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체, 경솔함, 지하드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세 단어'
        2015년 01월 19일 09: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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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의 저명한 맑스주의자인 에티엔 발리바르가 샤를리 엡도에 대한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밝힌 글이다. David Broder가 영어로 번역한 것을 남종석씨가 중역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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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오랜 일본인 친구인 하루시마 카토(Haruhisa Kato, 전 토다이 대학 교수)는 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저는 온 프랑스가 흐느끼는 이미지들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지난 수년 간 저는 욜린스키의 작품들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저는 항상 Canard enchaîné의 구독자였고 매주 까부(Cabu)의 ‘양아치’(Beauf)를 즐겁게 읽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내 책상에 ‘파리의 카부’라는 그의 작품집을 놓아두고 있습니다. 이 작품집에는 일본 소녀들을 그린 예쁜 드로잉들과 샹젤리제 거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여행객들을 그린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카토의 편지에는 이런 유보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올해 1월 르몽드의 사설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세상? 이것은 우선적으로 이슬람국가(IS)와 그 무지몽매한 야만주의에 대항하여 보다 응집된 투쟁을 사고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문장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와 반대되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평화를 위한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많은 이들이, 터키, 아르헨티나, 미국 등지에서 편지를 썼다. 그 모든 친구들은 위로와 연대를 표현했지만 또한 우리의 안전, 민주주의, 문명을 위한 우려도 표명했다 –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 모든 동료들, 벗들에게 답변하고자 하며 또한 동시에 이 사건에 대해 리베라시옹이 저에게 요청한 입장 표명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 지식인들은 어떤 특별한 안목을 지녔다거나 특별히 더 명석해서가 아니라 어떤 주저함이나 계산 없이 즉시 자기 견해를 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식인들에게 즉각 주어진 의무이다. 그들은 바로 그 위험을 안고서 자신의 언어를 드러내야만 한다.

    나는 오늘, 이 엄중한 시점에서 단지 세 단어만을 말하고자 한다.

    발리바르

    왼쪽이 에티엔 발리바르(사진 출저는 한상원)

    첫째, 커뮤니티(공동체)!!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흐느끼는 이들을 위해, 연대를 위해, 서로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또한 함께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 커뮤니티는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 이 커뮤니티는 우리 자신의 공포, 우리 자신의 환상 혹은 우리 자신의 빈곤의 희생양으로 ‘그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침략과 테러리즘의 색깔로 얼룩져 왔던, 우리 시대의 가장 어두운 측면에서 자라나는 악성 박테리아와 같은 선전들로 인해 희생된 프랑스의 시민들, 이민자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들이 바로 프랑스의 인민들이기도 하다.

    또한 그 커뮤니티는 프랑스 ‘국민전선’(the Front National-프랑스의 극우파 정당)이 말했던 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들이나 소설가 우엘벡(Houellebecq, 보수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숭배하는 소설가-역자)의 문장들을 선호하는 이들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이 커뮤니티는 국경의 경계에서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계의 내전’(종교간, 문화간 내전! – 역자)으로 인해 촉발된 책임감, 영향력, 공통의 감성 구조는 국제적인 수준에서, 아니 가능하다면 에드가 모린(Edgar Morin)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 어떤 코스모폴리탄적인 틀 내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커뮤니티가 ‘국민적 통합’이라는 것과 동일하지 않은 이유이다. 국민적 통합이라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오로지 나쁜 목적을 위해서만 봉사해 왔다. 이 통합은 중요하지만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거나(예컨대 프랑스가 국외에서 저지르는 온갖 나쁜 짓들에 대해 침묵하거나-역자) 인민들로 하여금 다른 민족들, 약자들에 대해 배제의 감정을 갖는 것을 불가피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레지스탕스들조차, 좋은 의도에서, ‘국민 통합’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국경일 날’ 공화국의 대통령이 프랑스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기 ‘국민 통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아왔다. 물론 프랑스 대통령이 현재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실천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민족’이라는 것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까지 이미 많은 논쟁을 해 왔으며 정당들은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거나 거부하거나, 이 틀에 갇혀서 ‘민족적’으로 되거나 혹은 되지 않으려고 했다.

    둘째, 경솔함!!

    샤를리 엡도는 과연 경솔했는가? 그렇다.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우선 이 잡지는 위험에 대한 고려 없이, 어떤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미에서 경솔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잡지를 영웅주의에 빠진 것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

    잘 의도된 도발인 측면도 있지만 또한 궁극적으로 재앙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신중하게 사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경솔했다. 이 잡지는 이미 ‘낙인이 찍힌’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경멸했기에 그 위험은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샤르브(Charb: 샤를리 엡도의 카툰니스트. 이번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역자)와 그 동료들이 두 가지 점에서 경솔했다고 판단한다. 오늘날 그 경솔함은 그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또한 결과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죽음을 동반할 만큼 위협을 동반하는 것이 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나는 오늘은 전자의 측면에서만 경솔함을 말하고자 한다.

    내일 혹은 그 이후 어느 날 나는 진정으로 후자의 측면에서 경솔함이 갖는 문제를 지적으로 다루고자 하며 이것이 전자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논하고자 한다. 그러나 경솔함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위협이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이 있더라도 말을 아껴야 한다는 의미에서 -역자) ‘비겁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덧붙인다.

    셋째, 지하드!!

    나는 오늘날 일반인들이 너무나 두려워하는 이 단어를 신중하게 다루면서 끝을 맺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 단어의 모든 함의를 고려할 수 있는 바로 그 시점에 직면해 있다. 나는 이 주제에 관해 이제 처음 언급하지만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의 운명은 무슬림의 손에 있다.’라고. 이 단어가 아무리 부정확할지라도. 왜 그런가? 그것은 물론 꾸란과 하디쓰가 죽음만을 원한다고 떠들어대는 이슬람 혐오증에 맞서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불충분하다.

    지하드 네트워크(테러리즘 네트워크)들이 이슬람을 악용하는 것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신학적 비판이다. 이슬람의 ‘보편적 상식’을 궁극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지하디즘이 오류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진정한 과제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모든 무슬림에게 주어진 과제(성전!)이다. -역자)

    왜냐면 지하드의 가장 큰 희생자는 세계 전역의, 유럽의 무슬림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는 죽음을 부르는 테러리즘의 준동에 사로잡힐 것이다. 무슬림들에게 인간적 모욕을 주고 그들을 공격하도록 만드는 위기가 일상화된 사회로부터 테러리스트들이 지원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시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보다 군사적인 형태로 무장한 채 진행되는 정책들, 우리의 자유를 기만하는 세속화된 정책들이 일상화되는 세속적인 서구 국가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무슬림은 이제 어떤 책임감, 혹은 더 나아가 그들에게 부과된 임박한 과제를 지니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지금 내가 ‘우리’라고 했을 때 그것은 즉각 그 정의에 의해 지금 여기의 무슬림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무슬림과 그들의 종교, 문화를 표적으로 하는 담론들을 지속적으로 수용해간다면(즉 이슬람 혐오증에 굴복한다면-역자), 그와 같은 종교적 비판, 신학적 비판의 작은 기회들마저 점차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무슬림의 논리를 통해 지하디즘을 비판하는 내재적 계기를 지금 곧장 가져야 하는 것이다.-역자)

    필자소개
    남종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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