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선대원군의 빛과 그림자
    [조선생의 역사이야기] 권력 집착하며 추한 몰락
        2012년 07월 10일 06:4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오늘은 대원군에 대해 정리해봅시다.

    아시다시피 대원군은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아버지로서 사실상 권력을 잡고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일 참 많이 했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열심히 밑줄치고 외우는 항목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지요.

    양반 유림의 기반이었던 서원을 철폐하고, 비변사를 없애고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삼군부를 설치하고, 양반도 군포를 내는 호포제를 실시하고, 최고의 백성 수탈 통로였던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하고, 세금 안내려는 지주들 혼내주고 국가 재정을 탄탄히 하기 위하여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통치 규범을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회통]을 편찬하고, 그리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경복궁을 다시 짓는 등등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원군의 개혁 조치는 안동김씨 등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조선을 정상화시켜놓았다는 점에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영조가 52년간, 정조가 24년간 왕을 하면서 그토록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일의 열배의 성과를 단 10년만에 이루었습니다. 대단하지요? 이게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 왜 그 이전에는 이게 불가능했던 것인지…저도 참 궁금합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당시의 국제 정세가 조선이 정상화되는 것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정상적인 왕조국가도 서양세력의 침략에 휙휙 쓰러지는 판에 200년 정도의 붕당정치와 60여년간의 세도 정치 직후 10년간 개혁으로는 선진적이면서 동시에 침략적인 서양세력에 대응하기에는 택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으로 말하면 중 2 여름에 ‘임진왜란’이라는 사고 한번 치고나서 공부를 내내 안하다가 중3 1학기 기말고사 때 쯤에 한 일주일 공부 열심히 한 셈이지요. 덕분에 중3 1학기 기말고사 성적은 좀 괜찮았습니다마는, 그 이후에는 왜 다시 도루묵이 되는지… 오늘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알아봅시다.

    제가 오늘 하고자 하는 대원군 이야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미양요의 원인이 된 제너럴셔먼 호 사건 때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민비가 죽을 때 대원군은 뭘 했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 때로 돌아가 봅시다.

    제너럴 셔먼호의 틈새 시장 치고 빠지기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는 장사하러 청나라 텐진에 갔는데, 장사가 신통치 않자 조선에라도 가서 팔아볼까 하고 조선을 기웃거립니다. 그런데 대원군의 입장이 하도 강경해서 한양에는 들어가기도 어렵겠고, 대동강을 타고 평양으로 들어갑니다.

    평양은 중국 사신들이 들어오는 길목이고 청이나 서양의 수입품이 많던 곳이니, 제법 선택을 잘 한 셈입니다. 외교 관계도 없는 마당에 복잡한 절차 다 빼고 며칠 홀라당 팔아먹고 나오면 돈벌이가 될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틈새 시장을 파고드는 것도 같고, 치고 빠지기 작전으로도 보입니다.

    그러나 평양의 분위기는 싸늘했습니다. 이미 1840년에 제1차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에게 얻어맞고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말로만 개방이었지 별 실효가 없자 1860년에는 제2차 아편전쟁이 나서 청의 수도인 베이징이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하마터면 청이 망할 뻔 했다는 소문은 조선에도 쫘-하니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동강을 타고 말로만 듣던 이양선, 흑선이라고도 했던, 쇠로 만든 시꺼먼 어마어마한 서양 배가 평양에 왔으니 평양 백성들이 엄청 놀래기도 하고 겁도 먹었겠지요. 지금 우리로 말하면 외국의 항공모함이 노량진이나 영등포에 와 있거나, 우리 학교 운동장에 UFO가 와서 듣도 보도 못한 물건들을 팔겠다는 셈입니다.

    당연히 평안감사 박규수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평양의 관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감시하였는데, 오히려 가까이 간 평양의 장교가 붙잡혔습니다. 우리 편이 잡히자 총과 화살을 쏘아댔는데 제너럴 셔먼호에서는 대포를 쏘면서 반격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양의 군인과 민간인 일곱명이 죽었습니다. 이러니 무슨 물건을 팔겠어요?

