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 가장 소중한 선물
    [논술에서 배운다] '타인 되기'와 '타인으로 대하기'
        2015년 01월 16일 11: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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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좋아하는 문제예요. 독립적이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행복이 넘치는 가정도 꾸리고 싶죠. 문제는 이 둘이 충돌하기 딱 좋다는 겁니다. ‘무조건 행복’을 추구하다가는 자칫 얽매이기 쉽고, 그렇다고 무작정 독립적이려다가는 콩가루가 될 수도 있을 테죠.

    문제는 ‘무조건’, ‘무작정’이란 데 있겠지만, 이걸 대충 절충하는 식이어서는 참 팍팍해진다는 거, 많이 경험하잖아요. 풀면서 바람직한 가족관을 한 번 그려보자구요. 확장하면 괜찮은 공동체상도 그릴 수 있겠구요. 이왕이면 가족이 함께 풀어보는 것도 좋겠어요. 덕분에 토론 함 하지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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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의 논지를 근거로 하여 (나)와 (다)에 나타난 가족관의 차이를 밝히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가) 가정 하면 우리는 자유 ․ 행복 ․ 프라이버시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집 떠나면 고생이다”는 말도 있듯이 가정은 우리가 편안히 먹고 입고 자는 곳이다. 바깥에서 지친 우리의 심신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곳이다. 가정에서 자녀는 사랑을 받으며 양육된다. 메마르고 각박한 바깥 사회와는 달리, 가정에는 안정을 얻으며 바깥에서 느끼지 못하는 행복과 자유를 느낀다. 이런 가정은 보호되어야 할 불가침의 사생활 공간이다. 가정을 파괴하는 파렴치범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의 의미를 깎아내리거나 가족 구조를 비판하는 어떤 시도도 우리는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본다.(중략)

    그러나 우리는 키워주고 보살피는 관계만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 자라버린 자녀에게 혹은 대화 상대가 아쉬운 배우자에게 키우고 보살피는 태도로만 일관한다면 도리어 상대방을 구속하는 질곡이다. 노인들은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인들 역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살핌을 받기만 하기보다 젊은이들과 겨루고 힘을 합치며 당당히 타인으로 마주서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남편들은 대화 상대를 원한다고 말한다. 시중들어 주는 대신에 부양해야 하고 사사건건 사랑을 확인하려는 아내가 아니라 독립해 있고 자기 세계를 가지며 말 건네고 싶은 아내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성장할수록 자녀 역시 키움과 보살핌의 대상이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도 언제나 감싸고 보살필 수만은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되 자신에 대해 냉정해지고 싶다. 거리를 두고 재고 자극하고 관찰하기를 원한다. 얼굴 맞댄 더할 수 없이 가까운 가족관계에서도 우리는 서로 대등한 타인이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 이정원, 「사랑, 결혼, 가족」, 『삶과 철학』에서

    (나) 옛날부터 여자의 행복이라고 생각되어온 그 길이 반드시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누구나 성적 매력으로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적령기의 여자들은 대개가 다 남자를 만나게 된다.

    결혼만 하면 꿈꾸었던 인생이 손에 들어온다. 멋진 남자의 ‘상냥하고 좋은 아내’가 된다. 여유 있으면 자원봉사를 하고, 자선기금도 모으며, 주 1회는 미술관에도 가는 생활……. 이것이 무슨 부족함이 있으랴.

    이런 생활을 꿈꾸고 있는 여성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재클린 오나시스나 그레이스 왕비는 아직도 여성에겐 동경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낡은 사고방식에 젖은 불쌍한 아가씨여! 그 재키조차도, 마흔 여섯 살의 나이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재산과 미모만이 인생의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재키는 ≪바이킹 프레스≫의 편집자로서 예전과 같이 일의 세계로 복귀했다.(중략)

    다시 말하면, 존 케네디나 레이니에 공과 같은 남성은 당신이나 나와 같이 이름도 없는 처녀와는 우선 결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결혼대상으로 생각한 것은 여배우나 모델, 그리고 대부호의 딸 등, 많은 돈을 가지고 있든가, 돈 많은 가족이 있는 여성이다. 더욱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여성들은 모두 아내나 어머니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략)

    귀엽고 사랑스런 전업주부라고 해서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한 대저택에 살며 벤츠를 몇 대나 굴리는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 아내나 어머니 역할에 만족하며 멍청히 있다가는 벤츠와 함께 차고에 버려지고 만다.

