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망에 대한 태도
    개입, 반성 그리고 나아가기
    [논술에서 배운다-3] <페스트> 세 가지 유형의 인물
        2014년 12월 16일 12: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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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문제는 풀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얻는 게 많거든요. 길어서 복사해서 읽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페스트” 읽은 분들은 기억이 날 겁니다. 2000년도 서강대 문제인데, 어째 요즘 더 적절해보입니다.

    아 참, 논제가 요구한 ‘비판적으로 논술하라’는 건 무조건 다 씹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지하든 반대하든 자기 근거를 분명히 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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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때때로 극복하기 어려운 역경과 고통에 처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는 페스트로 인한 재난의 상황(제시문 A)에서 고통받는 오랑 시(市) 주민들의 사고와 행동이 나타난다. 제시문 (가), (나), (다)의 세 인물(기자 랑베르, 신부 파늘루, 의사 리유)이 각각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을 정리하고, 그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자신의 인생관과 관련지어 비판적으로 논술하라.

    (A) 며칠이 지나자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죽은 쥐들의 수는 날로 늘어만 갔다. 나흘째 되는 날부터 쥐들은 떼를 지어 거리에 나와 죽었다. 집안의 구석진 곳으로부터, 지하실로부터, 지하 창고로부터, 수챗구멍으로부터 쥐들은 떼를 지어 비틀거리면서 기어 나와서는 햇빛을 보면 어지러운지 휘청거리고, 제자리에서 맴을 돌다가 사람들 곁에 와서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밤이면 복도나 골목길에서 그놈들이 찍찍거리는 마지막 작은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중략)… 마치 건강한 사람의 짙은 피가 돌연 역류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여지껏 그렇게도 고요하기만 했다가 불과 며칠 사이에 발칵 뒤집혀 버린 이 자그마한 도시의 아연실색함이 어느 정도일 것인가를 상상만이라도 해 보라! …(중략)…

    갑자기 병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망자의 수가 다시 30명으로 늘어난 날, 리유는 전보 공문을 받았다. 전보에는 <페스트 사태를 선포하고 도시를 폐쇄하라.>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부터 페스트는 우리들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그 이상한 사건들로 인한 충격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오랑 시민들은 각자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맡은 자리에서 그럭저럭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 상태는 그대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오랑 시의 문들이 폐쇄되자 그들은 한 독 안에 든 쥐가 되었으며 거기에 그냥 적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령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같은 개인적인 감정도, 처음 몇 주일부터 당장 모든 사람들 전체의 감정이 되었고, 공포심이 가세하면서 저 오랜 귀양살이 시절의 주된 고통거리가 되었다.

    (가)

    랑베르는 몹시 흥분해서 말했다. 그는 파리에 아내를 두고 온 것이었다. 사실 정식 아내는 아니었지만 아내나 마찬가지였다. 시가 폐쇄되자 그는 곧 아내에게 전보를 쳤다. 처음에는 그저 일시적인 것이려니 하고 편지 왕래나 할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랑의 동료 기자들은 자기들로서는 아무 방도가 없다고 말했고, 우체국에서는 상대도 하지 않았고, 도청의 한 여자 서기는 그에게 콧방귀를 뀌었다. 마침내 그는 두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만사 순조로움. 곧 다시 봅시다.>라고 쓴 전보를 한 장 접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얼마 동안이나 이 사태가 계속될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개장을 갖고 있었으므로 도청의 비서실장과 접촉할 수 있었다(직업이 기자이고 보니 여러 가지 편의가 있었다). 자기는 오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일도 없고, 우연히 자기는 여기에 있게 되었고, 일단 나가서 격리 수용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쨌든 퇴거를 허가해 주는 일이 마땅하리라고 그에게 말했다. 비서실장은 이에 대해서, 잘 알아듣겠으나 예외를 만들 수는 없다, 검토는 해 보겠지만 요는 사태가 중대한 만큼 선뜻 어떤 결정도 내릴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랑베르는 말했다. “나는 이 도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마 그렇겠죠. 그러나 어쨌든 전염병이 오래 가지 않기를 피차에 바랄 뿐입니다.”