    1600년 후에 재현된 적벽대전

    물건을 못팔고 돌아갔으면 그만인데, 더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서 강물 수량이 줄고 수위가 낮아져서 그 큰 제너럴 셔먼호가 강 바닥에 주저 앉은 것입니다. 이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1866년 최초로 조선과 충돌했던 서양 증기 군함 제너럴 셔먼 호

    평양에서는 이 상황에서 나름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냅니다. 땔감을 운반하는 배 수십척에 땔감과 송진을 잔뜩 싣고 불을 붙여 떠내려 보내는 화공을 취한 것입니다. 이건 적벽대전의 재현이라고나 할까요? 적벽대전이 208년이었으니 그로부터 1600년 넘게 지난 후에 조선에서 서양의 이양선에 맞서는 적벽대전이 재현된 것입니다. 이거 누가 영화로 한 번 만들어 볼래요? 제너럴 셔먼호의 내부 사정부터 대동강에 오게 된 과정과 평양 군민의 반응, 이들 간의 오해와 억측, 얍삽한 아이디어가 더 크 화를 불러오고, 서양이 얕잡아보는 조선이 구식 화공전법으로 이양선을 불태우고, 그 이후의 대원군의 대응 과정까지요…

    허락도 없이 들어와 물건을 팔겠다고 강짜를 부리고, 우리 군 장교를 잡아가고, 대포를 쏘아 평양 군인과 백성들이 죽었는데, 그 이양선을 불태우고 거기 탔던 외국인 24명이 모두 죽었으니, 우리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박수치면 끝나는 걸까요? 여러분이 평안감사 박규수라면 어땠겠습니까?

    이미 청이 1840년에 영국에게 난징에서 당하고,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게 베이징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도록 얻어 맞았는데, 감히 조선이 서양을 건드린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는 제너럴 셔먼호가 미국 배가 아니라 영국 배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통역이었던 토마스라는 사람이 영국 사람이었는데, 복잡한 사정으로 어쨌든 조선에서는 영국 배로 알고 있었습니다. 결론은 뭐겠어요? 이제 조선이 작살날 차례구나… 하는 겁니다.

    박규수는 얼른 대원군에게 보고합니다. 이러저러해서 저리이리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양선이 침범하였는데 제대로 막지 못하였고, 우리 장교까지 억류당하는 수치를 당하였으며, 군인과 백성 일곱명이 죽게 되었으니, 신은 황공하기 그지없어 벌을 기다릴 뿐입니다.”라고요.

    믿음직스러운 대원군

    여러분이 대원군이라면 뭐라고 답을 하겠습니까? 잘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큰 사고를 쳤습니다. 이제 영국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지요? 더구나 그 당시는 병인박해 직후로 프랑스가 쳐들어온다고 난리치고 있던 때입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다고 혼내면, 그동안 서양 놈들과 놀지 말라는 자기 말은 뭐가 되겠습니까?

    대원군은 “잘했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싸워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고 진급을 시키고, 잡혀간 장교에게도 서양 놈들의 책임이 더 크다면서 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대원군이 쓸만하다, 괜찮은 사람이다 싶습니다.

    여러분! 이러기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동생더러 뭐 심부름 시켜놓고, 기껏 동생이 심부름하다가 뭐 깨뜨려먹거나 하면 어떻게 합니까? 오히려 동생한테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느냐?”며 타박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당시는 동생 탓하며 넘어갈 지 몰라도, 다음부터는 동생이 심부름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그런데 대원군은 잘했다고 칭찬하고 그 이후의 책임을 스스로 감당합니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비가 권력을 잡고 있었을 때,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방곡령을 내렸을 때, 일본은 난리를 치며 손해를 배상하고 조병식을 관직에서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그 때 민비는 조병식을 3등급 감봉 처분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후부터 조선의 관리들이 민비 눈치를 보겠습니까? 일본 눈치를 보겠습니까? 조선을 위해 몸을 바쳐 충성을 하겠습니까?

    어쨌든 일단 “잘했다”고 한 뒤에 대원군은 어떻게 했을까요? 제 추측인데 대원군은 “일체 비밀에 부쳐라”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당시 핸드폰은 물론 전보조차 없던 때입니다. 일단 시간을 버는 거지요. 실제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가 소식이 끊기자,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2-3년 이후에야 조선 대동강에서 불 탄 사실을 알아냅니다. 그래서 조선에 따졌지요.

