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력 아니라 몸매 우선
    신체차별 일상화된 패션업계
    패션노조 청년유니온 알바노조, 인권위에 ‘신체차별’ 고발
        2015년 01월 22일 08: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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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업계의 ‘열정페이’를 고발한 패션노조와 청년유니온, 알바노조가 패션업계에서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는 신체 차별, 이른바 ‘몸뚱어리 차별’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22일 진정서를 제출했다.

    패션업계가 디자이너 채용 시 키, 체중 등 특정 신체 사이즈를 소유한 사람만 채용한다는 디자이너로 고용한다는 것이 패션노조 등이 문제제기한 신체차별이다.

    실제로 디자이너를 꿈꾸는 많은 구직자들이 신체차별로 인해 꿈을 포기하고 다른 직종에서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으로 드러났고, 심지어 채용됐던 인턴들은 정직원이 되기 위해 몇 개월간 몸매를 가꾸는 일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패션업계 종사자라면 몸매가 좋아야 하는 것 아니냐, 운동하면 좋지 않느냐’는 주장이 나올 수는 있다. 하지만 특정 신체 사이즈가 장점이 아니라 취업의 당락을 결정하는 필수 요소라는 점은 패션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일하려 하는 많은 미래의 디자이너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디자이너인 샤넬의 칼 라거펠트, 루이비통의 마크 제이콥스, 안나 수이는 국내 패션업계가 요구하는 신체 사이즈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는 점을 생각하면 국내 패션업계에서 벌어지는 신체 차별은 패션업계 발전에도 위협적임에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패션업체가 디자이너의 디자인 실력보다 옷 입히기 좋은 몸매를 더 우선시 하는 이유는 피팅 모델 고용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결국 디자이너를 꿈꾸는 국내 많은 청년들은 자본의 논리 앞에서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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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노조 등의 국가인권위앞 기자회견(사진=유하라)

    피팅 모델 인건비 아끼려고 디자이너 몸매 보고 채용

    패션노조, 청년유니온, 알바노조가 22일 오전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신체차별로 인해 피해를 본 당사자 인터뷰 영상을 공개했다.

    피해 당사자(26세, 남)는 “대학시절 꿈꿔왔던 디자이너의 현실은 엉뚱한 부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이었다. 학력이나 디자인 능력이 아닌 몸매였다”며 “대학시절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모전에서도 상도 받고 교수님들, 심사위원 디자이너에 좋은 평가 받았으나 지금은 반대”라고 전했다.

    그는 “결국 디자이너로서의 취직은 마네킹과 같은 몸매를 가진 디자이너를 구인하는 형태였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패션 전공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1년간 40군데 면접을 본 것 같다. 심지어 취직을 위해 헬스장 다니며 몸매 만들었다. 정직원을 위해 몸매 만들어야 했다. 실장님이 말씀하기를 ‘디자인은 차차 하면 되니 우선은 피팅이 가장 중요하다. 3개월간 몸을 만들어 보고 피팅이 되면 정직원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 당사자는 “키의 문제도 있고, 마네킹과 같은 몸매를 만드는 것 자체에 한계가 있었다. 주변에 피팅이 되지 않은 친구들은 모두 다른 직업을 택해야 했다. 저 역시도 다른 직종에서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패션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어 좌절스럽다”며 “돈에 눈이 먼 그들의 악용이 현재와 같은 패션취업 현황 낳았다. 저뿐만 아니라 앞으로 패션디자이너를 꿈꾸는 모든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이 문제는 꼭 고쳐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깨가 옷에 안 맞으니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며 해고 통보
    체형교정 수술까지 고민하게 만드는 패션업계

    패션업계의 이런 행태는 일부라고 규정하기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패션노조 등의 말이다. 양심 없는 일부 업체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신체차별은 패션업계의 관행인 셈이다.

    패션노조가 사연을 공개한 또 다른 한 제보자는 “피팅이 안 돼서 취업이 안 되는 가운데 겨우 피팅으로 면접이 붙어 들어간 회사는 2주 동안 일을 시키다가 어깨가 옷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저에게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통보를 했다”고 말했다.

