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식으로 탐사하는
    중국 혁명의 풍경과 역사들
    [책소개] 『혁명의 맛』(가쓰미 요이치/ 교양인)
        2015년 01월 17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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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요리와 함께 세계 2대 요리로 꼽히는 중국 요리. 오늘날 아시아는 물론이고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까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중국 음식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혁명의 맛》은 한족(漢族), 몽골족, 여진족, 후이족(回族) 등 여러 민족의 대립과 융합의 역사가 중국의 깊고 넓은 음식 문화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20세기의 사회주의 혁명과 문화혁명 역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이 책은 ‘음식’을 소재로 삼아 중국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는 독특한 문화사이자 흥미로운 풍속사이다. ‘황제들의 중국’과 루쉰의 시대, ‘공산당의 중국’과 문화혁명의 시대, 그리고 현재의 중국까지 시공을 초월하여 종횡무진하는 ‘혀’의 탐사기이다.

    《혁명의 맛》을 읽고 나면 ‘달고 맵고 기름진 중국 요리’라는 생각이 일종의 선입견임을 알게 된다.

    저자는 중국 4대 요리(베이징 요리, 상하이 요리, 광둥 요리, 쓰촨 요리)의 특징과 기원은 물론이고, 만한전석이나 중국식 샤브샤브인 ‘훠궈’, 상어 지느러미 요리, 양고기 꼬치구이처럼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요리가 탄생한 과정을 ‘중국 음식을 사랑하는 미식가’의 입장에서 애정 어린 목소리로 들려준다.

    특히 저자는 오로지 한국어판을 위해 9장 <고추와 쓰촨 요리의 탄생>’을 썼으며, 이 글에서 한국.중국.일본에 고추가 전파된 경로, 조선족과 여진족의 음식 문화가 융합되어 만들어진 둥베이 요리 등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식탁에 깃든 중국사의 결정적 순간과 중국인의 삶!

    중국인들이 지금처럼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게 된 것은 명나라 때였다. 청대에 이르러 베이징 요리는 봄에 만발한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났다.

    건륭제는 ‘만한전석’이라는 최고의 궁중 요리를 완성시켰다. 만주족과 한족의 진미 150가지를 한 상에 올린 만한전석은 제국 통치의 이념을 담은 정치적 요리였다.

    검소했던 황실의 타락과 부패는 역설적으로 요리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다. 이전까지 황실이 금했던 상어 지느러미에 탐닉했던 서태후는 지칠 줄 모르는 탐식가였다. 서태후의 ‘맛의 사치’ 덕에 중국 요리는 전례 없이 화려한 백화제방 시대를 맞았다.

    이 책의 백미는 바로 저자가 직접 체험한 문화혁명 시기의 중국이다. 저자는 베이징의 오랜 서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뒷골목 ‘후퉁(胡同)’, 공산당 간부들의 화려한 연회, 《마오쩌둥 어록》 암송이 필수 코스였던 1970년대 거민식당 등 당시 외국인이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역사의 현장을 탐사하여 마오쩌둥 시대의 맨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저자가 베이징에 첫발을 디딘 것은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1968년. 고급 음식점에선 요리를 직접 하지 않는 ‘천재적’ 소년 요리사가 지휘봉을 휘두르고 있었고, 홍위병에게 습격당한 전통 음식점은 상호와 메뉴를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했다.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회상은 1989년 톈안먼 사건의 밤과 1997년 홍콩 반환의 날로 이어진다.

    바삭한 북경 오리 구이, 달콤한 월병, 상하이의 명물 게 요리까지 절로 군침이 돌게 만드는 섬세한 맛 묘사, 《본초강목》과 《수원식단》 같은 다양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한 탄탄한 배경 지식, 그리고 중국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저자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책이다.

    혁명의 맛

    중국 요리인가, 중화 요리인가?

    우리는 흔히 중국 요리를 ‘중화(中華) 요리’라고 부른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다른 말로 ‘청요리(淸料理)’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중국 요리와 중화 요리(청요리)는 다르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맛있게 먹는 짜장면이나 중화풍 볶음밥 같은 음식은 화교들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 각 지역의 특색에 맞추어 변형된 중국 요리, 즉 중화 요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중국 요리란 어떤 것일까? 《혁명의 맛》은 바로 그 의문에서 출발한다. 1960년대 후반에 처음 베이징 땅을 밟은 이후 30여 년간 중국 본토를 오가며 찾아낸 중국 식문화의 과거와 현재가 바로 이 책에 생생하게 담겼다.

