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도상국적 진보, 이제 버려야
    사회민주주의와 한국 경제의 재구성(1)
        2015년 01월 13일 05:08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한국 자본주의의에 대해 비정상성, 봉건성, 전근대성으로 접근하고 그 정상화를 지향하는 것이 진보의 이념적 지향이어서는 안되며, 자본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계급모순과 갈등, 빈부격차 등을 그대로 직시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위원장의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3차례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

    한국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도, 약소국도 아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14년 말에 2만7천 달러를 넘었으며 내년에는 3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정부와 언론은 우리나라가 곧 ‘3050’ 그룹, 즉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이면서 동시에 인구 규모가 5천만 명이 넘는 나라들에 속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구가 5천만 명 넘으면서 동시에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6개국뿐인데 여기에 한국이 합류할 경우 7개국으로 늘어난다.

    한국의 종합적인 과학기술 능력은 세계 7위권이다. 특히 국내총생산(GDP) 대비 과학기술(R&D) 투자액의 비율은 4.36%(2012년)로 세계 1위이며 세계 2위인 스웨덴의 4%보다 높다. 기업 부문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비 비율에서도 한국은 3.4%로 세계 1위이다. 예컨대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차가 생산하는 제품들의 기술 및 품질 수준은 이미 글로벌 선진업체의 그것과 비등해졌거나 어떤 영역에서는 더 앞서고 있다.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 9위권이다. 세계 106개국의 무기와 병력, 국방비 등을 평가하는 웹사이트인 글로벌 파이어 파워(Global Fire Power)는 세계 군사력 순위에서 한국을 세계 9위로 평가했다.(http://www.globalfirepower.com/countries-listing.asp)

    중국 사회과학원은 2006년에 이어 2012년에도 한국의 종합 국력을 세계 9위로 평가했다. 또한 그 동안 ‘선진화’ 담론을 이끌어온 한국의 한반도선진화재단 역시 올해 초 한국의 종합 국력을 세계 9위로 평가했다. 즉 한국은 미국과 중국, 일본, 인도,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이어 세계 9위의 강국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유럽의 이탈리아, 북미의 캐나다의 국력이 한국의 그것보다 낮게 평가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와 캐나다는 그간 서방 7개국(G7)의 일원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 행세를 해왔다.

    전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한국은 이제 G10이라 불러도 될 만한 강국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국을 약소국으로, 개발도상국으로 여기는 사고 관습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먼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의 4대 강국인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가 세계 최강국에 속한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에 비할 때 한국은 경제력 또는 군사력 등에서 열위이다.

    자동차

    한국 한 자동차공장의 모습 자료사진

    하지만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끝이 아닌 서유럽의 한가운데 속한다고 상상해보자.

    서유럽에 인구가 5천만 명이 넘는 나라는 영국(6천만)과 프랑스(6천만), 독일(8천만), 이탈리아(6천만) 뿐이다. 스페인(3천만), 네덜란드(2천만), 스웨덴(1천만) 등이 있지만 모두 인구수에서 한국보다 적다. 물론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서유럽 평균(4만 달러)보다 아직 적다.

    하지만 인구수와 그에 따른 경제력의 전체적 규모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마치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아직 7600 달러(2014년)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강대국 취급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만약 인구 규모와 함께 전체적 경제력과 과학기술능력, 군사력 등을 감안할 때, 한국은 서유럽에서 이탈리아를 제치고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 이은 4대 강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개발도상국적 진보사상, ‘민족 민주주의+자유주의’를 이제는 버리자

    이제 한국은 세계 7대 자본주의 강국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진보는 이러한 명명백백한 사실에 상응하여 자신의 사고방식을 새롭게 일신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한국을 전근대적 사회 또는 (신)식민지 반(半)봉건 사회로 보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한국은 근대화와 공업화, 즉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공업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나라에 속한다. 그것은 매판적 또는 종속적(예속적) 산업화가 아니라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산업화였고, 그 결과 자립적인 한국 자본주의가 세계시장에 등장하였다.