    결국 그는 랑베르를 위로하면서, 오랑에서 흥미 있는 기사거리를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슨 일이건 간에 잘 살펴보면 반드시 좋은 면이 있는 법이라고 말해 주었다. 랑베르는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다. 그들은 시가의 중심지에 도착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선생님. 저는 기사를 쓰려고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떤 여자하고 살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쪽이 더 어울리는 얘기가 아닙니까?”

    어쨌든 그쪽이 더 이치에 맞을 것 같아 보인다고 리유는 말했다. …(중략)…

    “이건 그야말로 인도적인 문제입니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이러한 이별이 어떤 건지를 아마 선생님께서는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리유는 금방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도 그걸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랑베르가 아내와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다시 결합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바이지만, 포고와 법률이 있고 페스트가 있으니, 자기의 역할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지요.” 입맛이 쓰다는 듯이 랑베르는 말했다. “선생은 이해하지 못해요. 선생님 말씀은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선생님은 추상적이십니다.” …(중략)…

    “아! 알겠어요.” 랑베르가 말했다. “공적인 일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러나 공공복지도 개개인의 행복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나)

    그 달 말경에, 우리 시의 고위 성직자 측에서는 집단 기도 주간을 설정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방법으로 페스트와 싸우기로 결정했다. 대중 신앙심의 표시가 담긴 이 행사는 일요일에 페스트에 걸렸던 성(聖) 루가에게 드리는 장엄한 미사로 끝맺기로 되어 있었다. 그 기회에 파늘루 신부는 강론을 위촉받았던 것이다. …(중략)…

    “오늘 페스트가 우리에게 닥쳐온 것은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이 벌벌 떠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주라는 거대한 곳간 속에서 가차 없는 재앙은 짚과 낟알을 가리기 위해서 인류라는 밀을 타작할 것입니다. 낟알보다는 짚이 더 많을 것이며, 선민들보다는 버림받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행은 하느님이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악과 타협해 왔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성스러운 자비 위에서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회개하는 것으로써 충분했고 모든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라면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가 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회개를 하고 싶은 심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는 가장 쉬운 길은 그냥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이요, 그 밖의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 해결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그 연민의 얼굴을 보여 주시던 하느님께서도, 기다림에 지치고 실망하시어, 마침내 외면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광명을 잃고 우리는 바야흐로 오랫동안 페스트의 암흑 속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중략)…

    “그렇습니다. 반성할 때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일에 하느님을 찾아뵙기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서너 번 무릎을 꿇는 것으로 여러분의 그 죄스러운 무관심에 대한 대가를 하느님께 갚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미지근하지는 않으십니다. 그처럼 드문드문 찾아뵙는 관계 정도로는 하느님의 넘쳐흐르는 애정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더 오래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이며, 그것만이 유일한 사랑의 방식입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이 찾아뵙는 것을 기다리다가 지치신 하느님은, 인류가 역사를 가진 이래 재앙이 죄 많은 모든 도시를 찾아들었듯이, 여러분에게도 찾아들게 하신 것입니다. 카인과 그 자손들이,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애급의 왕과 욥, 그리고 또한 모든 저주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듯이, 이제 여러분은 죄가 어떤 것인가를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가 여러분과 재앙을 벽으로 둘러싸고 가두어 버린 그날부터, 여러분은 그네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새로운 눈으로 모든 존재와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야, 마침내 근본적인 것에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좀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본다면 그것은 모든 고민 속에 가로놓인 저 영생의 황홀한 빛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확고하게 악을 선으로 변화시키는 신의 뜻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또 다시, 죽음과 고뇌와 아우성의 길을 통해서, 그 빛은 우리들을 본질적인 침묵으로 이끌어 가며,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광대무변한 위안입니다. 나는 이 위안을 여러분에게 가져다주고자 했습니다. 부디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응징의 언사를 듣고 돌아가시는 데에 그치지 말고 여러분을 진정시키는 ‘말씀’도 잘 듣고 가시기 바랍니다.”

    (다)

    “그래도 선생님은 파늘루 신부처럼 페스트에도 그것대로의 유익한 점이 있어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한다고 여기고 계시겠죠!”