    그런데 조선은 천연덕스럽게 오리발을 내밉니다. “영국 배가 들어와 저 혼자 불 탄 적은 있다”라고요… 그래서 제너럴 셔먼호가 불탄 것은 1866년인데, 막상 신미양요가 일어난 것은 1871년이 되는 것입니다.

    증기기관을 만들라!

    그보다 놀라운 대원군은 대응책은 마지막입니다. “제너럴 셔먼 호를 한강으로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양선을 분해 조립해서 우리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지요. 곰곰 생각해보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지요? 그러나 대원군이 서양과 놀지말라고 했고, 흔히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고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 놀라운 일입니다.

    다시 돌아볼까요? 영국으로 파악된 이양선을 불태우고 난 뒤, 대원군의 대응책은 첫째, 잘했다고 칭찬하고, 둘째, 이 사실을 외국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셋째, 이양선을 분해조립해 우리도 증기선을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대원군의 부하였다면 이런 대응책에 대하여 어떤 느낌이었겠습니까? 막연히 칭찬만 하거나 막연히 혼만 내는 것보다 훨씬 믿음이 가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정말 이양선은 우리 힘으로 복제되었을까요? 여기 이 기록을 한번 들어보세요. 문일평이라는 민족사학자가 쓴 “대미관계오십년사”라고, [호암전집]에 실린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때 평안감사 박규수는 불에 타든 미선(米船)을 아삿스나 운용(運用)의 법을 아지못하여 위에 보고하는 동시에 그 파선(破船)을 끌어 한강까지 보내었다. 대원군은 기교로 유명한 김기두 등으로 하여금 그 선제(船制)를 모방하여 철갑함 하나를 맨들게 한 바 그 운전법은 목탄을 피어 거기서 발하는 증기로써 기륜을 돌아가게 하였다. 그렇지만 선체는 무척 크고 무거우며 증기의 힘은 아주 미약하여 불을 암만 때고 물을 아무리 끓여도 움지기지 아니하였다. 부득이 그것을 뜯어 다시 지으니 그 비용이 수십만금이 들고 무고(武庫)의 동전이 이로 인해 왼통 없어지고 말았다. 대원군이 몸소 임하여 이번 새로 만든 배의 진수식을 거행할 새 탄화(炭火)를 피어 기륜을 돌아가게 하였으나 선행(船行)이 매우 느려서 한 시간에 겨우 십여보밖에 더 가지 못했다 한다.”

    양무서적을 이용한 부국강병

     비록 실패했지만, 최선을 다한 대원군의 호령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이 이양선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거다. 반드시 다시 만들어내라. 돈이며 사람이며 다 대주겠다. 못 만들어내면 너희가 혼날 줄 알아라. 국운이 달린 일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대원군은 1차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독려하며 무기고의 동전을 다 써가며 다시 만들라고 했습니다. 뭘요? 산업혁명의 시발인 바로 그 증기기관을 말입니다. 최고 통치자의 호령에 얼기설기 만들었지만 결국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강에 그냥 놔두기만 해도 1시간에 십여보는 그냥 떠내려가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대원군은 무식한 쇄국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청나라를 통하여 서양의 과학기술이 한문으로 쓰여진 [해국도지]라는 책으로 나와 있었고, 조선에서도 아마 이 책을 참고하여 만들었을 겁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병인양요 직후에 대원군은 증기로 움직이는 전투함 3척을 만들어 실전 배치하고, 수중 시한폭탄, 서양식 대포, 휴대용 박격포 등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당연히 청나라가 받아들인 서양 과학기술을 참고하여 만든 것들입니다.

    결국 한 척을 만들었건 세 척을 만들었건, 정말 성공했는데 힘이 달려서건 아니면 실패했는데 대원군이 무서워 성공한 것처럼만 보이게 했건 간에, 이 때 스스로 만든 증기기관은 조선의 실력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이 점이 저는 매우 아쉽습니다.