    오늘날 세계인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족 자본’(national capital)으로서 삼성과 현대, LG와 SK 등 재벌계 대기업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 경제에 있어 민족주의(nationalism)의 과제는 자본주의자들(capitalists)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자본주의적 민족주의(capitalistic nationalism)가 성공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세계 시장에서 ‘자본주의적 민족’으로서의 한국인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문화적으로는 한류(韓流) 열풍이다.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한류 자체가 상업적(자본주의적) 기획사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한류의 내용 역시 매우 현대적=자본주의적=물질적으로 바뀐 한국적=민족적 문화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훨씬 근대화 (즉 자본주의적 산업화, 특히 자립적 산업화)가 덜 된 태국 또는 필립핀에 가서, 한류 드라마에 등장하는 현대적 한국인의 삶(주로 한국 부유층의 삶에 관한 것인데)을 동경하는 그곳 사람들에게 “한국은 전근대 사회이다. 한국을 지배하는 하는 삼성그룹 역시 전근대적, 봉건적 기업이다. 게다가 삼성과 현대그룹은 ‘신식민지 매판’ 자본(즉 미국 또는 일본 자본의 앞잡이)이다”라고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한류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국이 ‘전근대 국가’라면, 태국과 필립핀은 미개 국가라도 된단 말인가? 그런 말을 듣는 태국과 필립핀 사람들은 아마도 모멸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그렇게 말하는 한국인을 자기 나라의 ‘치부’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치부할 것이다.

    빈부격차와 계급갈등 심화,
    아직 덜 근대화되서, 아직 자본주의가 덜 성숙되었기 때문?

    모든 통계는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에 이르는 25년간 우리나라에서 부자와 빈자간의 격차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고 특히 1998년 이후부터는 그것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자유주의자들(개혁적, 진보적)은 빈부격차 심화의 원인이 여전히 덜 완성된 근대화, 즉 덜 완성된 자유주의 개혁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여전히 한국경제에는 과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의 중상주의(mercantilism)의 유산인 재벌그룹 체제와 관료주의(모피아)의 지배력이 유지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빈부격차와 갑을 관계 같은 온갖 경제사회적 대립과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벌(그룹) 개혁과 모피아 타파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수행하는 것이 한국 경제의 현재 발전 단계 (즉 ‘전근대적’ 단계)에 상응하는 진보적 과제이다.

    정치적으로는 민족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고전적-개혁적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평등적 자유주의) 입장에 서있는 이들 논자들은 한국 경제와 한국 사회를 여전히 근대화-합리화-시장화가 덜 된 사회로, 한마디로 말해 자본주의화가 덜 된 사회로 보며, 따라서 진보 진영의 과제는 ‘합리적 시장’(즉 시장 자유주의)의 원리를 더욱 강화하는 개혁, 즉 자본주의를 더욱 자본주의답게 만드는 개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깨끗하고 투명한 자본주의, 착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이들이 꿈꾸는 이상적 진보이다.

    자본주의적 착취와 특권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기본적 갈등 구조(기본 모순)를 ‘천박한 자본주의’(재벌+모피아) vs ‘건전-깨끗-투명-착한 자본주의’ 사이의 대립으로 사고하는 자유주의적 진보의 구상과 기획은 무엇을 낳았던가? 그들의 구상과 기획은 실제로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 치하에서 모두 다 실시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 진행된 ‘시장 개혁’(즉 건전하고 깨끗하며 투명한 시장 자본주의화)의 결과로서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졌다. ‘착한 자본주의’라는 미명 하에 자본주의다운 자본주의, 즉 노골적인 이윤 추구와 금융투기, 저임금 비정규직 고용과 청장년 실직자들의 증가, 빈곤층의 증가와 같은 전형적인 ‘시장 자본주의’적 현상들이 사방에 나타났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답게 될수록 인간과 자연을 더욱 착취한다는 것, 그리하여 빈부격차와 환경파괴가 심화된다는 것은 언제나 올바른 진리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목격되는 빈부격차 심화의 배경에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의 심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하게 자본주의적 착취이다. 자본주의 그 자체(그것이 비록 한국적-민족적 자본주의라 할지라도)를, 그것의 본질인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비판하는 관점에 서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이 나라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낼 수 없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말해주는 것 – ‘선진화’ 담론은 끝났다

