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독’이란 이름의 13가지 몽타주
    [책소개] 『첨벙』(백수린 박솔뫼 외/ 한겨레출판)
        2014년 12월 27일 03: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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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주위에는 ‘휴대전화’, ‘게임’, ‘책’에 중독되고, ‘섹스’, ‘다이어트’, ‘만화 캐릭터’에 중독된, 그밖에 많은 것들에 중독된 사람들로 넘쳐난다. 바야흐로, 중독의 시대다.

    돌아보면, 예술가들도 다를 바 없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지독한 구강암 때문에 생전 30번이 넘는 수술을 해야 했음에도 담배를 끊지 못했고, 트루먼 커포티는 마약과 알코올에 빠진 채 살았으며, 너대니얼 호손은 숫자 64에 집착했고(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1864년에 죽었다), 찰스 부코우스키는 자신은 물론 소설 속 주인공(헨리 치나스키)마저 알코올중독자로 만들어버렸다.

    《첨벙》은 ‘중독’이라는 소재로 한겨레출판 문학웹진 〈한판〉에 1년여 동안 연재됐던 13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테마 소설집이다. 한국 문학을 이끌 젊은 소설가 13인(박솔뫼, 백수린, 송지현, 오한기, 윤민우, 이갑수, 이상우, 이주란, 정지돈, 조수경, 최정화, 최진영, 황현진)이 참여했다.

    중독(addiction)의 어원은 라틴어 addicere로 ‘~에 사로잡히다’, ‘~의 노예가 되다’라는 의미이다. 《첨벙》에 묶인 13편의 소설에도 무언가에 사로잡혔거나 마치 노예가 된 것처럼 집착적으로 그 행동을 반복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박솔뫼의 〈수영장〉에는 새벽이면 첨벙첨벙 처절하게 헤엄을 치는 ‘이애정’이란 여자애와, 그런 이애정의 헤엄을 지켜보는 ‘나’가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가며, 윤민우의 〈원피스〉에는 불현듯 다니던 미용실을 그만두고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가슴을 성형하고 같은 색 원피스를 사들이는 ‘그녀’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담원 ‘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조수경의 〈오아시스〉에는 과거 연인이었던 ‘불행’에 중독되어 결국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는 ‘그녀’와 ‘그녀’에 중독되어 마약중독자가 되어가는 ‘나’의 모습이 보여진다.

    하지만 《첨벙》 속 인물들이 중독에 빠진 채 허우적대는 나약한 인간 군상을 뜻하는 건 아니다. 외롭다거나 고독하다거나 나약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다른 것에는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는 사람들일 뿐이다.

    각 소설의 주인공들이 빠져 있는 중독이란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허상이기도 하지만 ‘나’를 찾고 싶어 벌이는 하나의 시도에 더 가깝다. 어쩌면 《첨벙》 속 인물들이 그리고 있는 건 ‘첨벙’ 하고 용기 내어 뛰어들었지만 ‘첨벙첨벙’ 소리만 클 뿐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 수영을 할 수밖에 없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몽타주인지도 모른다.

    첨벙

    우리는 왜 중독된 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

    한국 소설에 있어서 시대적으로 어떤 지배적인 양상이 있다면 지금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첨벙》의 소설들은 우리 모두가 무언가에 한 번은 중독되었거나 중독됐었다는 걸 인정하자고 말한다.

    이상우의 〈888〉에서 옆자리의 여자는 “우리는 중독됐지”라고 말하고, 〈오아시스〉에서 나는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중독되어 있었다”라고 고백한다.

    이 책은 중독의 양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왜 중독되었는지가 아니라 우리는 왜 중독된 채 계속 살아내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표를 응시한다. 중독의 핍진성을, 바로 그 현장을 바라본다. 그건 중독에 몸을 맡긴 ‘나’가 나를 “대신해서 살아주고 있다는”(〈888〉) 느낌을 주기 때문이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과는 다르게 살아온 만큼 살아야 한다고”(이주란의 〈참고인〉) 믿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들은 우리가 어떻게 초라하고 고독한 어른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변명하지 않는다. “나는 갇혔다”(최진영의 〈囚〉)고 말하고 “이런 일을 하게 될 줄 알았다면, 이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갑수의 〈아프라테르〉)이라고 속마음을 얘기한다. 자신이 초라하고 고독한 어른이란 걸 인정한다.

