배는 대입 시험에 낙방했다. 세 군데나 응시했는데 모두 다 떨어졌다. 후배는 예상했던 결과라고 했다. 변변한 학원 한 번 못 다녀보고 치른 실기시험 아닌가. 그래도 선배 덕에 시험이라도 치를 수 있어서 행복했다며, 후배는 또 웃었다.

    그 길로 후배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후배는 동생이 자꾸만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한다면서, 돈 벌어서 공부 잘 하는 동생 대학 보내주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다.

    후배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8~9년 쯤 지난 어느 주말이었다. 당시 나는 딸아이를 낳고 직장에 다니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후배는 딸아이 내복을 사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골프장 캐디가 되어 있었다. 객지를 전전하던 아버지는 몸이 상해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어머니의 신경쇠약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아 이모가 고생이라 했다.

    후배의 공부 잘 하던 동생은 빨리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다가 ‘선생님’ 소리가 듣고 싶어서 간호조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간호조무사가 되면 그래도 환자들한테는 ‘선생님’ 소리 듣는다며, 후배는 여전히 웃었다.

    그 당시 후배의 소원은 동생과 함께 작은 방을 구해 사는 거였다. 골프장 라커룸에서 자려니 가끔 청소 아줌마의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그 날도 라커룸을 소독하는 바람에 하룻밤 잘 곳이 필요해 내게 온 거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십대밑바닥노동

    알바 괴담

    내게 청소년 노동은 낯설다. 청소년기에 노동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후배의 이야기를 꺼낸 건 그 때문이다. 청소년 노동은 내게 간접 경험의 영역이다.

    예전에 어머니가 여중을 중퇴하고 미싱 공장에 다닌 얘기를 했을 때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미싱을 돌려 바지를 만들었다고 했는지 천막을 만들었다고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머니 눈에 잠깐 눈물이 비쳤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참 무심하고 이기적인 시절이었다.

    그러던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얼마 전 초등학교 5학년인 딸아이가 ‘나는 고기집에서는 절대 알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부터였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고기인데 남들 먹는 거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니 고기 집이 아닌 편의점이나 예식장에서 알바를 하겠다는 거였다.

    뜬금없는 딸아이의 말 한 마디에 후배의 이야기가, 어머니의 이야기가, 내 삶 속으로 훅 스며들었다. 나는 그제야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느 순간엔가 배달 오토바이는 청소년들의 차지가 됐고, 음식점에 들어가면 딸아이보다 고작 3~4살 정도 많아 보이는 청소년들이 서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십 대 밑바닥 노동>을 만났다. <십 대 밑바닥 노동>의 필진들은 오토바이 배달을 하는 경수와 편의점 알바를 비롯해 다양한 노동사를 겪은 건진이, 그리고 콜센터 알바를 거쳐 성인으로 신분 위장을 하기에 이른 서정이의 이야기를 통해 청소년 노동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기초생활수급가정의 생계비를 벌기 위해, 누군가는 집을 나와 부모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누군가는 갖고 싶은 물건을 제 힘으로 사기 위해 노동 세계에 뛰어들지만 이들 모두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못해 잔혹하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는 경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고가 나서 손의 힘줄이 7개가 나갔어요. 그래서 주먹이 안 쥐어져요. 사고가 나면 후유증이 생기잖아요. 좀 무섭고 그렇죠. 그런데 청소년 아르바이트 중에 배달만큼 많이 버는 게 없더라고요. 콜맨 일이 위험하긴 한데 그만큼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p.170)

    경수처럼 사고의 위험을 항상 달고 다니는 알바 청소년들이 많다보니 인터넷 상에는 ‘알바 괴담’이 떠돌 정도이다. 청소년 노동에 대한 공포는 비단 신체적 위협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토바이

