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리는 기념하지만
    패배는 기억해야 한다
    [산하의 가전사] 참담한 쌍령전투 참패의 역사
        2015년 01월 08일 03:46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쌍령 전투라는 거 들어 봤냐? 아마 못들어 봤을 거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해도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으니 알 턱이 없을 거야.

    1637년 음력 1월 3일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에서 벌어진 우리 나라 전쟁 역사상 최악에 가까운 참패다. 워낙 전쟁이 많았고 이기고 지는 일이 흔했던 우리 역사지만 쌍령 전투만큼 참담하게 진 전투도 드물어.

    언젠가 얘기해 준 용인 광교산 전투는 일본군의 기습에 5만 대군이 무너져 내리기는 했지만 그 군대가 몰살당한 건 아니었어. 일본군 기록에도 “쫓아서 흩어 버렸다.”고 나올 정도로 줄행랑을 쳤다는 편이 맞을 거야.

    하지만 쌍령 전투는 전멸에 가까워. 그런데 그들은 적군에 의해 죽은 게 아니야. 무슨 얘기냐고? 들어봐.

    정충묘

    쌍령전투의 전사자들의 사당인 정충묘

    병자호란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조정은 팔도에 영을 내려 근왕병을 이끌고 집결하도록 하지. 근왕병이래야 농민들에게 창이나 활 들려 준 엉성한 부대였지만 어쨌건 팔도 감사와 병마 절도사들은 부랴부랴 관내의 장정들을 긁어모아 임금이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향해 행군했어.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병력이라면 역시 땅 넓고 인구도 많았던 경상도 병력이었지.

    경상도는 병영만 좌병영, 우병영 두 곳이 있었고 기록마다 많이 엇갈리긴 해도 최고 4만(연려실기술 기록), 못해도 2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걸로 추정돼. 전사한 지휘관들을 봐도 경주 출신에 백의종군한 무관 손종로, 남해안 의 창원부사 백선남, 안동 출신 선약해 등등 다양한 지역이 망라돼 있으니 거의 경상도 전지역에서 총출동한 것 같아.

    그들은 입에 단내나는 강행군을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를 거쳐 경기도에 진입한다. 경상 좌병사는 허완, 우병사는 민영. 머리 수는 그런 대로 채웠으니 나름의 자신감도 있었겠지.

    그런데 이 시기도 그렇지만 요즘도 쪽수는 전쟁의 기본이지 전부가 아니야. 임진왜란 이래 조선군 장수들이 가장 취약한 부분 중 하나는 정보전이었어. 척후병만 제대로 내보냈어도 범하지 않을 실수를 무시로 한 건 그 대표적인 예지. 여기서도 그랬어. 경상도군은 척후 한 번 내보내지 않고 쌍령에 이른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는 이미 조선군의 근왕병이 사방에서 몰려 온다는 것을 알았고 대책을 세워 두고 있었지. 남한산성을 포위한 ·10만 청군 가운데 일부가 쌍령으로 남하한다. 그런데 경상 좌병사 허완은 다음과 같은 인물이었어.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 사람들을 보면 질질 짜기부터 했다.”(연려실기술)

    그는 부대 배치를 이상하게 해. 진 외곽에 훈련이 덜 된 조총부대를 배치하고 그 다음에 정예 사수를, 그리고 창검으로 돌격해서 싸우는 살수 부대를 맨 후방에 배치한 거야. 이건 허완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심사였다고 봐야 할 것 같아.

    이에 까무라치게 놀란 부하 장수들이 항의하자 허완은 이렇게 대답한다. “안돼. 정예 사수들이 얼마 없지 않나.” 그럼 맨 앞의 초보 사수들은 뭐 화살받이 칼받이란 말인가.

    쌍령 앞을 흐르는 개천을 해자 삼아 목책을 둘렀는데 문제는 청나라 군대가 낮은 곳으로 돌격해 들어오지 않고 산등성이를 타고 남하해서 고지대로부터 짓쳐들어왔다는 거.

    상식적으로 낮은 곳 목책은 신경 써서 높게 쳤겠지만, 높은 지역의 목책은 허술했겠지? 북한산성 성벽이 그렇듯 말이야. 청나라군은 조선군의 허를 찔러서 고지대에서 조선군을 내리몰았어. 많은 수도 아니었어. 수백 명의 기병이었고 그 중에도 수십 명이 앞으로 나선 것이었지만 전방의 초보 사수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총을 난사해서 적에게 제대로 된 피해도 주지 못한 채 화약이 떨어져 버리고 말아. 애초에 화약 아낀다고 열 발 정도 쏠 화약만 지급을 했었거든. 옛날 가투할 때로 빗대면 1학년들이 화염병을 엉뚱한 데다 던져 버린 통에 정작 백골단 쳐들어올 때 빈손이었던 꼴을 상상하면 되겠다.

