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했다가 만났다가,
    시의회 의장 후보들의 구애
    [복기, 의정활동 4년-2] 부르주아 정치판(?)의 차 없는 의원
        2015년 01월 30일 10: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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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민의 의정활동 복기-1 링크

    불참 통보에 역정을 낸 구미상의 관계자

    나는 행사장을 다니면 다닐수록 ‘이러려고 정치에 투신했느냐’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인터불고 호텔에서 코스요리를 두고 아쉽게 돌아서기는 했으나 ‘의원님, 의원님’ 하는 대접부터 붉은 카펫, 박수 소리, 외교적 언사들이 모두 마뜩치 않았다.

    아,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 정치’인가. “정치인들이 회의와 연구에 매진하거나 낮은 자세로 주민을 만나지 않고 행사장에서 얼굴이나 비치고 간다”는, 의원이 되기 전 들었던 불만이 내 귀로 덮쳐왔다. 나는 행사장 참석을 가려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참석을 거절한 첫 행사가 구미상공회의소의 시의원 당선자 초청 행사였다. 구미상의는 보수적이고 반-노동자적인 성향이 농후해 보였다. 민주노동당 소속 김성현 당선자는 내게 “나는 가지 않겠다. 김 당선자는 그래도 한번 가보라”고 말했다. 김 당선자야 지역에서 오래 노동운동을 하며 상의와는 대립각을 세웠던 입장이었고, 나는 그런 구원이 없으니 일단은 가볼 만하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러나 반대로 생각했다. 당시 나를 대하던 보수 세력의 분위기로 추측컨대 상의는 나를 노동자·서민의 대표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대표자로서의 위상이 서면 그들도 내게 무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고 나도 더욱 당당히 그들을 만날 수 있겠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 나중에 내가 민주노조와의 연대 활동이나 노동 정책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나서는 상의 행사에 가보는 것을 고려해보기도 했다. 번번이 일정이 맞지 않았고 나도 적극적으로 참석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끝내 그리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불참 통보에 상의 관계자는 역정을 냈다. 다짜고짜 꺼내는 말이 “제도권에 들어왔으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이들이 나를 시험 대상으로 보고 있구나.’ 분노가 치밀며 거절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관계자는 그 뒤 여기저기 “김수민 의원이 이렇게 우릴 빨리 실망시킬지 몰랐다”고 떠들고 다녔고, 모씨는 “김수민은 빨갱이다. 젊은 사람이 정치를 해도 그런 좌파는 하면 안 된다”고 뒤에서 욕했다. 상의와 가깝게 지내던 어느 시민단체 간부마저 “정치인답지 못하다”고 나를 책망하기도 했다. 역시나, 불참하기를 잘했다.

    6월 15일, 두 달 동안 정 들었던 선거사무실을 나오게 되었다.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1층부터 4층까지 비어 있는 썰렁한 건물이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나올 때가 되니 2층에 술집이 들어섰다. 나중에는 1층에 식당이 들어왔고, 지금은 그런대로 꽉 찬 빌딩이 되었다.

    처음 사무실을 잡으며 건물주를 만났을 때 그의 표정에는 처치가 곤란해진 건물을 향한 근심이 꽉 차 있었다. 그에게 왠지 좋은 일을 해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4년 뒤 재선에 도전하며 입주한 건물도 텅 비어 있었는데 선본이 해산하면서 입주자들이 생겼다. “당락을 떠나 김수민이 입주한 건물은 잘 된다”고 내 멋대로 자부하고 있다.

    선본 사무실을 나오며 인의동 667-13번지에 있는 건물 1층으로 옮겼다. 이곳을 지역구 사무실로 잡고 ‘풀뿌리사랑방’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무실 면적은 10평 남짓했고 월세는 당시 20만원이었다(후에 30만원으로 올랐다).

    시의원이 지역구에 사무실을 두는 사례는 매우 희귀하다고 했다. 시의회에 의원 사무실이 있었지만 난 풀뿌리사랑방을 주요 거점으로 쓰기로 했다. 우선 인동과 송정동 시의회는 멀었다. 내가 송정동이나 형곡동 정도에서 활동하는 의원이었다면 따로 사무실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송정동에 틀어 앉게 되면 찾아오는 지역 주민들은 드물고 공무원들만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게다. 나는 독립된 공간을 원했다. 간판에는 ‘교육상담’도 하겠노라고 써넣었다. 동생이 자청해서 만든 간판 디자인이 썩 괜찮았는지 디자인 기획사에서도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 나니 옆에서 자동차 광택센터를 운영하던 아저씨가 찾아오셨다. “나는 투표를 안 했습니다. 관심이 별로 없어서기도 하지만 가게를 비워놓고 투표하기도 곤란해서요.” 바쁘고 부지런히 사시는 분이었다(후일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야구 동호회에도 나가는 등 여유를 찾으신 모양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김 의원 찍으셨어요.” 나중에 그분의 어머니를 만나 뵙고 나니 나를 지지할 만한 분이었다. 한국 현대사에 관해 그 또래 어르신 다수와는 사뭇 다른 견해를 갖고 계셨다.