    내가 본 바로는 남편에게 지지 않을 만큼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여성은 버림을 받는 일이 적은 것 같다. 물론 그 중에는 버림을 받은 사람도 있고 스스로 나온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나 버림을 받는다 해도 그 비극을 극복하는 강인함이 있다.

    돈이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남편 이외의 뭔가에 속해 있는 여성 쪽이 남성의 마음을 언제까지나 끌 수 있는 것이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요즘 남자들은 당신의 급료도 사랑하고 있는 듯하다.

    ― 헬렌 브라운, 『나는 초라한 더블보다 화려한 싱글이 좋다』에서

    (다) 내가 고민하는 것 ― 너무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 ― 중의 하나는 바로 가족을 일구는 일이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우리 세대가 자식을 갖는 데서 느끼는 딜레마를 털어놓았다. 자식이 우리를 얽어맨다고, 자식을 낳으면 하고 싶지 않은 ‘어버이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말했다. 나도 약간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선생님을 보면서, 내가 곧 죽을 처지인데 가족도 자식도 없다면 그 허전함을 과연 참아낼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선생님은 두 아들을 아버지처럼 사랑이 많고 남을 잘 돌봐주는 사람으로 키워냈다.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애정을 표현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원한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아버지 생애의 마지막 몇 달을 함께 지내려 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모리 선생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너희 생활을 중지하지 말아라. 안 그러면 이 병이 나 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세 사람 모두를 집어삼켜버릴 거야.”

    선생님은 아들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죽어가면서조차 자식들의 세계를 존중했다. 이들 가족이 모여 있을 때는 애정이 폭포처럼 흘러났고, 입맞춤과 농담이 수없이 오갔다. 그리고 침대 곁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잡아주고 있는 광경은 이 가족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모리 선생님은 큰아들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자식을 낳아야 되느냐 낳지 말아야 되느냐 물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하라곤 말하지 않네. ‘자식을 갖는 것 같은 경험은 다시 없지요.’ 라고만 간단하게 말해. 정말 그래. 그 경험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어. 친구랑도 그런 경험은 할 수 없지. 애인이랑도 할 수 없어. 타인에 대해 완벽한 책임감을 경험하고 싶다면, 그리고 사랑하는 법과 가장 깊이 서로 엮이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자식을 가져야 하네.”

    ― 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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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의 탄생 영화

    영화 ‘가족의 탄생’

    ‘(가)를 근거로 하여’라고 했으니 (가)가 이번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 원리다. ‘(나)와 (다)의 가족관의 차이를 설명’하라 했다. 차이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차이가 아니라, 이 차이를 낳은 원인을 찾는 것이다. ‘자신의 견해’는 ‘차이’에 대한 견해다.

    (가) 가족, 대등한 타인들이 이루는 공동체

    흔히들 가정을 각박한 세상과 구별되는 섬처럼, 보호되어야 할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생각한다. 그곳에는 사랑과 행복이 넘쳐야만 한다는 거다. 그런데 그럴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아내/엄마는 자기만의 꿈은 접어둔 채 남편과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시달린다는 느낌이다. 남편/아빠는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제 삶을 살지 못한다. 아이들은 오직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만이 효도라 생각하여 제 나름의 꿈을 포기한다. 모두가 제 삶이 아닌 다른 삶을 대신 사는 꼴이다. 그렇다면 ‘신성한 가족’은 사랑을 빙자한 억압과 구속일 수도 있다.

    제시문은 한 돌파구를 제공한다. 가정 역시 사회적 관계의 하나로 바라봐야 한다는 거다. 바람직한 사회적 관계의 모습을 가족관계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발상의 전환을 이룰 때, 비로소 개성인들이 함께 이루는 가정을 꿈꿀 수 있다. 어떻게? 서로를 ‘대등한 타인’으로 대하라고 한다. 서로 대등한 주체로 만날 때 비로소 자기를 구속함 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관계,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이 움트는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거다.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얘기를 할 차례다. ‘대등한 타인되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스스로가 대등한 주체가 되는 것’과 ‘다른 가족 구성원을 대등한 주체로 대하는 것’이다. 가족에도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있다. 따라서 누구의 누구에 대한 태도인가에 따라 대등한 타인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 스스로 타자되기

    (나)는 (가)를 구체적으로 적용한 첫 번째 사례다.

