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에 섞이지 않는 기름 되어달라”
    [복기, 의정활동 4년-1] 지방정치의 속살 보는 기회가 되기를
        2015년 01월 21일 03: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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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현재 녹색당 경북 사무처장, 언론홍보기획단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수민입니다. 예전 ‘진보정치 현장’의 필진 가운데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구미시의회 의원 시절(2010~2014)을 복기하는 글을 쓰면서 <레디앙> 편집진으로부터 연재 요청을 받고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겪은 지방의회는 예상보다 훨씬 다이나믹하고 스펙타클한 공간이었습니다. 훌륭한 정치인의 회고록은 아니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기초의회와 지방정치의 속살을 들여다 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상당히 긴 연재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복기록의 출발은 당선 직후 시점부터입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한 덕분(?)에 더욱 허심탄회하고 직설적으로 고백하고 토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4년이 저만의 경험과 깨달음으로 그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신 독자 여러분과 편집진, 구미 시민들께 감사드립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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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 직후

    2010년 6월 3일 새벽 3시경, 득표율 21.15%로 3위 당선이 확정되었다. 4위를 불과 130표차로 따돌리고 턱걸이로 당선하는 동시에, 1, 2위 당선자와 1, 2% 수준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개표 현장에 참관인으로 보낸 친구 둘이야 환호작약이었겠지만, 선거본부 사무실에 있던 사람 누구도 소리를 지르거나 손뼉을 치지 않았다. 담담한 승리였다. 남아 있던 운동원들은 이기는 것도 처음이었고 지는 것도 경험해보지 않았다.

    그래도, 선거는 이기는 것이 좋다. 선거뿐이랴 모든 승부가 ‘승리냐, 패배냐’의 일차원으로 보자면 승리 쪽이 더 좋은 것이다. 공직에 앉아 포부를 펼치는 것은 나중의 일이라지만 선거를 추스를 때도 당선자 쪽이 훨씬 좋다. 당장에 금전적인 부분에서 그렇다. 이기면 보전 항목에 해당하는 선거 비용의 전액을 돌려받으므로 타격을 면할 수 있다.

    으레 당선이 확정된 선거본부의 사무실은 갑자기 북적거리기 마련이지만 우리 쪽은 그렇지도 않았다. 내 지지자 절대 다수는 나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음을, 또 후보자를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는 것을 미처 작심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실감했다.

    4시경 진평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중년 남성 한 분만 찾아왔다. 그는 내게 “물에 섞이지 않는 기름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후일 다시 만난 그는 내 당선에 그저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고 했다. 기득권 세력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데, 그것은 ‘외로움 혹은 항복’이라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가고 나서 선본으로 복귀한 개표 참관인들이 들고 온 감자탕을 놓고 소주 한 잔을 기울였다.

    당선이 확정되지는 않고 ‘유력시’ 되는 수준이던 새벽 2시 30분경부터 문자 메시지가 빗발쳤다. 당시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다. 날이 밝아오자 이번에는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친구나 지지자는 거의 없었고, 면식은 없고 이름은 낯설고 이름보다 기관명이 더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었다. 시의원이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 자리였나? 나는 이런 것도 짐작하지 못한 채 선거에 뛰어들었던 초보 정치인이었다.

    곧바로 아침거리에 나가 당선 인사를 해야 했지만 나는 선거를 마친 자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당선자로서의 처신 방법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과거 나의 선배들은 선거에 나가 10% 득표율을 넘긴 적이 없었고 나는 누가 당선 인사를 하는 광경이라고는 보지 못해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친구, 동생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 일단 잠부터 들고 깨어나서 활동을 재개하기로 했다. 선거 막판 급격하게 누적되던 피로가 긴장이 풀린 우리를 엄습했다. 돌아가는 길에 진평동 인의주공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이 선거 결과를 두고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접했다.

    선거운동당시

    김수민 의원의 선거운동 당시 모습

    당선 인사는 오후부터 시작했다. 인동광장 네거리로 나갔더니 박태환 교육의원 당선자가 먼저 인사를 하고 있었다. 퇴근길 차량들 입장에서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였다. “조금만 하고 비켜줄게요”라고 했지만 상당히 부지런한 그는 내가 ‘여기까지 할까’ 싶을 무렵에야 네거리를 떴다. 자리가 아까워 한동안 더 절을 했다.

