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기고] 해고노동자들의 오체투지 행진에 참여하고 나서
        2015년 01월 19일 09: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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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1학년 때, <퓨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유투브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클래식을 사랑하게 된, 가난한 소녀의 이야기였다. 영화가 끝난 뒤 강신주 철학자의 강연이 있었는데, 그 때 이런 얘길 들었다. 우리에겐 모두 ‘순간’ 이 있다고. 그 순간이란 이제껏 내가 살아온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가 번개처럼 만나는 지점이라고.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었던 바로 그 순간, 그러한 순간이 곧 순수라고. 순간이 왔을 때 더 이상은 이전과 같이 살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처럼 오체투지 행진에 참가했던 지난 5일은 내 인생의 ‘순간’이었다. 이전과는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순간 말이다.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위한 오체투지 행진에 참여하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을 때, 꽤 취해있던 상태였다. ‘오체투지라……’ 지난 12월에 보았던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오체투지 행렬이 떠올랐다.

    흰 옷을 입고 길바닥에 완전히 엎드린 그들의 모습은 꽤 큰 충격이었다. 부당하게 해고된 후 오랫동안 복직투쟁을 벌여 마침내 회사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회장의 야반도주로 다시 길거리에 버려졌던 노동자들. 한겨울, 길바닥에 전신을 붙이고 온몸으로 호소하던 그들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또 한다니. 그것도 무려 4박 5일이나. 걱정은 조금 됐지만 얼른 가겠다고 했다.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도 끌어들였다. 행진이 시작된 다음 날, 시골집에서 작은 캐리어를 하나 끌고 서울로 올라갔다.

    하루 늦어 죄송한 마음을 안고 전경련 회관 앞에서 오체투지를 시작했다. 행진은 새정치민주연합과 새누리당사로 이어졌다. 양 당에 모두 면담요청을 했지만 새누리당 측에서 받아주지 않아 당사 앞에 계속 엎드려 있었다. 마침내 요청이 받아들여졌고, 면담이 끝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오체투지

    오체투지 행진의 모습(국민TV)

    셋째 날 행진은 강남 한복판에서 시작되었다. 쌍용차와 콜트콜텍에 사법살인을 내린 대법원에서 시작해 작년 무노조 신화의 삼성 안에 민주노조를 세웠던 염호석 열사를 기억하며 삼성전자 앞에 들려 백혈병 가족들과 함께 추모집회를 열기도 했다. 쌍용차 서울사무소 앞을 거쳐 콜트콜텍 위장 자회사인 기타네트 앞에서 마무리하는 긴 여정이었다.

    땅에 팔, 가슴, 다리를 붙이고 있노라면 겨드랑이 틈새로 바깥 세상이 보였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빠른 발걸음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들은 더러운 길 위에 엎드린 나의 등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눈을 질끈 감았다. 발걸음들은 사라지고, 잠깐 아득했다. 날은 추웠지만 계속 오체투지를 하다 보니 도리어 몸에 열이 오르기도 했다. 무릎을 세워 일어서다가 힘에 부치면 숨을 훅 내쉬었다. 육체의 무기력함, 정신적 굴욕감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이내 함께 하는 사람들의 흰 민복 앞에서 빛을 잃고 사라졌다.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맨바닥을 보라는, 이 바닥에서 한국사회 노동자민중은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결의의 행진이기도 했다.

    오체투지를 하는 내내, 조용하고 처절한 우리의 행진이 땅의 결을 타고 널리널리 퍼졌으면 했다. 같은 바닥에 몸을 붙인 우리의 심장소리를 땅은 들었을 것이다. 우․린․사․람․이․지 라고 되뇌이는 서글픈 속삭임을 들었을 것이다. 자본가들도, 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도 들었길 바랐다. 우리의 이러한 깊은 땅울음을 생생히 들었길 바랐다.

    그 바람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어 우리는 엎드리고, 또 엎드렸다. 경적을 쉼 없이 울리는 차들도, 빽빽이 늘어선 경찰들도 우리를 막아설 순 없었다. 물리적 행사로 잠시 묶어둘 순 있어도, 아무 소리 없이 터져 나오는 우리의 바람까지 짓밟고 설 순 없었다. 우리의 바람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땅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체투지 행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밤, 한참을 울었다. 70m의 굴뚝 위에 올라선 노동자들의 심정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 참담함의 깊이와 고통, 아는 줄 알았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지난 5일간 깨달았다.

    나는 절망이 무엇인지,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 왜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는지 몰랐다. 죽음으로 어서 끝장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해하는 것조차 두려운 삶이었다. 온몸으로 기는 것으로도 차마 다 헤아릴 수 없는 삶이었다.

    행진을 하는 동안, 지친 마음에 오체투지 순서를 알리는 북 소리가 두려울 때도 있었다. 밀려드는 길바닥이, 도로에 이마를 박고 엎드린 채 듣는 도시의 소음이 지긋지긋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냉혹했던, 여전히 냉혹한 현실에 마음을 벼렸다. 그 냉혹함 위에 몸을 던져 심장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임을 거듭 되새겼다.

    오체투지를 하며 건넌 한남대교 위에서 본 푸른 강물처럼, 깊고 푸른 자세로 늘 저항하는 사람들,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꾸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든 노동자가 회사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돌아갈 때까지, 함께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필자소개
    청년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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