    피케티가 쓴 <21세기의 자본>이 다루는 대상은 미국과 독일, 프랑스와 스웨덴 같은 선진국들이다. 그런데 그는 그 책에서 20세기 후반부터 선진국들에서 빈부격차가 다시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가난한 개발도상국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선진국들에서 빈부격차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보다 훨씬 투명하고 건전하고 합리적이며 부유한 자본주의의 대명사인 서구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자유주의적 선진화’ 또는 ‘정상 국가화’ 담론이 이 나라 진보의 담론으로서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폐해와 대립의 원천을 한국 자본주의의 불투명성과 비합리성, 불건전성에 두면서 그러한 비정상성(abnormality)을 시정하는 ‘정상 국가화’ 또는 ‘정상 자본주의화’를 통해 한국 사회와 한국 경제를 진보적 방향으로 개혁할 수 있다고 믿는 자유주의적(liberal) 담론이 이제는 시대착오적으로 들린다는 점이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개발도상국이기 때문에 (즉 아직까지 재벌과 모피아 같은 ‘전근대적’(?) 중상주의 체제가 온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신)자유주의의 원리, 즉 시장 자본주의의 원리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관철되고 있으며, 그 결과의 하나가 바로 빈부격차 심화이다.

    한국은 G10에 속하는 강국이며, 선진국 초입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것과 함께 빈부격차와 계급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화’와 함께 빈부격차가, 착취가 심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 방안은 자본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전근대적 특권이냐 현대적=자본주의적 특권이냐?

    우리가 매일 매일 보는 TV 드라마와 사건·사고 뉴스에서 목격하는 온갖 가족간 불화와 사회적 출동은 어느 라인(line)을 따라 발생하고 있는? 다시 말해서, 한국 사회를 앞으로 크게 뒤흔들 대지진은 앞으로 어떤 지진 선(폴트라인: fault lines)을 따라 진행될 것인가?

    우리나라 진보 진영 내에 깊숙히 침투한 진보적 자유주의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것은 ‘전근대적’ 특권 세력(즉 재벌과 모피아, 그리고 토건족)과 근대화 세력(중소자본, 영세기업주, 서민) 간에 벌어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이 제시하는 특권층 해소의 해법은 자유주의적 내용의 개혁 즉 ‘시장 개혁’(market reform)이다. 즉 시장 원리(market principles)를 더욱 강화하는 ‘시장 자본주의화’가 그들이 제시하는 ‘진보적’(?) 해법이다. 전형적인 자유주의(liberalism)의 세계관이다.

    장보리

    하지만 <왔다 장보리>와 <출생의 비밀>, <밀회> 같은 TV 드라마에 묘사되는 한국 사회 특권층이 과연 ‘전근대적 재벌 오너 패밀리들’과 ‘전근대적 국가관료들’이란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가족적, 사회적 불화와 대립의 전선은 국민의 0.001%도 되지 않는, 한줌도 안되는 숫자의 전근대적 재벌과 모피아 특권 세력과 나머지 사회 계급·계층 전체 사이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경제적 사회적 특권 세력은 곳곳에 존재한다. 성공한 중소·중견기업가와 벤처기업가들, 성공한 부동산·주식 재테크 투자자들, 그리고 교수와 언론인, 연예인으로서 성공한 이들 역시 스스로를 특별한 신분으로, 부유한 신분으로 의식하고 행동한다.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에서 승진한 386 세대 역시 일종의 특권적 신분으로 세상 사람들은 바라본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또는 좋은 소득을 가지고 그 재산이 10억, 20억이 넘는 10% 또는 20%의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80% 또는 90%간의 사람들 간에는 점점 더 넘지 못할 벽이 세워지고 있다.

    양자 간에는 더 이상 신분 이동(신분 상승 또는 신분 하락)이 일어나지 않는다. ‘출생의 비밀’ 말고는 달리 신분 상승이 불가능하다. 이것이 현재 TV 드라마에서 묘사되고 매일 매일의 뉴스에서 보도되는 온갖 불화와 충돌, 범죄의 모습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임박한 대지진의 지진선(fault line)이다 .