    이 때 성공했더라면 싶기도 하고, 대원군이 계속 집권하였어도 그렇게 쇄국으로 일관하지 않았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쉽게 대원군도 위정척사이고 이항로, 최익현 등 유림 양반들도 위정척사라고 분류하고 외우지만, 적어도 대원군은 청을 통하여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려 했다는 점에서 위정척사파의 양반들과는 구분이 됩니다.

    권력 상실 후, 이해할 수 없는 대원군의 행보

    한계는 있었지만 나름 최선을 다한 대원군이 권력을 잃은 후에는 참으로 한심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 국사책에는 대원군이 느닷없이 나왔다가 없어졌다가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1882년 구식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인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잠시 집권했다가 도망간 민비의 요청으로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대원군을 잡아갑니다. 왜 잡아갔지요?

    2년 뒤인 1884년 갑신정변 때, 혁신정강 14개조의 첫번째가 “청에 잡혀간 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는 것입니다.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한다는 건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가 일본을 등에 업고 개혁을 주도하려 했으니 청과 민비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한 것이려니 이해가 가지만, 이들이 대원군을 돌아오게 한다는 건 왜 걸었을까요?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 놈들과는 절대 놀지 말라고 한 사람인데요.

    민비에게 권력을 뺏기고 청에게 억류당한 대원군이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 때 이미 일본과 뭔가 통하고 있던 것일까요? 아니면 대원군의 인기를 노리고 일본과 개화당이 대원군의 의사와 무관하게 대원군을 이용한 걸까요?

    그리고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대원군은 고종 대신 자신의 서자인 이재선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발각되는데, 왕의 친아버지라는 이유로 덮고 넘어가게 됩니다. 대원군은 왜 자기 아들 고종 대신 또다른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했을까요?

    그리고 대원군은 동학농민운동 때 우리나라의 요청도 없었는데 들어온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하고 민시 세력을 쫓아냈을 때도 잠시 권력을 잡습니다. 어떻게요? 일본이 대원군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대원군도 쫓겨납니다.

    대원군은 단지 이용만 당한 걸까?

    대원군은 왜 이렇게 되는걸까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사 연구자들은 일본이 백성들에게 인기좋은 대원군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아요? 영국배로 알았던 제너럴 셔먼호가 불탔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칭찬하며 원칙을 지키고, 이 사실에 대해 비밀을 지키고 입을 다물라며 기만 전술도 쓰고, 제너럴 셔먼호를 갖다가 재생 복원 복제를 해보려고 시도할만큼 영민한 대원군이 말입니다.

    일본에게 이용당할 줄 모르고 얼굴 마담을 하라고 하면 하고, 이제 필요없으니 나가라 하면 나간걸까요? 아니면 일본에게 협박이라도 제대로 당한 걸까요? 협박을 당한거라면 왜 국사책에는 나오지 않지요?

    민비가 죽던 날, 대원군은 뭐했나?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대원군의 마지막 이야기가 있습니다. 민비가 시해당하던 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민비가 일본 사무라이들의 손에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객이 경복궁에 침입해 몰래 죽이고 도망갔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민비를 죽이고나서 다시 불태워 죽일 정도로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까요? 그보다 일본 애들이 어떻게 민비의 거처를 알고 그 복잡한 경복궁을 몰래 헤치고 다닐 수 있었을까요?

    명성황후 민비

    사실은 일본 낭인들과 함께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일본군 1개 대대 병력과 조선의 훈련대 소속 군인들이었습니다. 경복궁 문은 간단한 전투 끝에 열렸고, 민비가 죽은 것을 훈련대 대장 우범선이 확인까지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민비를 죽이러 일본 낭인들과 훈련대 소속 군인들이 경복궁을 진입하였을 때, 대원군은 가마에 타고 뒤따라 경복궁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 점을 들면서, 일본이 민비를 죽인 게 아니라 대원군이 민비를 제거하는 데 일본 사무라이를 고용한거다 라고 말합니다. 조선의 왕비가 죽었고, 거기에 일본 사람이 가담했으니 미안하고 안됐기는 하지만, 일본 정부에서 조선에 가 있는 일본 조폭들을 일일이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거지요. 그럼 일본군 1개 대대 병력도 개인적으로 갔단 말인가? 허 참…

    당시 상황의 전후 과정을 전반적으로 보면 일본이 죽인 게 맞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이기고 조선을 얻었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뚱 반도와 대만을 얻었는데, 랴오뚱 반도는 러시아 등 삼국간섭으로 되돌려주어야만 했고, 그나마 얻은 조선은 제 발로 걸어서 러시아 편에 붙었으니, 얼마나 열이 받았겠습니까?