    리유는 답답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이 세상의 모든 병이 다 그렇죠.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 있는 것은 페스트에도 역시 있습니다. 하기야 몇몇 사람들을 위대하게 만드는 구실도 하겠죠. 그러나 그 병으로 해서 겪는 참상과 고통을 볼 때,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리유는 어조를 높였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타루는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습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리유가 말했다. “한데, 내가 아까 한 말에 대해 아직 대답을 안 하였습니다. 잘 생각해 보셨나요?”

    타루는 안락의자에서 좀 편안하게 고쳐 앉으면서 머리를 불빛 속으로 내밀었다.

    “선생님은 신을 믿으시나요?”

    질문은 역시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리유가 망설였다.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그러는 것이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 지가 벌써 오래됩니다.”

    “좋아요.” 타루가 말했다. “선생님 자신은 신도 믿지 않으시면서 왜 그렇게까지 헌신적이십니까? 선생님의 답변이 제가 대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늘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않은 채 의사는, 그 대답은 이미 했으며, 만약 어떤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자기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파늘루까지도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이는 없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리유 자신도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 타루가 말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자신의 직업을 그렇게 보고 계시는군요?”

    “대충은 그렇습니다.” 의사는 다시 밝은 쪽으로 몸을 내밀면서 말했다.

    타루는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고 의사는 그를 보았다.

    “그럼요.” 그는 말했다. “아마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나는 최소한의 자존심밖에는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이 일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반성할 것이고, 또 나도 반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긴급한 일은 그들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나는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그뿐이지요.” …(중략)…

    “내가 이 직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말하자면 그냥 막연히 택했지요. 직업이 필요했었고, 딴 직업이나 마찬가지로 괜찮은 직업이었고, 젊은 사람이 한 번 해볼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죠. 또 어쩌면 나 같은 노동자의 자식으로서는 특별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택하고 났더니 죽는 장면을 보아야만 했지요.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아시나요? 어떤 여자가 죽는 순간에 ‘안돼!’ 하고 외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나요? 나는 있어요. 그때 나는 절대로 그런 것에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때는 나도 젊었고, 해서 나의 혐오감은 세계의 질서 그 자체에 대하여 솟구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그 후 나는 한층 더 겸허해졌어요. 다만, 죽는 것을 보는 일에는 여전히 길들여지지 못한 채로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리유는 입을 다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입안이 마른 듯싶었다.

    “결국은요?” 하고 타루가 나직하게 물었다.

    “결국……” 의사는 말을 계속하려다가 타루를 물끄러미 보면서 또 주저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그러나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만큼, 아마 신으로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 편이 더 낫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 하늘만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 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페스트1

    절망을 대하는 태도

    1. 상황 재구성

    오랑 시민들의 행동을 보면, 도시 폐쇄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구별된다.

    폐쇄 이전 : 각자 자기 일하기, 개인적 감정

    폐쇄 이후 : 그냥 적응할 수밖에, 전체가 똑같은 감정

    폐쇄 이후는 한 마디로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된’ 상태다. 페스트라는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감정은 없어지고 모두가 똑같은 감정에 사로잡혀버렸다. 페스트는 오랑 시민의 삶 전체를 좌우하는 거인과 같은 존재고, 오랑 시민들은 그 거인에 종속된 난쟁이 같다 하겠다.

    이게 과연 소설 속 오랑 시민들에게만 적용되는 걸까? 우리가 꼭 이렇지 않은가. 자기감정으로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 껴서 그냥 적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희로애락의 주제가 같지 않나. 진학, 취직, 결혼, 아파트 장만, 승진……

    바로 이런 상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세 인물의 대처법이 전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남 얘기 아닌 바로 내 문제로.

    2. 난쟁이가 사는 법

    회피하기 = 또 다른 구속

    거인 앞에 마주선 대부분은 ‘최대한 적응’하려고 한다. 그런데 랑베르는 도대체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상황과 나는 무관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빠져나가기, 이 선택은 인지상정이다.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나는 이 도시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부터 짚어보자. 물론 그는 이 재난에 아무 책임이 없고, 이 도시에 그야말로 ‘우연히’ 들어왔다. 정말 억울하다.