    전반부는 여성적인 매력만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는 태도로는 사랑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것은 ‘타인에 기댄 행복’, ‘타인의 그늘에서 누리는 행복’이다. 그런 한 매력을 잃으면 행복도 끝나버린다. 유지해보려고 별짓을 다 하지만, 세월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꼭 아내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남편도 한참 잘 나가다가도 실직이라도 당할라치면, 금세 고개 숙인 남자가 될 운명이다.

    후반부에서 강조하는 것은 간단하다. 진실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편 이외의 자기 영역을 가져야 한다. 아내나 어머니 역할에 만족하다가는, 그 역할이 끝난 이후에 용도 폐기되고 만다. 아내 스스로 대등한 주체로 설 때라야 비로소 존중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줄이자. 대등한 타인으로 대접받고자 한다면, 스스로 대등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내가 주체로 서야 상대방도 존경하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나를 대한다. 막말로 같이 사는 걸 고마워할 정도가 되게 하라는 말이다.

    부부는 계약으로 맺어지므로 근본적으로 대등한 관계다. 여차하면 헤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여성들은 남편에 얽매인 삶, 남편의 성공이 곧 내 성공인 그런 삶에 묶여 있다. 남편은 주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반해, 아내는 가족관계를 못 벗어난다. 넘어섰다 싶어도 그건 남편이나 아이들과 맺는 관계의 연장선상에 있기 십상이다.

    대등해야 할 관계가 불평등한 관계가 돼버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유력한 방안이 바로 ‘스스로 타인되기’다. 그것은 여성이 자기 관계망을 확장하는 데서 비롯된다. 꼭 경제적일 필요는 없다. 뭔가 가족을 넘어서 의미 있는 관계를 이룬다면, 그게 바로 사회적 관계 만들기다.

    (다) 대등한 타자로 대하기

    (다)는 (나)와 달리 ‘부모자식’관계를 다룬다. 무엇보다 ‘내가 먼저 가족 구성원을 대등한 타자로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이 다르다.

    필자는 자식을 갖는 데서 오는 딜레마를 고백한다. 그것은 하고 싶지 않은 ‘어버이 노릇’을 하는 것으로서, 나를 얽어매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식 가진, 또는 가질 사람들이 자주 하는 고민이다.

    모리는 필자의 고민에 행동으로 답한다. 죽어가면서도 자식들의 세계를 존중하는 아버지. 이 가족에게는 애정이 폭포처럼 흘러넘친다. 모리는 자식을 갖는 것은 ‘타인에 대해 완벽한 책임감을 경험하는 것’이자, ‘사랑하는 법’과 ‘가장 깊이 서로 엮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데 조건은 없다.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는 책임감! ‘사랑하는 법’이란 무엇인가? 자식의 삶을 그 자신의 삶이 되게끔 하는 것이다. 그의 삶에 부모가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는 것. 남편의 아내 사랑, 또는 아내의 남편 사랑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진정한 가족 사랑이란 가족 구성원 어느 누구도 나로 인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진짜 사랑은 바로 ‘그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리는 자식들이 자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삶을 포기하기를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는 자식을 사랑하기에 그의 삶이 그의 것이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지 않으면서도 가장 깊이 서로 엮이는 법이다. 이런 사랑을 받은 아이들이 ‘사랑이 많고 남을 잘 돌봐주는 사람으로’ 크는 법이다.

    ‘타인되기’와 ‘타인으로 대하기’

    (나)와 (다)의 공통점은 가족 구성원이 ‘대등한 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닫히지 않고 열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나)와 (다)에는 차이가 있다. 스스로 대등한 타인이 되는 것(나)과 대등한 타인으로 대하기(다). 이것은 가족관계의 독특함에서 나오는 두 가지 대안이다. 보살핌을 받는 처지(자식ㆍ아내ㆍ나이든 부모)라면 대등한 타인이고자 해야 하고, 보살피는 쪽(부모ㆍ남편ㆍ장성한 자식)이라면 대등한 타인으로 대해야 한다.

    가족, 가장 소중한 선물

    가족은 내가 세상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그 선물은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쥐어준 것이 아니다. 함께 만든 것이면서, 지금도 함께 만들고 있고, 나아가 앞으로도 늘 함께 만들어 가야 할 선물이다. 한마디로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인 셈이다.

    이 선물은 그 자체로 이 세상에도 선물이다. 대등한 타인으로 대하는 것은 그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그가 맺는 관계’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세상과 풍성한 관계를 맺는 열린 공동체야말로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아니고 무엇이겠나!

    결국 가족은 내가 받은 소중한 선물이면서 동시에 내가 내놓을 가장 큰 선물이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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