    어느 날 이들에게 “삶 속에 파마약처럼 배어 있는 불만들”(〈원피스〉)이 찾아오고, “비명 같은 위기감과 불안, 모멸감과 비참함”과 “더러운 과잉”(〈囚〉)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수치심 비슷한 것”(백수린의 〈높은 물때〉)이 찾아온다. 이들은 비로소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느끼며 그 충동이 “일시적이거나 단순하지”(〈원피스〉) 않다는 걸 깨닫는다.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들이 선택하는 건 중독에게로 자진해서 걸어가는 것이다. 《첨벙》 속 소설들에는 그런 변화의 시도가 ‘진짜 나’ 혹은 ‘다른 나’로 표현된다. 그리고 소설 속 ‘나’들은 이대로 계속 첨벙대다 보면, 우리는 정말 ‘다른 나’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시도들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참고인〉에서는 “혹시 노력하면 언젠가 나는 지금과 다른 내가 될 수 있을까? 엄청난 노력을 하면? 그러니까…… 그러니까 도대체 어떤 노력?”이라고 수시로 되물으며, 결국 “진짜 나는 어디선가 되게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자위하고 만다.

    송지현의 〈흔한, 가정식 백반〉에서는 “이곳이 진짜 집이고 모두가 진짜 가족인 양” 느끼지만, 그럼에도 여성전용사우나가 진짜 집이 될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아프라테르〉에서처럼 ‘유미 누나’가 아니라 ‘아유미’에 만족해야 할 수도 있고, 오한기의 〈볼티모어의 벌목공들〉에서처럼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전설의 지의류 맨폴필드가 썩은 불가사리로 재현될 수도 있다.

    결국, 중독을 손에 쥐고 아무리 첨벙대더라도 우리는 ‘다른 나’ 혹은 ‘진짜 나’가 될 수 없다. 〈888〉에서처럼 “진짜를 향해 추락하는 비행기를 떠올”리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으며, 〈囚〉에서처럼 “누구 말이 진짜든 불행하긴 마찬가지지”라고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슬프게도 무언가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 그저 초라하고 고독한 삶 그 자체에 중독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오아시스〉에서처럼 자신의 불행에 혹은 타인의 불행에 중독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열세 개의 아침과 열세 개의 밤 그리고 무한대의 중독

    《첨벙》의 소설들은 타인의 불행을 지켜보는(혹은, 자신의 불행을 마주하는)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하기도 하지만, 불행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을 사로잡은 무엇에서 벗어나는 것은, 질려서가 아니라 너무 한다 싶어서이며, 중독은 벗어나거나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만두는 것이라고 말한다(하지만, 각 소설의 주인공들은 결코 그만두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내부에 기이한 열정이 있다는 것”과 “진짜 문제는 대상이 아니라 결국 ‘나’라는 것”(〈여행자들의 지침서〉)을 알고 있다. 불행(중독) 안에서 머무르는 것을 택하는 이들은 그런 선택이 뭔가 짜릿한 것을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황현진의 〈보다 그럼직한 자세〉에서 ‘나’가 엄마의 손을 이끌며 강에 죽은 새를 보러 가자고 말하는 장면이나 최정화의 〈홍로〉에서 그녀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50대의 허물을 마침내” 벗어던지는 장면은 ‘진짜 나’를 찾는 시도가 비로소 ‘나’를 찾는 시도로 바뀌고 있음을 말해준다.

    최진영의 〈囚〉에서 ‘나’가 정오의 갯벌에서 ‘ㅅㅏㄹㅁ’을 발견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놀랍다. ‘삶’으로 읽히는, 어쩌면 ‘사람’으로 읽힐지도 모르는 이 단어에서 우리는 어떤 이상한 기품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무한대의 중독에서 흘러나온 희망의 다른 이름임을 감지해낸다.

    13편의 소설은 중독의 한복판에서 혹은 가장자리에 서 있는 이들에게 그곳에서 나오라는 뻔한 이야기를 던지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며, 그건 우리의 일이며,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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