    상당히 많은 차들이 경적을 울리거나 손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중에 고급 세단은 하나도 없었다. 선거운동 때부터 이미 느꼈던 바지만 내 지지층은 예전에 볼 수 있던 진보파 지지층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서울에서 선거운동을 할 때마다 가장 큰 호응을 보인 건 30대 남성 화이트칼러와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비교적 내 지지층에는 블루칼러와 영세 자영업자층이 많았다.

    3일 저녁 당선소감을 올렸다. 마지막 문단이다: “제가 시민 여러분의 거울이 되고자 했듯이 여러분들도 저를 비춰주셔서, 두 달 동안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 매우 행복했습니다. 어떠한 유력자나 주류 집단이 아니라 주민들께 인정받음으로써 4년 ‘기간제 노동자’인 의정활동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영광스럽습니다. (…) 진보개혁노선의 대표자가 늘어나고, 지방의회에서 세대와 계층, 성별의 조화가 이뤄지기를 빕니다. 그러한 변화를 향해 4년 동안 작고 깊은 풀뿌리정치를 펼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민 여러분들이 이기셨습니다.”

    2010년 구미시의회, 한나라당 과반 의석 실패

    ‘구미텐인텐’ 카페에서는 네티즌들이 당선 소식에 열화와 같은 환영사를 보내왔다. 블로그 방문객도 갑자기 불었고, 트위터 팔로우도 급증했다. 사무실에 찾아오는 지지자가 별로 없는 대신 인터넷에서 갈채를 받은 것이다.

    이즈음 축하 손님 중에는 인의주공아파트에 사는 택시기사 한 분이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그만큼 방문객이 드물었던 것이다. 한 쪽에서는 동네에 연고도 없이 예상밖으로 당선되어 버린 나를 생소하게 생각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선거와 지지 후보의 당선 소식을 뒷전으로 하고 빠르게 일상으로 접어들었다.

    나중에야 서서히 깨달은 이치지만, 나에게 투표한 사람 중에 나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누구를 찍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선거는, 후보자와 유권자의 강한 일체감 속에 치러지는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의 괴리감 속에도 있다.

    구미시의회 의원 선거는 결과가 나온 후 엄청나게 큰 화제가 되어 있었다. 일단, 한나라당이 과반 의석에 실패했다. 23석 중 10석에 그친 것이다. 이것은 연합뉴스에서 특필하기도 했다.

    친박연합이 4석으로 꽤 선전했고, 민주당이 1석, 민주노동당이 1석, 무소속이 7석이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민주노동당 1명과 당시 무소속인 나, 이렇게 2명의 진보 성향이 포함되어 있어 한 쪽에는 충격을 다른 한 쪽에는 경사를 안겨주었다. 내가 구미시 역대 최연소이자 당시 영남 최연소 겸 전국 무소속 최연소(만27세)로 당선된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유의미했다.

    구미시 집행부가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나는 ‘두 명 가지고 뭘 그러시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집행부의 분위기에는 남유진 시장이 50%를 갓 넘기는, 한나라당 후보로서는 저조한 득표율로 재선했다는 위기감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한 방송사 기자가 나와 민주노동당 김성현 당선자를 찾았다. 이상하게도 민주당 당선자는 섭외 대상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 기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다: “그 민주당 당선자란 사람은 전화를 했더니 말도 못하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치를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인터뷰가 불가능해 보였다.” 시청 앞마당에서 가진 그날 인터뷰에서 나는 양대 주요공약이었던 학교 무상급식과 주민참여예산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확한 일자는 떠오르지 않지만 선거가 종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회사무국 공무원이 찾아왔다. 당선자들을 찾아서 여기저기 들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의원이 받는 처우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비로소 곧 의원이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6월 7일 오전 11시 구미시청 대강당에서 당선증 교부식이 있었다. 교부식이 끝나자 어느 재선 의원이 내 팔을 잡아끌며 대강당 아래층에 있는 의원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민주노동당 의원도 같이 붙들렸다.

    그는 우선 이렇게만 말했다. “한나라당 아니시니까…” 그 의원은 한나라당 소속으로 처음 의원이 되었다가 공천이 탈락한 후 무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때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구미 여론에 미루어 짐작하자면 그가 공천을 받아서 ‘1-나’나 ‘1-다’ 같은 기호를 받았을 경우 오히려 낙선했을 공산이 높았다. 낙천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가 나를 데리고 들어간 방에는 친박연합과 무소속 의원들이 앉아 있었다. 민주당 소속 의원은 그들이 놓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당선된 도의원이 앉아 있었다. 이 도의원은 한나라당 공천권을 행사했을 국회의원과 붙어서 이긴 처지였으니 표정에는 흥분과 득의가 만연했다.