    그렇지만, 오랑 시민이라 할지라도 이 재난에 책임 질 사람은 없다. 일단 닥친 이 재난에 책임 소재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아무 상관없지만, 그러나 이 재난은 현재 내 앞에 벌어졌다. 이제는 ‘내 문제’다. 더구나 아무리 빠져나가려 해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 그런데도 빠져나갈 생각만 한다면, 그 삶은 어찌 되겠는가. 불평불만만 터뜨리고 자포자기 상태가 되지 않을까.

    랑베르의 문제는 ‘불가능한 해법에 매달려 주어진 상황을 회피한다’는 데 있다. 그게 거꾸로 이 끔찍한 상황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꼴이 된다. 그가 이것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인다면 ‘기자’로서 할 일을 찾았을 것이다.

    기만적 자기 위로 = 삶의 외면

    파늘루의 설교는 꽤 논리정연하다. ‘페스트는, 신이 회개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반성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 그것이 곧 신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식이다 → 이제 세상의 삶에 집착하지 말고 영생의 구원을 보자.’ 그리하여 페스트는 졸지에 ‘신의 축복’이 된다. 파늘루는 사제답게 절망에서 희망을 찾고 수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현실에서도 이런 죽음의 설교자를 자주 만난다.

    파늘루는 삶에서 벌어진 일을 삶 바깥의 것, 초월적 존재의 섭리로 설명하고 있다. 재난의 원인을 현실을 넘어서는 것에서 찾는 이상, 현실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은 절대로 없다. ‘신이 주신 재앙’을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 해결책(?)은 페스트를 외면하라는 주문일 뿐이다. 엄연한 재앙을 외면하고 신에게 매달려라, 그러면 마음의 평안, 결국 ‘체념적으로 수용’하라는 말이다.

    파늘루는 신의 섭리를 잘못 해석했다. 리유 말마따나 신이라고 인간이 이렇게 매달리기만 하는 걸 원하진 않을 것이다.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답게 재앙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것, 그것이 신이 바라는 모습일 것이다. 파늘루는 신의 섭리를 일방적으로 해석하여 신이 주신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3. 부조리 살기

    리유는 다른 사람이 회피하고 외면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부조리한 현실을 삶의 조건으로 수락하는 거다. 부조리 살기의 시작이다. 막상 받아들인 현실은 까마득한 어둠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똑바로 보려고 애쓴다.” 그는 현실 바깥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것이다. 페스트를 낳은 원인균을 찾는 것, 어쨌든 환자를 치료하는 것, 이것이 ‘의사가 할 일’ 아닌가.

    “지금 내 앞에 고통 받는 환자들이 있다. 나는 의사다. 의사가 죽어가는 사람을 놓고 왈가왈부할 게 뭐가 있냐?”

    절망적인 상황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로 대처하는 것, 이것이 랑베르와의 차이다. 오랑 시민들과의 차이이기도 하다. 모두가 평소의 삶을 잃어버린 상황인데 리유는 평소대로 살고 있지 않은가. 그 원인을 벌어진 사태 안에서 찾는 것, 이것이 파늘루와의 차이다.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이 일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반성할 것이고, 또 나도 반성할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는 아니다. 어쨌든 인간의 개입으로 바뀐 결과다. 이 결과를 반성하겠다는 것은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반성하고 다시 나아가겠다는 거다.

    知其不可而爲[지기불가이위, 그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한다.]

    4. 결

    리유가 의사라서 그럴 수 있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기자 랑베르가 상황을 제대로 기록한다면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신부 파늘루가 맞서 싸우라는 신의 뜻을 설교한다면 재난을 돌파하는 데 많은 이들이 나설 것이다.

    저마다 자기 일,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대처하기, 이것이 재난에 맞서는 태도다. 영웅은 특별하게 탄생하지 않는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평소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영웅이다. 이순신이 정확히 그렇지 않던가. 그런 삶 덕분에 인류가 지금껏 유지돼왔을 것이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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