    몇몇 용감한 사람들이 앞에 나가서 활을 쏘며 독전했지만 이미 총알 사라진 쇠막대기의 무용함을 아는 군중은 격하게 흔들리지. 그들의 머리 위로 청나라군의 돌격이 시작된다. 경상 좌병사 휘하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기록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최악의 모습은 이랬어.

    조선군은 높은 데서부터 밀고 내려오는 청나라군에 쫓기면서 서로가 서로를 밟아 죽이게 돼. 목책을 넘어야 살 길이 보였으니 일시에 낮은 지대의 목책으로 몰렸고 그 중 힘 없는 자들은 넘어지고 힘 있는 자들은 그걸 짓밟고 목책에 매달렸지.

    낮은 쪽 목책은 당연히 높게 지어져 있었고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기어올랐어. 그런데 막상 올라서고 보니 목책 바깥 쪽은 또 까마득했어. 하지만 뒤돌아설 수도 없었던 게 꾸역꾸역 뒷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올라오고 있었거든.

    에라 내사 모르겠다. 병사들은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리지만 태반이 추락사하고 말아. 목책에 오르다가 밟혀 죽고 목책에서 뛰어내려 머리 깨지고 허리 부러져 죽은 시신들이 목책 안팎에 산처럼 쌓이고서야 살아남은 병사들이 그들을 디딤돌 삼고 계단 삼아 목책 넘어 도망갈 수 있었다니 참사도 이만하면 세계사적 참사야. “골짜기가 구릉이 되도록 시체가 쌓였다.”는 기록이고 보면…….

    청나라군도 내리몰다가 내리몰다가 기가 막혀 웃었을 것 같다. 까오리팡즈들 뭐냐……깔깔깔. 가장 볼썽사나운 건 경상좌병사 허완도 도망가다가…… 밟혀 죽었어. 어떻게 이런 인간이 병마절도사까지 됐을까. 이유는 인조반정 때문이었어. 별 볼일 없던 사람이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줄을 잡아 반짝 출세를 했던 거지.

    그 뒤를 이어 경상우병사 민영의 진영에게로 청군이 달려들었어. 민영의 부대는 그래도 허완의 부대보다는 나아서 정예 포수들이 일제 사격을 가해 청나라 군대를 움찔하게 했는데 여기서도 화약을 아낀다고 정예 포수들에게 딱 두 냥씩 (열 발 정도 쏠 수 있는)만 지급한 게 문제였지.

    처처에서 “화약 도고! 돌아삐겠다.” 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수령들이 나서서 다시 화약을 분배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그 화약 더미에 불꽃이 튀고 폭발을 일으켜 수십 명이 몰살하고 화약도 날아가고 말아. 그리고는 또 다시 시작된 도망과 압사의 연속. 경상도 해안가부터 태백산맥 줄기까지 경상도 방방골골에서 박박 긁어온 수만 명은 증발하고 말았어.

    척후병 하나 제대로 내보내지 않음으로써 적의 위치와 상황을 파악하는데 실패한 정보력의 부재, 훈련 안 된 군중을 머리 수 하나만 믿고 정예병 앞에 들이미는 우매함 (집회할 때도 가끔 보이지. 느닷없는 ‘청와대로 갑시다’ 부류) 그나마 있는 전력을 ‘지도부’ 사수를 위해 써 버리는 비겁한 아둔함, 지휘관 스스로 통제력을 상실하고 도망치다가 밟혀 죽는 참담함. 그리고 청나라 군이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수를 스스로 밟아 죽인 조선 병사들의 얼굴에 가득했던 비루함. 역사 교과서에 싣기도 싫을 만큼 황당한 참패를 그려낸 요소들이었지.

    사람들은 아픈 기억을 지우려고 해. 돌아보기도 싫은 기억은 아예 페인트칠을 해 버리지. 하지만 인생의 스승이 되는 건 즐거운 추억보다는 통한의 기억이 되게 마련이야. 틀린 문제에 부아가 치밀어 에이 생각 안해!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리면 그 문제를 또 틀리게 되지. 승리는 기념할 뿐이지만 패배는 기억해야 되는 이유일 거야.

    전쟁 얘기는 그래서 전쟁 얘기만은 아니게 돼. 우리 삶도 결국은 꼭 거창한 적은 아닐지라도 어떤 대상과의 투쟁의 연속이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지속이고 방해물과 고난과의 겨룸의 연장일 테니까. 쌍령은 정축년 쌍령에만 있지 않아.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