    나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예측하고 있었다. 단순한 내용이었다. “다가오는 시의회 의장 선거에서 비-한나라당끼리 뭉쳐야 한다. 이렇게 꽉 뭉치면 안 될 게 없는데 꼭 이탈하는 사람이 생긴다. 앞으로 뭉치도록 하자.” 이를 듣는 나는 또 하나를 예측했다. ‘절대 뭉쳐지지 않을 걸.’

    아무 근거 없는 삼성전자 몰표설

    당선 후 그다지 크게 기뻐하지도 않았지만 작은 기쁨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당선자 신분으로 보낸 2010년 6월은 답답함과 짜증으로 보낸 한 달이었다. 나를 제도정치권에 떨궈준 지지층은 빠르게 흩어졌고 동네에 별 연고가 없던 나는 그들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선거 기간 나를 지지하지 않았거나 내게 무관심했거나 나를 무시했을 사람들부터 먼저 만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나를 한 세력의 대표자로서, 이념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선거기간에 돌아다녔던 “민주노동당의 위장 후보”라는 입방아도 빠르게 사라져 갔고 거꾸로 내가 ‘무’소속임을 빌미로 마치 ‘무색무취’한 노선의 정치인인 것처럼 대접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그들은 내게 “한나라당에는 천천히 입당해도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충고나 일삼았다.

    어떤 나이 지긋한 이는 “난 처음엔 김수민 후보가 근로자(민주노조를 뜻한다)들이 낸 후보인 줄 알았지”라고 말했다. 선거 당시에는 민주노총 지지 후보가 아니었던 나는 선거 직후 민주노총 경북지역일반노조에 가입했다. 시의원이 왜 노조에 가입하냐는 반문은 사절이다. 독일의 보수 성향 정치인인 메르켈 총리도 “나는 노동자고 가능하면 노조에 가입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나마 내가 인동, 진미 지역에 연고가 깊지 않아 다행이었다. ‘안면 받힐’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선거 직후 내가 부재중인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와 어머니가 받았다. 지역사회 유지인 것 같은데 그리 기꺼운 기색은 아니었고, 내가 없어 별 말은 없었다지만 다소 훈계조의 목소리였단다.

    그가 밝힌 조금의 이력과 목소리에서 읽히는 연령대를 들어보고 나는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답답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지역사회를 주름 잡는 입장인데 자신이 전혀 모르는 젊은 사람이 시의원이 되었으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연고가 없는 만큼 지역사회에서 걸릴 게 없기도 했다. 토호들 입장에서는 제어가 거의 불가능한 정치인이 탄생한 셈이었다.

    한편에서는 나의 당선에 대한 불복 심리가 교묘하게 표출되었다. 내가 삼성전자 기숙사에서 몰표를 얻어 당선되었고 그 몰표가 없었다면 당선은 어림도 없었다는 소리가 퍼졌다.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구미시의원 선거의 개표는 투표구별이 아닌 동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느 구역에서 어느 정도 표가 나왔고 몇 위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인동동에서 20% 득표율로 3위, 진미동에서 24% 득표율로 2위를 했다. 여기까지가 집계된 전부다.

    삼성전자 기숙사 주민들은 진미동 제1투표구(진미동사무소)에서 투표를 했다. 이곳에서 내가 몇 표가 나왔는지는 상상과 추측의 영역일 뿐. 삼성전자 기숙사를 비롯해 진미동에는 젊은 주민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반-한나라 성향의 유권자가 상당했는데, 청년층은 후보자에 대해 깊이 알고 찍지 않는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도 규모가 작은 지방선거에는 밝지 못했고 당일 투표소에 가서야 기표 대상을 정하기도 한다.

    한나라당 후보 셋이고 무소속 후보 둘이니, 이런 유권자들 다수는 무소속 후보 둘 중에 하나를 즉흥적으로 택일했을 수도 있다.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보가 진미동에서 1등을 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나는 진미동 뿐 아니라 인동동에서도 3위를 하며 당선권으로 들었었다. 그럼에도 진미동의 특정 투표구에서 몰표를 받아 당선되었다는 것은 투표해준 지지자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인동동 어디에서 선전했는지 역시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노릇이나 여러 가지 정황과 증언을 종합하면 구평동에서 비교적 표가 많이 나온 것 같았다.