    사방에서 반대한 의정비 인하

    그 무렵 나는 의정비 문제로 고민 중이었다. 후보로 나서면서 의정비를 “취업자 평균 소득만큼만 받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다. 구미시의회 의원 의정비는 296만 원쯤이었고 2008년 기준으로 취업자 평균은 203만원이었다. 주위에서 많이들 반대했다. “그렇게 많은 돈도 아니고 정치인도 사람인데 잘 받아둬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의정비 전액이 모두 보수 명목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보수에 해당하는 월정수당은 186만원 정도였다. 취업자 평균 소득보다 오히려 적은 액수였다. 나머지 110만원은 의정 활동비로, 이는 연구비 및 자료수집비 90만원과 보조활동비(활동을 보조하는 사람에게 지급하는 비용) 20만원으로 구성된다. 다만 이 110만원 역시 용처를 묻지 않고 월정수당에 엎쳐서 한꺼번에 지급된다는 특성이 있었다.

    당선되고 나서도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의정비 인하에 반대하고 있었다. “당신이야 깎을 수 있다지만 다른 의원들은 부양 가족도 있는데 누가 동의해주겠느냐”고 나를 타이르는 사람도 있었다. 의원들의 일상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접대비로 한 달 월급을 다 쓰고 적자 인생을 사는 의원들이 숱하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경조사 부조비 지출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의원은 연고가 있는 지역에서 기부행위를 하면 안 되며, 나는 4년간 단 한 차례도 기부행위나 ‘협찬’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아직 경조사비를 지출하지 않는 지방의원에게 눈총이 쏟아지는 후진적인 문화가 남아 있었고 숱한 지방의원들이 길흉사에서 지갑을 열었다. 의정비 인하는 의회에서 조례를 개정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의원들이 이에 응해줄 리가 없었다.

    나는 결국 의정비 인하를 시도하는 대신, 이 110만원을 본래 취지에 걸맞게 의정활동에 할애한다는 방침을 내렸다. 그래서 자비로 시의원 사무실을 내 운영하기로 했고, 정책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도 넉넉히 구입하기로 했다. 첫해 가을부터는 인턴 보좌관을 채용해 얄팍하지만 활동비를 지급했다.

    김수민

    인의동 사무실(풀뿌리사랑방) 풍경. 의원 임기가 끝나고 난 이후에도 비용 일부를 후원금으로 충당하며 운영중이다

    나는 의원 임기 내내 원룸에서 살았는데 월세가 20만원에 불과했다. 지역구 경조사에는 일절 기부행위를 하지 않았던 데다가 사실 나를 부르는 경조사도 얼마 없었다. 내가 평소에 돈을 쓰는 데는 주로 음반과 책이었는데 이것도 공무원들처럼 복지 포인트로 결제를 했으니 현금 지출이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통장에 들어오는 275만원 가량 가운데 매달 100만원씩을 적금에 넣었다. 선거사무장을 맡아줬던 한 친구는 “우리 나이에 월 백만 원 적금 넣는 사람 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자가용이 없으니 기름값도 들지 않았다. 면허증은 있었지만 원래부터 차 몰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운전할 때마다 주차 걱정을 해야 한다는 점도 마뜩치 않았다. 구미는 버스노선이 무척 불편했지만 교통정책을 위해서라도 버스를 타고 다니기로 했다. 시청 후문에서 진평동이나 인의동으로 돌아오기는 쉬웠는데, 진평동 원룸에서 메가박스 건너편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게 다소 귀찮았다. 일정이 빠듯할 때는 택시도 자주 탔다.

    하루는 동사무소의 어느 직원이 “의원님은 경차를 하나 구입하셔서 타고 다니면 되겠습니다. 이미지도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고 조언해주었다. 나는 웃으며 “아예 차를 살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자가용 없이 사는 걸 비난하기까지 했다. “기동성이 떨어지는데 왜 그러느냐”고. 무슨 기동성? 행사장 쫓아다니는 기동성? 대충 동네 한 바퀴 휙 도는 기동성? 물론 나를 공격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을 터이다. 이제 별의별 것으로 트집잡히는 나날에 돌입한 것이다. 나는 지역구내에서는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 다녔다.