    내가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한 것은 문화대혁명, 줄여서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때였다. 중국 미술품 감정과 국제적인 가격 판정을 의뢰받아 중앙문물연구소 등지에서 일을 했는데, 중국에 체류하다 일본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경찰이 찾아왔다. 뭘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고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이 중국까지 갔다 왔는지 구경하러 왔던 듯하다. …… 특히 일본 맛과 중국 맛의 차이에 놀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홍콩을 비롯한 세계의 중국 요리와 중국 본토의 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맛은 대체 무엇일까? 시대의 흐름에서 비껴나 남겨진 과거의 맛일까? 순수한 중국 요리 본연의 맛일까? 아니면 오히려 왜곡된 맛일까? ― 1장 중국 요리란 무엇인가.27, 29쪽

    요리에 깃든 해체와 융합의 중국사

    저자는 “중국처럼 왕조가 몇 번이나 다른 민족으로 바뀌는 역사를 경험한 국가는 달리 유례가 없다. 변화를 겪을 때마다 문화가 성숙해진 역사를 지닌 나라가 중국”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중국에서 음식 문화가 발달한 데에는 이러한 변화가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하여 후이족(回族), 몽골족, 만주족 등 다양한 민족의 문화가 섞여 들면서 오늘날과 같은 깊고 넓은 중국 요리의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중국 4대 요리 중 하나로 꼽히는 ‘베이징 요리’이다.

    베이징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중국 정치.문화의 중심 도시이다. 중국 각지의 매력적인 지방 요리가 저마다 독자성을 유지하며 수도 베이징으로 들어왔다. 특히 오늘날 베이징 요리의 체계가 잡힌 것은 청나라 시대였다.

    1644년에 베이징에 입성하여 통일 왕조로서 청나라 시대를 연 만주족은 한족 문화에 관용을 베풀었고, 그리하여 베이징의 식생활은 새로운 문화의 혼합을 경험하게 되었다. 몽골족과 만주족은 늘 한족을 회유하는 정책을 폈다. 청나라 시대에도 한동안 이어진 태평성대와 만한혼합(滿漢混合)의 분위기에 힘입어 베이징 요리 문화는 백화만발(百花滿發)했다. 오늘날 중국 요리의 명물, 베이징 요리의 명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음식의 대부분이 청나라 시대에 탄생했다. 예를 들어 남방에서 독자적으로 성장한 상어 지느러미 요리, 본디 난징 요리였던 것이 베이징에 와서 진화한 베이징 카오야(북경 오리 구이) 등이 이 시대의 산물이다. ― 3장 제국의 통치술과 궁중 요리.79~80쪽

    최고의 정치적 요리 ‘만한전석’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는 중국 최고의 미식가로 꼽힌다. 만주족이면서도 한족 요리를 좋아했고, 특히 강남(江南) 요리를 즐겨 먹었다. 4대 황제인 강희제 때 처음 등장한 ‘만한전석(滿漢全席)’은 바로 이 건륭제 시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한족과 만주족의 융화 정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면서 식생활의 융합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했”기 때문이다.

    본래 만한전석은 지방에 부임한 만주족 관리를 토박이 한족이 접대하려고 고안한 연회 방식인데, 만주족 요리와 한족 요리를 똑같은 숫자로 내놓아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건륭제 때부터 군기처는 만주족의 요리에 한족의 요리가 섞여 드는 것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창구 역할도 하였다. 만한전석은 만주족이 한족에게 ‘만들게 한’, 만한(滿漢) 융화를 위한 정치적 요리였던 것이다. …… 청나라 왕조는 한족 요리에 만주족의 풍미와 만주에 가까운 몽골 스타일의 맛을 섞고, 거기에 후이족 요리를 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족 요리가 나아가는 방향 자체를 바꾸려고 했다. 그리고 그 요리를 만드는 것은 한족의 손에 맡겼다. 한족 관리의 손으로 한족 농민을 통치하도록 꾀한 것과 완전히 똑같은 태도였다. ― 3장 제국의 통치술과 궁중 요리.92쪽

    서태후가 상어 지느러미를 즐겨 먹은 이유

    지금은 ‘상어 지느러미’ 하면 곧바로 중국 고급 요리를 떠올릴 정도지만, 실제로 중국에서 상어 지느러미 요리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전통적으로 청나라 황실에서는 상어 지느러미를 먹지 않았다. 유목민이었던 여진족(만주족)은 해산물에 익숙지 않았고, 애니미즘을 신봉하여 육지의 식재료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습을 깬 것이 청나라의 마지막 권력자 서태후였다.

    서태후는 몽골계 만주족 출신이자 하급 관리 예허나라 혜징의 딸이었는데, 몽골계 이슬람교도와 혈연인 한족의 피가 섞였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서태후는 순수한 만주족이나 한족과는 다른 다양한 개성을 발휘했다. 서태후가 정말 상어 지느러미를 좋아했다기보다도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상어 지느러미를 즐겨 먹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 3장 제국의 통치술과 궁중 요리.104~105쪽

    부패한 환관 정치가 낳은 미식의 시대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힘이 쇠락할 무렵이면 언제나 황제의 최측근인 환관들이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다.

