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자화된 시대의
    무기력한 '개인적 저항'
        2015년 01월 02일 05:1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저는 이번 신정을 앞두고 계속 여행을 다녔습니다. 며칠 전에 오랜만에 모스크바에 들르기도 했습니다. 며칠밖에 안되는 방문인지라 제 견문은 한계가 많지만, 한 가지 인상을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제가 만난 사람들의 세계관이 뚜렷하게 과거와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일단 “서방”과 “자본주의”에 대한 희망들이 많이 깨진 듯합니다. “민주적 서방”은 우크라이나에서 상당히 비민주적인 새 정권을 세우는 데 지원한 게 뚜렷하게 보였고, 또 6년 전에 고장이 난 자본주의가 여전히 그 모순덩어리로부터 전혀 벗어나지 못해 세계공황에 끝이 보이지 않는지라…

    몇년 전만 해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서방”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매우 드물었으며, 요구의 최대치는 “서구와 같은 합리적인 체제, 공명 선거, 푸틴 권위주의 퇴장” 정도이었지만, 이제는 그 정치사상적 순진성에 상당히 균열이 간 것 같습니다.

    2010년, 톨스토이 서거 100주년에 권위주의적이며 군사주의적 국가도, 자본주의를 선호하는 “지식인 사회”도 군대만큼이나 토지사유제 등을 혐오했던 러시아 문호에 대해서는 그 어떤 재조명을 하려는 시도도 없이 그 100주년을 묵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그 무관심을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어 참신했습니다. 확실히 “여론”이 움직이고 있어 점차적 급진화의 과정이 “저류”, “심층”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느낌이 들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사회의식이 점차 바뀌고 좌파에 훨씬 더 열려간다고 해도, 사회의 현실은 의식만큼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비판을 이제 서슴지 않지만, 여전히 그 비판자들이 현실적으로 바라는 것은 취직이든 이민이든 아니면 국가로부터의 복지혜택이든 개인적인 “체제에의 편입”이지, 체제와의 현실적 충돌을 대다수가 여전히 피할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지젝 등 “유행 속의 팝 좌파”에 심취할 수 있어도 이 개인적 취향은 현실적 삶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 거죠. 사회의 저항력은 여전히 대단히 낮은 수준에 있습니다. 급진좌파는 “셔클” 차원에서 존재한다 해도, 그 이상 나아가기에는 지반이 아직도 너무나 약하다는 거죠.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가요? 일면으로는 우리 집단의식은 우리 현실을 꽤나 정확히 반영합니다. <미생>의 장그래가 거의 “전국민의 캐릭터”가 되고 상징적 존재가 된 것을 보시죠. 대중문화 산업도 반응해야 할 정도로 “노동인구의 비정규직화는 대참사다”, “비정규직으로 나라가 망한다”, “이렇게 해서 민생이 다 망한다”는 의식이 많이 퍼진 셈입니다.

    미생과 카트

    <미생>과 <카트>의 장면

    아니면 최근의 유행작인 <카트>의 열풍을 보시죠. 현재 노동투쟁의 신주류인 비정규직 투쟁이 이미 대중문화 속의 “주요 주제”로 부상할 정도라면…신자유주의에 비판적 여론의 저류가 이미 어느 정도 형성됐다고 봐야 할 셈입니다.

    “진상고객”부터 “땅콩회항”은 “갑질”에 이어 갑오년의 유행어가 된 게 아닌가요? 그러니까 러시아가 “서방”과 “자본주의”에 실망했듯이, 대한민국도 “경쟁”의 신격화에 이미 나름 실망하여 광범위한 민중층 속에서 “따뜻한 사회”, “민생 챙기는 나라”에 대한 선호모드가 만들어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왜 러시아에서 대자본과 군벌, 안보꾼 등의 대표자라고 할 푸틴은 그 어떤 “국유화” 등의 정책 없이도 계속해서 80% 이상의 지지를 받을까요? 왜 한국에서 비정규직 투쟁의 편에 섰던 통진당의 깡패적인 “강제해산”은 그 어떤 대규모적인 격렬집회의 파도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까요?

    왜 그렇지 않아도 말도 안될 정도로 비정규직에 불리한 기존의 비정규직 관련의 법률을 더더욱더 개악시키려는 박근혜의 표독스러운 정권은 “저항의 해일”을 아직도 맞이하지 않았을까요? 왜 현실성이 강한 사회 의식과 너무나 타협적인 사회의 현실은 이 정도로 딴판일까요?

    저는 이게 준주변부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고 봅니다. 원자화된 사회에서는 사회의식은 아무리 좋게 진화돼도, 급진조직이 매우 미약한 상황에서는 “잠재적 저항층”의 대다수는 그저 개인 일상 속에 파묻혀 삽니다.

    “저항”을 시도해도 그저 개인적으로, 일상 속에서 피케티를 읽거나 페북에서 급진적 포스트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으로 “저항”을 연출해보는 것이지, 개인으로서 부담이 돼 일상에 방해될 수 있는 연대적인 집단행동을 가급적 삼가한다는 것입니다. 데모해도 죽거나 크게 다칠 시대는 지났지만, 일단 데모하게 되면 사진 채증돼 나중에 막연히 불리할 수도 있고, 또 잘못되면 벌금형 등이 내려질 수 있기에, “격렬집회”는 거의 과거 속으로 흘러간 셈입니다.

    모든 가용 자원들이 개인 생존을 위한 사투에 집중되는 개인 일상의 시대, 즉 자본주의 후기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이 이해관계도 불확실한 “타자”들과의 연대에 약간이라도 투자하려 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 개인의 정의감이 아무리 짓밟혀도, 이에 대한 반응을 집단저항보다 개인적 소비로 표출됩니다. 피케티를 읽고 <미생> 보고 장그래를 동정하고…이런 세대의 기준으로 세계를 재단하는 것은 바로 “포스트” 철학이기도 하죠. 패배 당한 1968년의 혁명 이후의 소비/일상의 세대의 커다란 자기변명은 바로 “포스트”에 해당됩니다.

    개인 일상으로의 회귀라는 우리 아노미는 전혀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기자본주의의 위기는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기에 언젠가는 조직과 집단행동의 시대도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피케티나 지젝의 독자 내지 <미생>의 시청자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문재인들의 “복지주의”적 궤변에 넘어가서 보수야당에 표를 던지는 것까지 아마도 “개인적 저항”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정말 답답한 겨울의 시대죠.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