    비-한나라당 의원 연합, 역시나 안 될 일

    한편 점점 가열되던 구미시의회 의장단 선거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라 있었다. 당선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내 처지에, 선거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선거에 열을 올리는 의원들이 머리로는 몰라도 가슴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의장단 선거에서 내 한 표는 무거웠다. 구미시의회에 야권 의원은 3명이었다. 다른 20명은 한나라당이거나 친박연합이거나 무소속이었지만 서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들끼리의 싸움이 되고 나면 야권 의원이 결국 ‘캐스팅 보트’를 행사한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처음 접근해온 의원은 <매일신문> 연찬회를 했던 그날 만났던 한나라당 황경환 의원과 같은 당의 김익수 의원(신평, 비산, 공단, 광평)이었다. 김 의원은 이런저런 인맥으로 신호를 보내왔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구미경제정의실천연합에서 김 의원의 전력을 들어 의장됨에 반대하고 나섰다. 김 의원은 음주운전 경력과 폭행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결국 김 의원은 의장 선거를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당선증 교부식날 “뭉치자”고 결의하던 몇몇 비-한나라당 의원들은 단결이 쉽지 않은 듯했다. 모처에서 비-한나라당 의원 13명이서 회합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나는 가지 않았고 그날 몇 명이나 왔는지 모르겠다. 앞서 얘기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비-한나라당 의원 단결론을 믿지 않았다. 비-한나라 의원의 절대 다수는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했거나 한나라당과 색깔이 다르지 않은 친박연합 소속이었다. 그러면서도 공통된 토대가 없으니 서로 거래가 잘 될 리 없었다.

    의장단 선거를 맞이해 구미시의회는 여섯 부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일단 한나라당이 갑 지역(김성조 국회의원파)과 을 지역(김태환 국회의원파)으로 나뉘어졌다.

    의원 6명인 갑 지역 한나라당은 3선인 김익수 의원이 의장 선거를 포기하면서 4선인 허복 의원(상모사곡/임오)을 내세웠다. 의원 네 명인 을 지역 한나라당에서는 4선인 황경환 전 의장이 나섰다. 또다시 의장을 역임하는 데 부담감이 있는 눈치였지만 황 의원은 ‘황고집’이라는 그의 별명대로 “자신있다”며 출마를 밀어붙였다. 세 번째 부류는 4명이 있는 친박연합이었다. 이들은 비-한나라 연합을 성사시키던가 아니면 한나라당 일부가 손을 잡아야 할 처지였다.

    무소속에서는 3선인 김영호 의원(양포, 산동, 장천, 도개, 해평)과 손홍섭 의원(형곡)이 나섰다. 두 사람은 예상대로 단일화 합의를 보지 못했다. 무소속은 갑 지역 무소속과 을 지역 무소속으로 쪼개졌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무소속 의원들은 모두 한나라당 공천에 탈락했던 이들이니, 갑 지역 무소속은 갑 지역 한나라당 의원과 한편을 이룰 수 없었고, 을 지역 무소속도 마찬가지로 을 지역 한나라당 의원과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무소속끼리 연대를 하지 못한다면 남는 건 ‘엇갈린 지역간 연합’, 즉 갑 지역 한나라+을 지역 무소속과 을 지역 한나라+갑 지역 무소속이었다. 중간중간에 김영호 의원 등을 지역 무소속이 갑 지역 한나라당과 제휴할 것이라는 예측이 들려왔다. 반면 갑 지역 무소속은 서로 뭉치지도 못했고 딱히 연대 대상을 잡지도 못했다. 이 과정에서 손홍섭 의원이 고립되었다.

    여섯 번째 부류는 그야말로 ‘나머지’로, 무소속인 박교상 의원(형곡), 민주당 김정미 의원(비례대표), 민주노동당 김성현 의원(도량, 선주원남) 그리고 나였다. 의장단이나 상임위원장단에 포함될 가능성은 없었지만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었다.

    김정미 의원은 계속 침묵 모드였기 때문에 행동을 같이할 수 없었다. 나와 박교상 의원, 김성현 의원이 의장단 선거에서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박 의원과 절친한 분이 민주노총 간부인 인연을 통해, 박 의원은 나와 김성현 의원과 조금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하루는 의회에 나갔더니 박 의원이 나를 불렀다. “김 의원은 어쩔 셈인가. 의장 선거 말이네.” “아직 못 정했습니다. 지켜보고 판단하려고요.” “비-한나라당 연대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모임에 나갈 건가?” “아뇨. 지켜봐야죠.” “그래, 나도 안 간다.”

    그러더니 박 의원은 “끝까지 지켜보고 찍어라. 비-한나라당이라고 무턱대고 밀어주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처음에는 박 의원이 다른 꿍꿍이가 있나 싶어 경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조언은 내가 취하려던 행동과 일치했다.