    저자는 특히 환관이 중국 음식 문화에 끼친 영향을 두고 “중국 요리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환관 요리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것은 환관이 지닌 남다른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했다. 환관들로 하여금 권력과 부를 향한 욕망과 미식의 쾌락에 탐닉하게 부추긴 것은 “거세로 잃어버린 남성 기능에 대한 콤플렉스와 보상 심리”였다는 것이다.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말기에 환관들은 궁중에서 쓸 식자재 구입을 담당하면서 각지에서 산해진미를 들여와 호사를 누렸다. 환관의 친인척이 식자재 유통을 장악했고, 이 부패의 고리를 통해 궁중 요리의 비법과 고급 식자재가 시중으로 흘러나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몰락의 징후가 중국 요리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환관 덕분에 질 좋은 식재료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경로가 확립되었다. 지방에 거주하는 환관의 친인척이 이 경로를 장악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선방에서 최고급 식자재가 시중의 고급 음식점으로 유출되어 요리법과 더불어 퍼져 나갔다. 유출을 뒤에서 조종하던 장본인은 바로 디안먼(地安門) 바깥에서 자금성에 납품하던 상인들이었다. 디안먼 밖에 있던 대규모 레스토랑에서는 궁중에서 만들던 까다로운 요리가 진화해서 오히려 더욱 세련된 형태가 되어 나오기도 했다. 이 대규모 레스토랑의 고문이 모두 환관이었다. 중국 요리의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 환관 요리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3장 제국의 통치술과 궁중 요리.88~89쪽

    “매운 것을 먹지 않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다.” _ 마오쩌둥

    궁중 요리와 서민 요리가 모두 화려하게 꽃핀 청나라 시대가 저물고 중화민국 건국과 국민당 시대, 중일전쟁 등 오랜 혼란을 거쳐 마침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념이 문화와 풍속을 압도하는 시대’가 문을 연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마오쩌둥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평생 고향 음식인 후난 요리를 즐겨 먹었다. 그가 태어난 후난성 사오산은 습도가 높은 산간 지역에 있었는데, 음식이 부패하는 것을 막으려고 기름과 고추를 많이 썼다. 마오쩌둥은 “고추를 좋아하는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다. 홍군(紅軍)에 몸담은 이들 중에 고추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마오쩌둥과 더불어 건국의 핵심 인물이었던 저우언라이는 식성이 전혀 달랐다. 장쑤성 출신에 프랑스 유학파인 그는 서양식 조리법을 가미한 요리를 즐겼다. 또 그는 술에도 조예가 깊고 단맛을 좋아했다. “고추의 매운맛을 좋아한 마오쩌둥과 ‘배가 고플 때는 설탕도 괜찮은 먹을거리’라고 할 만큼 단맛을 즐긴 저우언라이의 상이한 식성”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매운 것을 먹지 않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다.” 마오쩌둥에게 올바른 농민 요리의 대표는 고추를 쓴 것이었고, 고추는 인민공사(人民公社)가 자랑하는 이른바 모범적 작물이었다. 요리가 그리 발전하지 못한 후난성 벽지의 고향을 생각하며, 마오쩌둥은 고추를 꽉 깨물고 그 매운맛으로 도시를 섬멸하는 환상을 눈앞에 그렸던 것이 아닐까. 마오쩌둥은 자신의 권력 투쟁과 고추를 겹쳐 인민해방군 팔로군에 후난 요리의 매운맛을 장려했다. ― 9장 고추와 쓰촨 요리의 탄생.324~325쪽

    1970년대 베이징 거민식당 체험기

    이 책의 핵심이자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바로 저자가 마오쩌둥 시대부터 덩샤오핑 시대까지 베이징, 상하이, 쑤저우 등 중국 각지를 오가며 직접 겪은 일들이다.

    저자가 처음 중국 땅을 밟은 문화혁명 시기에 외국인들은 호텔이나 몇몇 국영 식당 등 허가받은 곳에서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의 보통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남몰래 찾아다녔고 베이징 뒷골목의 거민식당(居民食堂)에서 마침내 ‘문화혁명의 맛’을 만날 수 있었다.