    그 대립 전선은 전근대 대 근대의 대립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자본주의적인 전선이며, 더구나 시장 자본주의(market capitalism)가 매일 매 순간마다 더욱 더 그 간격을 넓히고 있는 대립 선이다. 이제 문제시되는 것은 전근대적 특권이 아니라 매우 자본주의적인 특권이다.

    노동과 자본 간의 ‘특수 대립’을 넘어, 가진 자들과 못가진 자들 간의 ‘일반 대립’

    자본주의적 특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치 전선을 많은 이들은 자본 대 노동 간의 대립 전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간의 대립 전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를 협소하게 만든다.

    자본가계급이란 누구인가? 노동자계급이란 누구인가? 과연 펀드 매니저와 재테크 개미투자자들(여기에는 민주노총 조합원들도 포함되는데)을 자본가계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연봉 7천만원~1억의 현장 노동자 및 은행 직원과 연봉 1천5백~3천만 원의 비정규직 또는 영세기업 노동자들이 서로 하나의 연대의식을 가지면서 ‘우리는 하나의 노동계급’이라고 느끼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충돌과 갈등의 선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라는 협소한 경제적 개념으로 환원할 수 없다. 훨씬 더 넓은 개념, 넓은 프레임으로 이해해야 한다.

    주로 직장 내에서의 기업주/경영자 대 직원/노동자 간의 대립으로 파악되는 자본-노동간 계급 대립 프레임은 취업자들의 고용관계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에서는 미취업 청장년과 노인들, 여성들이 넘쳐난다. 하도급 업체로 위장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도 넘쳐난다. 정리해고와 명퇴 등으로 인하여 노동자 계급에서 이탈한, 하지만 노동자계급보다도 가난한 영세자영업자들도 넘쳐난다. 반면에 부동산·주식 재테크에 성공한 월급쟁이들(노동자계급)도 많으며 아예 직장(즉 노동자계급 지위)을 내던지고 부동산·주식 재테크에 전업적으로 나서는 자들도 많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 그리고 선진국들에서도 – 벌어지는 계급적 갈등과 대립을 파악하는 보다 넓은 개념과 프레임이 있다. 바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대립 전선이라는 프랑스어이다. 프랑스 사람인 토마 피케티가 자신의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을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이 아니라 일종의 ‘자산’ 개념으로서 이해한 것은 ‘자본가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 오늘날의 21세기 자본주의를 이끌고 있다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주의의 시대에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의 대립이라는 말이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를 포함한 금융자본주의 시대, 재테크 자본주의의 시대에 일어나는 계급간 대립 전선은 부르주아(유산자)와 프롤레타리아(무산자)간에 형성된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프레카리아트(불안정 프롤레타리아)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에는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이 학문적으로도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노자 대립이라는 용어와 프레임보다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간의 대립이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를 설명하는 더욱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계급 개념임을 보여준다.

    금융자본주의, 재테크 자본주의 시대에는 자본(capital)이 아니라 자산(property)의 소유 유무가 인간적, 사회적 차별의 근원이 된다. 그리고 자산에는 부동산과 유가증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학력과 학벌 역시 상속되고 증여된다. 공교육을 무너뜨리고 자신들만의 사립학교와 자사고 특권을 만든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부와 재산을 학력과 학벌을 통해 상속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에 해당되는 우리말이 있다. 바로 ‘가진 자들’(또는 ‘있는 놈들’)과 ‘못 가진 자들’(또는 ‘없는 놈들’)이다. 그리고 (재벌과 모피아만 아니라) 모든 가진 자들은 자신의 부와 소득, 학력을 상속하기 위해, 즉 자신의 계급적 특권을 대대손손 물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것이 『왔다 장보리』를 비롯한 모든 인기 TV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사회적, 가정적 대립과 갈등의 소재들이다.

    유산자는 자신의 유산자 지위를 유지하고자 분투하면서 행여 자신의 자식들이 무산자 지위로 추락할까 두려워한다. 반면에 다른 방법으로는 신분 상승이 힘든 무산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생의 비밀 위조를 포함하여) 유산자 지위로 상승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원문 링크> <계속>

    필자소개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사민저널 편집기획위원장. '쾌도난마' 공저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