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과 서민, 적대적인가
    [빵과 장미] '차별 없는 사회'와 '차이 없는 사회'
        2014년 12월 16일 10:02 오전

    Print Friendly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의 막말과 성추행 문제는 졸지에 ‘정명훈 문제’로 둔갑했다. 배후를 ‘종북’이라고 몰아세우면 어떤 싸움이든 순식간에 장면 전환이 가능하듯 이제 음악계에서는 배후에 ‘정명훈’이 있다고 하면 아주 쉽게 상황을 전복시킬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정명훈의 ‘실력’을 강조할 생각도 없고, 현재 서울시향의 문제를 지적하려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서울시향 지휘자의 연봉과 대우가 ‘정말’ 서울시 예산에 무리를 준다면 이를 조정하거나 문제제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명훈 문제’는 늘 이상한 방향으로 빠진다. 문제가 진행되는 방식에서 너무 지겨운 현상을 목격하고 있어 이에 대해 말하려 한다.

    나는 개나 고양이와 잘 어울린다. 가끔 동물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면 평소에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휴머니스트’들이 속속 등장한다. “불쌍한 사람도 많은데 동물한테 베푸는 에너지를 사람한테 쓰지…쯧쯧”.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이들은 자신이 동물을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한 사람’을 강조한다.

    이렇게 동물과 사람을 대립하는 관계로 설정하는 수사는 생각보다 효과가 있다. 졸지에 개나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의 밥그릇을 빼앗은 인간이 되어버린다.

    지휘자 정명훈을 향한 공격도 늘 이런 식이다. 정명훈을 공격하는 이들은 더 ‘거룩한 가치’를 들이댄다. 그 돈을 서민들에게 쓰지, 젊은 음악가를 후원해야지, 소외지역에서 차라리 무료공연을 해야지, 등의 말을 한다. ‘선한’ 화법의 무시무시함을 느낀다.

    정명훈은 ‘서민의 적’이 되며 젊은 지휘자의 기회를 약탈한 ‘늙은 권력자’가 된다. 그리고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집중시키기 좋은 선정적인 말을 사실 확인도 없이 툭툭 던진다. 연봉 20억, 140억, 정명훈 사조직, 서민들의 주머닛돈, 아들이 일하는 음반사… 이러한 무책임한 선동의 언어로 가득하다. ‘소음’이 ‘소리’를 압도한다.

    문제가 있다면 마땅히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예술가에게 훈계하는 이들은 늘 같은 방식의 소음을 만든다. 이들은 예외 없이 특정 계층을 호출한다. 대중, 서민, 민중 등으로 이름만 바꿔 자신이 ‘사랑하는’ 문화적 소외계층을 설정한 뒤, 이 계층과 순수예술을 적대관계로 만든다. 가장 참을 수 없는 지점이다.

    일단 예술에 대한 논쟁에서 불필요하게 ‘서민’이니 ‘대중’이니 이런 개념이 등장하면 그 다음부터는 엉망이다. 예술과 서민을 대립하게 만들면 예술이 ‘귀족’이 아님을 증명하는 작업을 거쳐야 하고, 알고 보면 ‘서민적’인 사례들을 읊어대야 한다. 결국 본질은 사라지고 예술의 신분 검증에 함몰된다.

    정명훈이 받는 돈을 “평생 한 번도 클래식연주회 근처에 가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대다수 서민들의 주머닛돈”으로 만들어버리는 태도는 예술에 대한 논쟁의 형식 중 가장 저급한 방식이다. 난데없이 정명훈이 서민들의 주머니에서 10년간 140억을 갈취하기라도 한 모양새를 만들었다.

    조종사 파업을 두고 ‘억대 연봉자’라는 사실만 강조하거나, 무상급식을 두고 왜 서민의 세금으로 재벌 손자에게 공짜밥 먹이냐는 허위주장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악의적 왜곡에 불과하다.

    소위 ‘진보’ 진영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문화적 소양에서 시대착오적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서민/귀족의 대립에서 빠져 나오지 않는 한 계속 이렇게 예술을 왜곡하는 선동만 가득할 것이다. 보수 진영에서 몇몇 연예인에게 ‘종북’을 뒤집어씌워 그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억지스러움을 진보 진영 버전으로 보고 있는 기분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클래식 공연장에 가는 이들은 그렇다면 서민이 아닌가. 더불어 서민이 모두 참여하는 문화란 무엇인가.