    거민식당은 원래 동네에 적어도 하나씩은 있었는데,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도시의 주민 자치 조직에 지나지 않았던 거민위원회가 운영을 도맡았다. 지금도 중국에 존재하는 거민위원회는 요즘으로 치면 주민들의 반상회나 자율 방범대에 비견할 만한 조직인데, 실질적으로는 경찰이 관리하고 있었다. …… 거민위원회는 문화혁명 당시 어떤 조직보다도 생활에 밀착한 혁명과 계급투쟁의 장이었다. 공산당의 지시가 발표되면 거민위원회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을 구석구석까지 그 내용을 전달했던 것이다. ― 5장 공산당과 혁명의 맛.154쪽

    저자가 맛본 거민식당의 음식은 빈약하고 조악했다. “식단은 러차이(열을 가해 즉석에서 만드는 음식) 한 가지와 국, 만터우(찐빵) 한 개였다. 러차이라고 해도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만들지는 않았다. 만들어놓은 것을 몇 번씩 다시 데워 내왔다. 국은 너무 묽어서 그냥 뜨거운 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만터우는 소금 간만 한 퍼석퍼석한 옥수수 만터우였다.”

    그러나 거민식당에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공산당과 거민위원회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다. 거민식당에 가서 묵묵히 밥을 먹는 것이 문화혁명 시대의 가장 훌륭한 처세였다.

    입구에 들어서면 마오쩌둥의 석고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주위에도 태양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민의 한가운데에 선 마오쩌둥의 찬란한 위용을 그린 포스터, 그때그때 상황에 걸맞은 정치 투쟁 슬로건 따위가 벽에 빙 둘러 붙어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식당에 들어가려면 석고상이나 포스터를 마주보고 아침에는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을, 저녁에는 그날 하루 자신이 한 혁명적 행동을 바로 선 채 보고해야 했다. 식당에 들어가면 벽과 탁자를 커다란 국자로 탕탕 치며 위협하는 거민위원회 아주머니가 《마오쩌둥 어록》을 암송하라고 채근하곤 했다. 아무리 초라한 식사라 하더라도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 동지 덕택이다. 또 초라한 음식을 먹을수록 부르주아 계급 타도를 위한 혁명적 행동이기 때문에 칭찬받아 마땅했다. 그러니 절대로 맛있는 음식이 나올 리가 없었다. ― 5장 공산당과 혁명의 맛.156~157쪽

    홍위병, 음식점을 접수하다!

    저자의 눈에 비친 문화혁명은 ‘암흑의 시기’였다.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 지역별 음식 문화가 잘 발달한 중국에서 문화혁명을 거치는 동안 ‘맛의 획일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삶과 문화가 송두리째 부정당했으며, 혁명의 주체로 불린 ‘농민.노동자.병사’가 먹는 음식이 국영 식당 메뉴로 등장했다. 민영 음식점이 금지되었고 외식 문화가 사라졌다. 마오쩌둥 사상을 숭배하며 문화혁명의 선봉에 선 홍위병들은 벌써 문화혁명 초기에 부르주아 계급 타도, 자본주의 타파를 외치며 베이징의 전통 있는 음식점들을 습격해 점령했다.

    이튿날인 (1966년 8월) 20일은 산둥 요리 음식점 ‘풍택원’ 차례였다. 이 가게에는 문화혁명 초기부터 극좌 그룹에 속한 직원이 있어 제15중학, 제25중학 홍위병 500명을 불러 함께 쳐들어왔다. 도자 식기, 은 식기, 쓰허위안 스타일로 섬세하게 지은 내부 시설이 전부 부서졌다. 제15중학 학생 약 30명이 귀빈석을 접수함에 따라 ‘치안원’과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가게 이름도 풍택원반장에서 ‘춘풍반장(春風飯莊)’으로 개명하였다. ― 6장 문화혁명과 평등의 맛. 212쪽

    마오쩌둥의 정신이 녹아든 수프를 먹다

    문화혁명 시기에 저자가 맛본 음식 중에는 거민식당의 ‘맛없는 맛’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놀랄 만큼 맛있고 세련된 음식도 있었다. 저자가 1974년 베이징에서 정부 관계자들에게 초대받아 간 연회에서 맛본 음식도 그랬다. 그러나 그날 연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오쩌둥을 향한 참석자들의 숭배 열기였다.

    내가 요리를 덥석 입에 떠 넣는 동안 주변 사람들은 종이 냅킨을 식탁 위에 작게 접어 깔더니, 그 위에 보석이라도 되는 양 은행을 건져내어 늘어놓기 시작했다. …… 자세히 보니 과연 은행 한 알 한 알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오쩌둥이 쓴 시 한 소절이라고 했다. 이런 것을 먹으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이었으리라. 그뿐 아니었다. 수프 안에 위대한 마오쩌둥의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고 하며 사람들은 울면서 국물을 들이켰다.

    “그 은행은 어떻게 합니까?”

    나는 통역을 통해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물었다.

    “가보로 간직하지요. 포르말린에 담가서요.” ― 5장 공산당과 혁명의 맛.169~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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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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