    그렇다고 러시아와 당장 전쟁을 할 형편은 안되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누군가 손을 봐주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민비였습니다. 조선이 제 발로 러시아로 가 붙은 일의 중심에는 민비가 있었지요. 일본은 본보기로 민비를 죽이고 다시 조선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대원군은 단독으로 민비를 죽이고 권력을 잡을만한 세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의 지지는 높았지만, 자신을 따르는 세력이 없었습니다. 대원군이 단독으로 일을 벌이고 다만 일본 사무라이를 고용했다면, 을미개혁을 할 리도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주장은 거짓이고 정말 야비합니다.

    대원군이 착각한 것인가? 속은 것인가?

    그러나 일본이 그랬다고 해서 대원군이 면죄부를 받는 건 아닙니다. 대원군이 일본에 이용당한 것도 사실이고 대원군이 일본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도 사실이겠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의 적인 민비를 없앤 후에 둘은 다시 한번 대격돌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슬그머니 대원군이 내려오고 맙니다. ‘이건 뭐지?’

    대원군은 을미사변 직전 일본과 비밀 협상을 합니다. 여기서 일본은 대원군에게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는 궁내부 일은 일임하겠지만, 국정은 내각에 맡기고 일체 간여하지 말라고 요구하였고, 대원군은 이를 승낙합니다.

    대원군은 자신이 조선의 전권을 쥘 수 없고, 단지 궁궐 감독의 자리만 차지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한 것도 아닙니다. 일본이 자신의 며느리인 조선의 왕비를 죽이겠다는 데, 여기에 협조하고 나선 대원군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일단 궁내부 일만 맡으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 일본을 물리치겠다는 마음이었을까요? 차라리 그랬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 때의 대원군은 그런 정도의 야심까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일본과 부딪히면서 여러분이 외워야 할 사건이 뭔가 또 일어났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대원군은 그냥 민비를 죽이는 데 동조하고 협력하고 얼굴마담 역할을 하고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원칙, 권력 그리고 복수

    대원군의 원칙은 표면 상으로는 위정척사이고,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실질적으로는 서양의 과학기술도 배우려고 했습니다. 이런 원칙으로 비추어 보면 권력을 놓은 뒤의 행보는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임오군란 때 집권한 것은 청이 잡아가지만 않았어도 자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청에게 잡혀가기 직전 대원군은 민비의 개화정책을 모두 중단시킵니다.

    부인에게 꽉 잡힌 아들 고종을 좇아내고 서자인 이재선을 추대하여 권력을 잡으려고 한 것은, 좀 심하긴 하지만 권력을 잡아 원칙을 지켜보려고 했다고 봐줄 수도 있겠습니다.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를 장악하고 서울로 진격하려고 할 때 대원군과 연락이 되었다는 점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동학군을 밟으러 온 일본이 경복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허수아비로 세웠을 때, 이걸 그대로 따른 것은 너무하지 않나요? 대원군은 결국 동학이 진압되고나서 동학과 주고받던 편지들이 일본에게 들통나서 일본에게 쫓겨나고 맙니다. 이게 뭐야?

    을미사변 때의 대원군은 완전 추락 그 자체입니다. 권력을 못잡는 걸 뻔히 알면서도 민비 시해에 협조하게 됩니다. 이건 권력욕도 아니고 단지 복수심일 뿐입니다. 민비가 그토록 미웠던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왕비의 장인 세력이 세도정치의 통로가 되는 것을 알고서, 대원군은 몰락한 집안의 똑똑한 여자를 며느리로 구해왔습니다. 그리고 10년간 온갖 궂은 일 다하면서 조선을 어느정도 기틀을 잡아놓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왕권을 행사하게 되자, 며느리가 자신의 오빠 등 민씨 세력을 끌어들여 청을 등에 업고 권력을 좌지우지하니 얼마나 꼴사나왔을까요?

