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게도 하늘게도 떳떳혀!”
    [책소개]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최현숙/ 이매진)
        2014년 12월 20일 11: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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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생아, 가정 파괴범, 밥도 못하는 여자, 신 내림, 불행한 결혼, 가정폭력의 굴레 속에 오늘도 이어지는 엄마 노동. 우리 곁의 비정상들을 서로 보듬으며 오늘도 여전히 행복하게 일하는 여자의 일생. 열다섯 웃는 여자들의 시시콜콜한 수다로 다시 읽는 한국 현대사, 그 두 번째 이야기!

    길을 찾는 여자들 ― 5210원짜리 바코드를 새긴 여자들의 비정상 대담

    허우적거리지 않으면 당장 한 달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5210원이라는 바코드를 몸에 박은 채 그런 한 달을 채워가는 하루하루가 평생 힘겨운 사람들이 만났다.

    정상 궤도를 벗어난 자기 삶이 맞닥뜨린 ‘막다른 골목’을 돌아보고, 다시 삶의 의지를 다잡게 해준 ‘가느다란 길’을 이야기한다.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이웃들을 만나 가난한 삶을 나누며 삶이라는 바다를 표류해온 ‘웃는 여자들’에게 가난은 어쩌면 가장 온당한 존재 방식이다. 평범한 을들, 우리 곁의 ‘비정상(非正常)’들이 남긴 삶의 자취는 역사가 된다.

    ‘15소녀 표류기’는 여성들의 목소리로 한국 현대사를 다시 읽는다. 평범한 여성들의 개인사를 묻고 들으면서 거대 서사 중심의 남성 역사에 짓눌린 목소리들을 발굴한다.

    20세기를 살아온 할머니 세대, 산업 사회의 역동을 지나온 5070 베이비부머 세대, ‘386세대’이던 40대, ‘88만원 세대’ 또는 ‘삼포 세대’로 분투하는 20~30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10대까지, 조금씩 시차를 두고 같은 시대를 달리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가 흐르고 겹치며 한국 사회라는 모자이크를 그린다.

    막다른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2013)에 이어 베이비부머 세대 여성들을 인터뷰한 최현숙은 ‘비정상의 나쁜 여자들’을 만나 각자의 인생을 재료로 우리 삶과 사회를 이야기한다. 너나없이 아줌마이자 엄마로 부른 그 여자들은 장기태(1941년생), 이기순(1946년생), 이윤숙(1959년생)이다.

    여자들의 일생 ―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 이야기하는 노동 연대기

    장기태는 1941년생이다. 경기도 안성군에서 천석꾼 담양 장씨 가문의 너른 품 아래 보낸 유복한 성장기는 스무 살을 넘기며 끝이 나고, 집안의 따듯한 보호 아래 일본 연수까지 다녀와 복장학원 강사로 시작해 전문직 여성으로 살려던 꿈은 남자 잘못 만난 탓에 어이없이 깨지고 만다.

    가정 파괴범이자 ‘사생아’의 엄마라는 사회의 낙인을 당당히 거부하지만 운명의 대물림을 안타까워하는 모성의 힘에 기대어 힘겨운 여자의 일생을 살아낸다.

    유부남에게 속아 ‘미혼모’가 된 장기태는 무자격 약사로 시작해 뜨개질, 하루 3000원 벌이 행상, 간호보조원, 일당 3000원짜리 ‘오지노깡’(하수도 토관) 공장, 월급 6만 원 받은 ‘일성양은공장’, 간호보조원, 신문 배달, 다방, 구멍가게, 간병을 거쳐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사생아, 가정 파괴범, 신여성, 육색칠색 잡년, 밥도 못하는 여자, 자유, 나쁜 여자, 착한 여자, 순결, 욕망, 여자의 일생, 선택, 책임이라는 단어들이 장기태의 삶을 관통하는 갈등과 경합의 의미망을 형성한다.

    1946년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사남 사녀의 장녀로 태어난 이기순의 삶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맏딸이자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무학의 여편네’가 신 내림을 거쳐 자기와 이웃을 구하는 무속인이 되는 한 편의 드라마다.