    우선 첫 번째, 클래식 공연이 과연 서민들에게 평생 근처에도 가보지 못할 정도로 비싼가? 물론 싸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돈을 쓰면서까지 음악을 들으러 가려면 그 만큼 취미 활동에 ‘투자한’ 돈과 시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보다 편견이 강력할 때가 많다. 요즘은 클래식이 많이 대중화 되어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 공연장을 가거나 CD를 구입하는 비용은 특별히 다른 취미활동보다 비싸지 않다. 지금 당장 서울시향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면 된다. 가장 싼 가격은 만원이다. 우리는 조금 부지런히 예약을 서두르면 만원에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이맥스 영화관이 1만 5천원 내외임을 떠올려보자. <인터스텔라>를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봤다고 그가 서민인지 중산층인지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

    또한 주말에 어린이 대공원이라도 가보면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무료 클래식 공연을 만날 수 있다. 나도 이 공연을 접한 적이 있다. 이미 많은 무료공연이 서울의 각 구와 여러 지방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중에는 물론 정명훈이 지휘하는 공연도 있다. 대중 가수의 디너쇼보다 훨씬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클래식 수도권

    한강변에서 열린 클래식 음악회 자료사진(사진=서울시)

    대중문화는 ‘서민’을 향하고 순수예술은 ‘귀족’이 즐긴다는 공식은 이미 오래 전에 깨어졌다. 그러니 평생 클래식 공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는 서민이란 설정은 사실 왜곡이다.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발레도 각 지역 문예회관 공연을 이용하면 ‘생각보다’ 싼 가격에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드레스 입고 궁전에서 만찬을 벌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호들갑이 발생하는지 어리둥절하다. 서민의 취향을 함부로 재단하는 태도야말로 서민이 예술에 선입견을 갖고 다양한 예술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러다가는 ‘서민다움’이라는 메뉴얼이라도 만들어지겠다.

    그 다음 문제,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문화는 무엇일까. 그런 것이 있기는 한가. 시에서 주최하거나 후원하는 각종 비엔날레, 음악회, 축제 등에 늘 모든 시민이 참여하지는 않는다. 비엔날레 근처에도 안 가는 시민, 영화제 근처에도 안 가는 시민은 물론이고 국립극장이나 국립국악원 등을 찾는 사람은 어차피 한정적이다.

    서민뿐만 아니라 중산층이라 해도 모든 분야의 문화생활에 참여하지 않는다. 국립도서관도 모두가 이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무료라고 해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거나, 익숙하지 않은 문화라 클래식 공연장을 찾지 않는 ‘서민’이 있듯이, 책을 읽기 힘든 서민도 많다. 모두가 공유하지 않는다 하여 세금 사용에 의구심을 가진다면 모든 공공서비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나아가, 어떤 예술이 반드시 모든 계층의 공유물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사는 동안 모든 음식을 맛보며 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취향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을 뿐, 어떤 계층이 누리지 못하면 모두가 눈치를 봐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사회는 끔찍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미식가에게 기아의 책임을 묻는 꼴이다.

    차별 없는 사회를 차이 없는 사회로 이해하는 ‘민주적’ 사고가 나는 무섭다. 그런 태도는 취향의 평준화와 획일화를 조장하고 결국 숨막히고 지루한 문화를 만들 뿐이다.

    취향이 계층 판단의 도구로 쓰일 때 개개인의 정서는 상당히 억압받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도 그리 돈이 들지 않는다고 굳이 말해야 한다. 그 자체가 이미 피로감을 준다. 이런 태도가 극단적으로 펼쳐지면 바로 ‘노무현의 요트’나 유민아빠 ‘김영오의 국궁’처럼 개인의 취미 활동이 아주 손쉽게 정치적 공격의 포화를 맞는 상황이 된다. 취향의 정치화는 위험하다.

    논쟁의 수준을 좀 높이자. 순수예술-귀족-엘리트 이런 공식에서 이제 제발 빠져 나오길 바란다. 정작 서민들의 예술 향유 기회를 빼앗는 것은 지휘자의 고액 연봉이 아니다. 온갖 전시성 토목행정에 세금이 낭비되고, 서민뿐 아니라 한국의 길고 긴 노동시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쉴 시간이 없다.

    문제를 엉뚱한 곳에서 찾지 말자. 클래식과 서민, 이런 대치 관계로 끌고 가는 태도는 지난 수년 간 지겹게 보아왔다. 지휘자와 서울시향에 들어가는 서민의 세금 운운하기보다, 세금으로 서민들이 음악을 접하는 기회가 더 넓어졌음을 강조해야 한다. 나아가 세금으로 예술영화전용관도 만들고 세금으로 더 많은 예술을 지원하자고 제안해야 한다. 혹은 공적 자본보다 기부금을 늘리자고 하거나 기업 후원을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합리적인 논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에 더 투자가 필요하다. 인간에게 느끼고 생각하는 그 순간과 감정, 사고의 흐름은 누구도 훔칠 수 없는 재산이다. 땅 파고 산천을 헤집는 일보다 훨씬 남는 일이다.

    필자소개
    이라영
    집필 노동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