    이런 민비가 임오군란으로 물러난 것은 대원군이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겠고, 대원군 자신이 집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잡은 권력을 민비가 청나라에 요청하여 대원군을 홀랑 잡아게 하고 다시 민비가 재집권하게 되니, 뒤통수를 맞은 대원군에게는 철천지 원수가 되겠습니다.

    청나라가 대원군을 돌려보내려고 할 때도 민비는 그러면 안된다고 더 억류하고 있으라고 했으니 얼마나 미웠겠어요? 대원군이 청에서 조선으로 돌아오자 민비는 대원군의 측근 30여명을 온갖 죄목을 뒤집어씌워 한달 사이에 다 잡아죽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과 손을 잡나요? 그것도 일본에 이용당할 줄 알면서요?

    신라는 나당연합 이후에 나당전쟁을 벌였다.

    대원군이 이 당시에 신라 정도의 배짱만 있었어도 좋았겠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다 당나라의 땅이라고 하자, 나당전쟁을 벌입니다. 백제가 무너진 게 660년이고 고구려가 무너진 게 668년이고 나당전쟁이 끝난 게 676년이니, 16년간 전쟁을 치른 것입니다. 16년 간의 총력전을 벌인 끝에 신라는 겨우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신라도 당나라도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였지만, 공동의 적이 없어진 후, 양 측은 전쟁을 벌이게 되고, 신라는 최소한 처음 합의한 한반도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대원군의 행보를 당시의 신라에 대입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나라 도와 고구려 백제 무너뜨리고, 당나라가 신라도 당나라 땅이라고 하자 아무 말도 안하고 인정한 꼴입니다. 집권하였을 때 그 잘 나가던 대원군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정말 [대원군 일기]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누구와도 손잡는 대원군

    권력을 되찾기 위해 쿠데타도 꾸며보고, 구식 군인들도 이용해보고, 동학농민군도 이용해보던 대원군의 마지막은 권력도 못찾으면서 며느리 민비를 죽이는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칙은 오래 전에 잊어버리고, 권력도 못찾고, 복수만하고서, 일본에게 이용당하고 쓸쓸히 퇴장하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 같은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대원군이 젊어서는 패기에 찼는데, 권력의 맛을 들인 뒤에는 맛이 간 걸까요?

    여러분도 이제 곧 투표권이 주어집니다. 권력을 한 번 잡아 본 사람들이 어떻게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지 눈여겨 보고, 아, 대원군처럼 맛이 가고 있구나 하는 모양새가 보이면 바로 알아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크건 작건 권력을 잡아 실제로 무슨 일을 행하고 나면, 그 맛에 중독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수업의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크건 작건 지도자가 되어 원칙을 정하면, 스스로 끝까지 책임을 지자. 도중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도 당황하지 말고 기민하게 움직이고 구체적으로 판단해서 실제로 책임지자. 그게 언행일치라는 겁니다.

    삼군부를 두어 군사력을 강화하고, 실제로 프랑스와 미국이 쳐들어오자 정말로 싸워서 물리친 대원군과 비교해 보십시오, 청에게 복수한다고 북벌군을 길러 청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나 정벌(나선정벌)하던 송시열을 비교해 보십시오. 대원군의 노선에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대원군의 언행일치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권력에 눈 멀지 말자. 우리 같은 서민들은 큰 권력 잡을 일이 거의 없을테니, 권력에 눈 먼 사람들 감시라도 잘하자는 것입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본인이 권력을 잡았다고 느끼는 방식은 주위 사람들의 인정, 칭찬, 아부로 시작됩니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고 아부한다는 느낌이 들 때, 그래서 내 마음이 공중에 붕- 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은근 자랑하고 싶고 뻐기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내 마음대로 일이 안되어 화가 나는데 내가 화내는 게 주위 사람들에게 먹혀들어 갈 때, 내가 아니면 이 일이 되지 않는다는 자부심과 조바심이 강하게 들 때, 여러분! 대원군의 말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대원군의 빛과 그림자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필자소개
    한때 전교조 중앙에서 교선실장을 했었고 또 오랫동안 전교조 서울남부지회 지회장을 맡았다. 지긍은 영림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친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