    의장 후보 돕던 사람들이 1표를 떨어뜨렸다

    김영호 의원은 부의장 쪽으로 정리된 것 같았다. 갑 지역 한나라당과 손을 잡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허복 의장-김영호 부의장으로 진용을 편성한 것이다. 의장 선거는 허복-황경환-손홍섭 3파전이 되었다. 세 후보 모두 구애가 거세었다. 여러 번 전화가 걸려왔지만 나는 2/3쯤은 받지 않았다. 그렇게 피하다 전화를 받으니 직접 만나자고 했다.

    황 의원은 사무실에 연거푸 찾아왔다. 당시 의장 신분이었기 때문에 의회사무국의 수행 공무원과 함께였 다. 황 의원은 “나는 고집이 세다. ‘황고집’이라고들 하지 않냐. 전에 남유진 시장과 싸우고 수십 일 동안 교류를 끊을 정도였다. 믿고 도와 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저는 학교무상급식과 주민참여예산제를 주요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었습니다. 무상급식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정중히 질문했다. 황 의원은 “의원이 하는 일 의장이 도와야지”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반대 의원이 도와달라고 하면 그때는 그쪽도 도우실 겁니까?’라는 질문이 앞니까지 치고 올라왔다.

    황 의원쪽에 선 같은 지역구(인동, 진미) 윤영철 의원도 나를 찾아왔다. “나이도 가장 많으시고 4선 의원이다. 김 의원도 그렇고 우리는 을 지역이지 않느냐. 을 지역끼리 도우면 얼마나 좋냐”고 설득했지만 나는 승낙하지 않았다.

    윤 의원은 “김태환 국회의원이 나더러 김수민 의원 만나라더라. 내가 그래도 조금 젊은 편(66년생)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거꾸로 황 의원을 밀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나는 지역의 반-김태환 여론을 등에 업고 당선된 입장이기도 하다. 내가 황 의원을 돕는 건 김태환 국회의원을 돕는 꼴이니 선거로 나타난 여론과 내게 투영된 민심과는 어긋났다.

    원래 나는 진보 성향 2명 의원을 빼고 다른 의원은 성향이 거기서 거기라고 본 탓에 의장 후보로 한나라당 의원이든 무소속이든 별 차이를 두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도 의장으로 밀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막상 밀려니 부담이 되었다. 혹 이것이 나와 한나라당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나 않을까 했다. 의장 후보군 중 무소속은 손홍섭 의원이 유일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엄청나게 전화를 걸어왔고, 부친을 통해서 나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다 .

    손 의원은 당시 무소속이었기 때문에 손 의원을 지지하는 것은 황 의원을 미는 것과는 달리 크게 무리가 없었다. 손 의원이 선거에서 학교무상급식을 전면에 내건 것도 호감 요인이었다. 하지만 당선가능성이 희박했다. 누가 손 의원을 지지할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물론 일체감이 든다면 떨어지더라도 밀어줄 수 있다.

    허나 나는 -다른 의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손 의원이 어떤 인물인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개원인 7월 1일을 목전에 두고서야 손 의원과 나는 독대했다. 그는 자신의 대학원 논문을 내밀며 “NGO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다.

    허복 의원도 집요했다. 내가 그처럼 광평초등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나에게 허 의원을 찍으라는 권유도 들어오곤 했다. 형곡동에 있는 민주노동당 사무실에서 허 의원과 김성현 의원, 나 이렇게 셋이 만났다. 허 의원은 “학교무상급식은 초등학교만이라도 하긴 해야 한다”고 밝혔다. “나는 보수 성향 의원인데 진보 성향 의원하고 잘해보고 싶다”고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그에게 마음이 조금 기울었다. 대중선거도 아닌 의장선거인데 단지 한나라당 의원이라고 해서 찍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즈음 지역언론에서는 K고 동문회가 허 의원을 민다는 보도가 나왔다. 내가 나온 구미고 동문회였다. 실제로 동문회 간부들은 허 의원을 밀었고 내게도 완곡하게나마 거듭 지지를 요청했다. 허 의원은 다른 고교를 나왔지만 구미고 동문회 간부들과 연이 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허 의원을 지지할 수 없었다. 젊고 무소속인 의원이 마치 고교 동문들에 의해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듯한 그림이 거슬렸다. 황경환 의원을 도운 윤영철 의원처럼, 허 의원을 미는 구미고 동문회 간부들도 거꾸로 내가 뒷걸음치게 만든 셈이다. <계속>

    필자소개
    전 구미시의원. 스스로를 정당인보다는 사회운동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녹색당 소속. kimsoomi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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