    실제로 선거 직후 어느 구평동 주민들은 “우리 동네에서 많이 찍어드려서 당선에 공헌했죠? 잘 부탁드려요”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이런데도 내가 삼성전자 기숙사 몰표로 당선되었다는 말이 한동안 돌아 다녔다.

    “젊은 사람들이 젊은 후보를 찍었다”는 막연하고 자의적인 분석이 동원되는가 하면, 내가 삼성에 다니는 사원이라서 표를 많이 얻었다는 헛소문까지도 있었다. 나는 삼성전자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훗날 몇몇에게 물어보니 “김수민 의원 찍은 사람 그리 많지는 않을 것.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했다.

    개원도 하기 전에 충돌한 의원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매일신문>이 여는 당선자 축하 연찬회가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자리였으나 선거 기간 비교적 각별한 관심을 가져준 기자가 간곡히 초청해 거절할 수 없었다.

    다른 당선자의 차를 얻어 타고 대구로 향했다. 거기서 김태환 국회의원을 처음 만났다. 행사장 옆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는데 밑에서 한나라당 시의원들이 그에게 나를 가리켜 보였다. 그가 먼저 내게 인사를 청했다. 나는 이후로도 국회의원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자리를 돌다 내게 다가오면 그때 인사했다. 이것은 구미 지역구 한나라당 국회의원 뿐 아니라 야당 국회의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략 식이 끝나고 코스 요리의 전채로 보이는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몇 의원들이 나를 잡아끌었다. 이만 구미로 돌아가기로 하고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국밥이나 한 그릇 들자는 것이었다. 아니, 이 사람들은 이런 코스 요리를 자주 먹었나 보지? 요리에 눈이 돌아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식사는 휴게소가 아닌 구미의 한 식당에서 소고기를 먹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얼마 전까지 의장을 지냈고 의장 선거에 다시 출마하려는 황경환 의원(양포, 산동, 장천, 도개, 해평)의 제안이었다. 대구 가는 길에서부터 동행했던 의원들도 함께였다. 피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싶어 소고기를 먹으며 황 의원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당선증 교부식 날 비-한나라당 연대를 결의하던 의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당선자 시절 이런저런 행사에 많이 불려 다녔다. 초청자들은 내심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당선되었으니 얼굴 비치라’고 고압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간곡하게 “자리를 빛내 달라”고 말하니 거절하거나 사양하기 참 힘이 들었다.

    그때 들른 행사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느 지역언론이 당선자들을 초청해 주최한 토론회였다. 사회자는 “당선자들 공약을 읽어봤는데 이거 다 되면 구미는 천국 되겠다. 그냥 남발한 공약이 있는지 앞으로 지켜 보겠다”며 엄포부터 놨다. 당선자들 표정이 굳어졌고, 몇몇은 아예 눈을 감았다.

    행사 컨셉도 잘 파악되지 않았고 구체적인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점차 정책토론회로 흐르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골목상권 문제가 행사 주제가 되어버렸다. 나는 당시 한창 들어서던 기업형 슈퍼마켓(SSM)에 우려를 표하며 규제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밝히다. 다른 참석자들도 대형마트 및 SSM 규제와 전통시장 보호에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한 당선자가 “전통시장 쪽도 분발을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상모사곡동, 임오동의 한나라당 김상조 의원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테이블 위 마이크가 어느새 원평동, 지산동, 송정동의 친박연합 이수태 의원 앞에 있었다.

    김 의원은 ‘규제도 규제지만 전통시장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고 이를 스스로 만회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이 의원은 그것이 ‘전통시장 탓’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 의원은 연신 공격을 가했고 김 의원은 쩔쩔 매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 의원도 목소리 높은 것으로는 남에게 쉽게 뒤지지 않았다. 나는 후일 김 의원에게 “그날 어떻게 그렇게 참으셨습니까”라며 껄껄 웃곤 했다.

    그랬던 이 의원과 김 의원은 막상 의회에서 대립한 적이 없고, 2012년 7월부터 2년간 같은 방을 쓴다. 이 의원은 식사 자리에서 “대통령이 기초의원에 대해 뭘 알겠어? MB가 상모동에 시의원으로 출마하면 김상조한테 박살날 걸?”이라며 김 의원을 추켜 올리기도 했다. 인간관계는 모를 일이다.

    필자소개
    전 구미시의원. 스스로를 정당인보다는 사회운동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녹색당 소속. kimsoomi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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