    경수는 치킨 가게에서의 배달 일을 그만두고 ‘콜맨’이라는 배달 대행 일을 시작하면서 치킨 가게 ‘노동자’에서 콜맨의 ‘특수고용직’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배달 대행 일은) 퀵서비스 배달 노동자와 유사하게 ‘근로자성’이 부인되는 것이다. 보수는 배달 건당 수수료로 책정돼 있었고, 오토바이는 자신이 마련하거나 콜 업체에서 대여를 해야 했으며 오토바이를 운행하기 위한 기름도 본인의 비용으로 사야 했다. 보수가 건당 수수료로 책정되면서 배달 건수를 높이기 위한 교통 신호 위반과 과속 운행은 필수처럼 되어 버렸고 그만큼 사고의 위험성도 높아지게 됐지만 배달 중 사고가 나면 그로 인한 모든 책임과 비용은 경수가 부담해야 했다. 고용과 수입은 불안정해졌고 비용과 사고에 대한 책임은 더 커진 셈이었다. (p.169)

    서정이가 일했던 콜센터도 ‘특수고용직’이긴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어린 나이에 학교 대신 일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청소년들이 ‘근로자성’이 부인돼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 하고 사고의 위험도 스스로 부담해야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15~20세 노동자 중 52.9%가 최저임금 미만의 보수를 받고 있다니.

    <십 대 밑바닥 노동>은 바로 우리 옆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알바에 대한 공포는 신체적 위협에서 경제적 위협에 이르는, 청소년 삶의 전 영역으로 뿌리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사회로의 이행이 공포가 되지 않길

    청소년 노동은 학교에서 사회로 이행하는 첫 단계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사회로의 이행은 곧 노동함을 의미한다.

    청소년 노동의 열악한 현실은 청소년들에게 노동에 대한 부정적 경험과 인식을 심어줄 가능성이 높다. 무방비 상태에서 노동세계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그리고 성인이 되면 언젠가 노동으로 삶을 영위해야하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교육이 노동을 포용해야 하지 않을까.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 불리던 시절에 학교를 다닌 내게, 딸아이의 학교 풍경은 생경했다. 운동회에선 휠체어를 탄 아이와 함께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키가 1미터도 되지 않는 소인증 친구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 함께 등교하는 모습은 내가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일상이었다.

    어려서부터 장애인 친구들과 자연스레 어울려보지 못한 나는 부끄럽게도 아직까지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보면 고개가 저절로 돌아간다. 뭔가 도와줘야할 일이 생길까봐서이다. 그들이 지하철에서도, 버스정류장에서도 자신들의 일을 알아서 척척 해낸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중에 자꾸만 그런 행동을 반복한다.

    하지만 딸아이는 나와 다르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도, 도와줘야한다는 강박을 가지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사실 노동은 ‘저항’과 ‘이념’이라는 사슬에 묶여 오랜 기간 암묵적 금기 상태에 놓여있었다. 나는 교육이 금기가 일상으로 자리바꿈하는 토대가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최적의 비유는 아니겠지만, 휠체어를 타거나 키가 작은 친구들을 장애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저 나와 다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딸아이 세대를 바라보며 기초 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노동문제도 마찬가지다. 기초 교육에서 노동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룰 때만이 청소년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주저하거나, 고용주가 자신의 의무를 교묘하게 비껴나가거나, 노동자가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르는 데 거리끼는 일 없이 노동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사회 전체가 노동문제 해결을 위해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초등학교 때부터 노동교육을 하는 유럽의 나라들과 같아지긴 힘들 수도 있다. 초등학생들이 휠체어를 탄 친구와 100미터 달리기를 함께 하기까지는 학부모와 교육계, 인권운동계의 다각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 청소년 노동문제 역시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다.

    시급하게는 청소년들을 고용하는 사업주와 이들을 관리 감독하는 노동청, 그리고 청소년의 노동을 통해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는 어른들이 총체적인 반성을 통해 작금의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장기적으로는 노동 교육을 정규 교과 과정에 편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십 대 밑바닥 노동>은 이 모든 노력들이 청소년 노동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알려준다.

    필자소개
    기획자 겸 작가로 연극과 영화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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