    학교 문턱만 밟은 살림 밑천 큰딸은 신내림굿을 한 친정어머니의 운명을 대물림한다. 속아서 한 결혼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가정 폭력과 고부 갈등을 거치며 어그러지고, 한때 자살도 생각했지만 빈손으로 상경해 과일 행상과 시장 좌판을 하고 포장마차를 열어 살림을 꾸렸다.

    신기가 드러난 뒤 입산과 기도 생활을 거쳐 신내림을 받고 법당을 열어 작두를 탔다. 지금도 요양 일을 하며 가끔 기도를 드린다. 요양 일이나 신 일이나 따지고 보면 세상 아픔을 보듬는 ‘어머니다움’이다. ‘부처님 마음’이고 ‘신령님 마음’이고 ‘하느님 마음’이고 다 같다는 이기순에게, 신들림은 해방의 계기가 된다.

    마지막 주인공은 ‘시급 5210원’이다. 1959년에 태어난 이윤숙은 또래의 다른 여성들에 견줘 좋은 조건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중상층의 소득 수준과 성 평등한 집안 분위기, 전문대 졸업 학력과 ‘잘 빠진’ 외모, ‘잘 나가던’ 직장에 화끈하고 활달한 성격을 갖췄지만, 아이엠에프 사태를 거치며 경제적으로 몰락한 남편을 대신해 두 아이를 키우며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월마트 고양점, 홈에버, 세이브존, 이마트, 킴스클럽, 롯데마트, 롯데슈퍼에서 판 오징어, 고등어, 떡갈비, 돈까스, 냉면, 또띠야, 치즈, 칫솔, 치약, 샤프란, 샴푸, 피존, 동그랑땡, 비엔나 소세지, 만두, 물만두, 제주 만두, 취영루 물만두, 시제이 물만두, 군만두, 풀무원 왕만두가 이윤숙의 노동 연대기를 채우는 말들이다.

    가내 부업에서 시작해 30대부터 50대까지 나이와 여건에 따라 유통, 청소, 식당, 사회 서비스, 돌봄 등 싸구려 ‘아줌마 노동’을 전전했다. 50대 중반인 지금 최저 임금, 시급, 임시직, 돌봄이 겹친 ‘노동’들이나 근로 기준법상 노동이 아닌 ‘일’들 사이를 반복해 오간다. 늘어나는 빚과 독립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덤이다.

    결혼 뒤 이윤숙의 삶이 그린 궤적은 중하위 계층 여성 베이비부머 세대의 전형이다. 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에 더해 고혈압, 당뇨, 신경성 질환,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시급 5210원의 바코드를 몸에 박은 채 닥치는 대로 자기를 ‘투입하고 빼야’ 한다.

    일생 경로 재탐색 ― 시대의 우울에 맞서는 비정상들의 울력

    오르막과 내리막을 넘나들며 삶은 흘러왔다.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노동을 하고, 가부장제에 순종하라는 강요를 받으면서 어머니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 뼈 빠지게 살았다.

    장기태, 이기순, 이윤숙, 최현숙이 나눈 이야기는 헛된 욕심 없이 남의 것 빼앗지 않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이들의 가난이 이 시대의 가장 온당한 존재 방식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대의 우울을 온몸으로 받아 안아 삶의 경로를 재탐색하는 비정상들의 울력이다.

    각자의 내부에서 출발해 모이고 번지는 동병상련에 기댄 이심전심이고, 공감을 바탕 삼는 연대다. 이야기를 통해 이 여성들은 부계 사회의 일방적 피해자이자 수치스러운 비밀을 주홍 글자처럼 새긴 죄인이 아니라 여성 억압의 생존자이자 증언자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의 비판자이자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한 제안자로, 공동체의 책임을 묻는 제언자로 일어선다.

    이야기 사이에서 우리는 시대와 관습이 강요한 ‘막다른 골목’에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협상하며 삶의 전략을 세워온 ‘웃는 여자들’을 만난다. 이 ‘웃는 여자들’이 자기 삶을 돌아보고 재구성하는 ‘가느다란 길’을 따라가면 이 삶들이 기반을 둔 한국 사회의 뒷면을, 그 사회가 다 담아내지 못한 여성들의 욕망으로 그려낸 새로운 지도를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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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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