    또 “사전에 인수인계 기간이나 제가 다른 곳을 알아볼 기간은 주지 않았다. 일을 하는 2주 중에 마지막 1주일에 다른 사람 면접을 보고 다른 사람을 구하자 저에게 그날 저녁,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통보했다. 물론 그곳도 근로계약서 따위 쓰지 않았고 한 달에 80만원”이라고 전했다.

    그는 “저는 피팅 때문에 체형교정 수술까지 고민한 사람이다. 이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회사를 기다리지만 피팅이 안되면 그 어느 곳도 들어갈 수 없다”며 “저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회사 생활도 똑같았다. 1년 반을 인턴을 시키고 겨우 정직원을 시켜주는 회사에서 얼굴이 못생겨서 잘리거나, 막내 디자이너로 들어가서 사장 딸의 유치원 숙제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 생활이 당연한 겁니까? 예술가는 배고프다지만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라며 “일은 일대로 부려먹고 돈은 돈대로 적게 주고 대우도 안 해주는 패션업계. 모든 디자이너들이 부당한대우를 받으면서도 저처럼 당연하게 여기고, 버텨야만 하는 과제로 삼고 있다. 다들 반감을 가지고 일어나기엔 앞으로의 자기 미래가 무서워 떨고 있다“고 전했다.

    패션업계에서 일하기를 꿈꾸는 다수의 청년들이 신체차별에 신음하고 분노하고 있지만 국내 ㈜F&F – 베네통, (주)LF – 질스튜어트 뉴욕, ㈜ 더베이직하우스, ㈜코오롱 인더스트리 FNC 등 57개 대형 패션업체는 버젓이 신체 사이즈를 기재한 구인광고를 올리고 있다.

    회사가 요구하는 신체 사이즈가 해당되지 않으면 오랜 기간 공들여 만든, 실력을 증명할 포트폴리오 등조차 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패션업계에서 일한 적이 있는 많은 청년들은 학력차별, 성차별은 들어봤어도 신체차별은 처음이라며 패션업계 사정에 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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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노조 등에 제보한 정 모 씨는 “대화하면서 하는 면접은 10~15분 정도였고 어떤 브랜드든 피팅이 제일 중요하다며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엔 기본 티에 청바지로 시작해서 몸이 마음에 들면 원피스, 재킷 계속 더 입혀보고 맘에 안 들면 그냥 바로(탈락이다)”라며 “디자이너를 뽑는 게 아니라 그 브랜드에 맞는 인간마네킹을 뽑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소재디자이너로 전향해 그쪽에 맞춰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제보자도 “항상 면접 보러 가면 포트폴리오는커녕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들이 가져다주는 이 옷 입어보라 하고선 대충 보내더라. 그게 면접이었다”며 “면접 보려고 준비하고 아침부터 일어나서 부모님한테 면접 다녀올게요, 하고 나섰는데 면접 보러 들어가자마자 30초안에 면접 끝이라니.., 참 어이없다. 옷을 입어보러 4년을 공부한 건지 뭔지 회의감이 들었다”고 전했다.

    패션노조와 청년유니온, 알바노조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한 정부와 서울시에서 아무리 많은 자원을 패션업계에 지원해줘도 대한민국의 청년인재들이 성장할 수 없다”며 “탐욕스러운 고용주들은 저희에게 ‘창의력과 디자인역량’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줄 일회용 소모품들이 필요한 것이다. ‘몸뚱아리 차별’은 유럽과 미국에서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한국만의 기형적인 범죄행위로써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회견을 마친 3개 단체는 국가인권위원회에 패션업계 신체차별을 고발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향후 온‧오프라인을 통해 패션업계 실태조사를 시행할 예정이다.

    앞서 3개 단체가 패션업계의 열정페이 문제를 제기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고용노동부는 부랴부랴 특별근로감독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노동부는 오는 2월까지 패션업계는 물론 제과제빵, 호텔관광, 미용 등 교육기간을 핑계로 적은 임금을 주면서 고강도 노동을 강요가 빈번한 업계에도 특별근로감독을 시행한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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