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과 서양의 크로스 과학사
    [책소개] 『뉴턴의 무정한 세계』(정인경/ 돌베개)
        2014년 12월 14일 01: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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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침략을 당한 우리 입장에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은 식민 지배와 근대화의 도구로 강제 이식된 것이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에도 과학은 여전히 대중에게 어렵기만 한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그동안 과학이 어려웠던 것은 유년 시절부터 과학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인문학적 토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창의적 사고를 하려면 자기만의 감각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의 과학교육은 과학적 감성과 인문학적 통찰을 키워주지 못했다.

    나날이 첨단을 향해 치달으며 급변하는 과학기술의 환경 속에서 과학의 대중화가 절실하다고 여긴 정인경 박사의 신간 『뉴턴의 무정한 세계』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 책은 우리의 관점을 가지고 과학의 핵심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한국 과학사와 서양 과학사의 융합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뉴턴과 다윈의 과학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우리 역사에서 찾고 과학의 중요성과 가치를 확인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과학적 감성과 인문학적 통찰을 동시에 키우는 데 이 책의 목적이 있다.

    왜 ‘뉴턴의 무정한 세계’인가

    서양의 근대과학을 상징하는 뉴턴은 고전역학의 창시자로 과학사에서 첫손에 꼽히는 천재이자 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명적 인물이다.

    이 책은 일제시대에 『무정』이라는 소설을 통해 과학의 중요성을 부르짖었던 이광수와 뉴턴을 연결해 뉴턴이 발견한 세계와 개항 이후 이광수가 직면한 세계를 대비시켰다.

    뉴턴은 세계가 무정한 기계와 같이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만이 알고 있다고 여겼던 세계가 뉴턴에 의해 모두 예측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인간이 세계의 원리를 알아냈다는 자신감은 유럽을 근대사회로 변화시켰다.

    그런데 1910년대 이광수가 접촉한 서양의 근대과학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 삶의 뿌리를 해체시키는 무정하고도 잔혹한 세계였다. 이때 이광수는 우리가 과학을 모른다고 한탄했는데,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과학의 어려움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 서양의 근대과학은 한마디로 ‘뉴턴의 무정한 세계’였던 것이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

    우리에게 과학은 무엇이었나

    아편전쟁(1차 1840~1842년, 2차 1856~1860년)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은 야만의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유교문명의 질서에서 유럽의 근대문명은 이질적인 의미에서 야만의 풍속이었다.

    돌이켜보면 16세기부터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중국 땅을 찾아왔으나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팽팽하게 맞서던 동서양의 힘의 균형이 깨진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서양의 군사기술이 중국과 일본, 조선을 제압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은 야만으로 간주했던 서양 문명과 과학기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인이 처음 접한, 상징적인 의미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은 증기선과 대포였다. 서양 문명은 17세기의 과학혁명, 18세기의 산업혁명, 19세기의 2차 산업혁명으로 성취한 과학기술문명이었다.

    세계사에서 근대 유럽의 등장은 ‘유럽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극적이었다. 과학기술을 발판으로 300년 동안 성장한 유럽은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어 전 세계를 지배했다. 유럽만이 증기기관과 강철, 전기를 독점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서양 제국주의에 유린당한 비서양인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열등감과 무력감,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지 못한 패배감이 의식 깊숙이 자리 잡았다. 증기선, 대포, 철도, 전신 등을 처음 접했을 때 받은 충격은 서양 문명과 과학기술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했다.

    서양의 근대과학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체계가 없는 상태에서 과학기술은 자신의 열등함을 확인시켜주는 무서운 기계 그 자체였다. 서양의 과학기술은 증기선이나 대포와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서양 문명의 물리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진화론도 모르면서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고 뉴턴 과학도 모르면서 계몽주의를 부르짖고 있었다.

    이와 같이 1장은 우리에게 과학은 무엇이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증기선과 사회진화론은 우리가 만난 서양 과학기술의 실체였다. 그 실체를 알아보고 근대과학과 계몽주의에 대해 살펴본다. 우리는 서양 제국주의의 과학주의에 부당하게 상처 입었다. 사회진화론을 과학이라는 이유로 내면화하고 제국주의의 지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의 잘못은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다윈이 밝힌 진화는 ‘진보’와 동의어가 아니다

    2장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이 왜 과학적 진리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사회진화론, 인종주의, 우생학, 식민주의 등이 횡행했던 역사적 상황을 고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통속화된 사회진화론이었다.

    일제가 기획한 조선의 근대사회는 식민지적 근대화였다. 우리가 근대성의 가치를 체화하면 할수록 식민지 체제에 포섭되는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식민지인에게 주어진 과학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치가 아니라 단지 식민 지배를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처럼 근대 기획과 계몽의 대상이 되어버린 식민지인은 나아가야 할 출구를 찾지 못했다. 중국의 옌푸가 의도적인 오역으로 퍼뜨린 사회진화론에 대한 그릇된 신화를 반성하고, 다윈의 진화론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다윈은 진화가 진보는 아니라고 했지만 서양인들 대부분은 진화를 진보의 동의어로 생각하고 있었다. 서양인들은 계몽주의의 역사적 진보와 진화론을 연결시켜 이해했다. 다윈의 진화론과 스펜서의 사상이 결합한 것은 시대적 열망이었던 것이다.

    전기, 자본주의의 욕망을 끌어 모으는 집어등

    20세기는 과학과 기술이 융합된 과학기술의 시대였다. 그중에서 전기산업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시대에 전기 불빛은 온 세계를 골고루 비추지 않았다. 세계박람회에서 전기는 서양의 제국과 부를 과시하며 제국주의의 폭력과 식민 지배를 은폐시켰다.

    또한 근대 도시의 전기 불빛은 자본주의의 욕망을 끌어모으는 집어등이었다. 과연 이 시대의 조선인들은 서양의 전기 불빛이 내포하는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을까?

    전기의 원리에서부터 산업적 성공에 이르기까지 전기에 관한 사실은 왜곡된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20세기 문명의 은인”으로 추앙받았던 에디슨은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추악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던 발명가였다.

    전기야말로 기술혁신의 이름으로 특허전쟁이 치열하게 일어난 분야였다. 전기는 과학과 기술을 융합시켰고 제2의 산업혁명을 일으킨 주역이었지만, 전기기술을 둘러싼 그 이면의 암투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낳기도 했다. 서양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총아였던 전기는 분명 시대적 산물이었다.

    이렇듯 3장에서는 패러데이, 맥스웰, 에디슨 등을 통해 전기의 원리와 산업화에 대해 살펴보고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전기 문화와 과학대중화 운동을 고찰한다. 개항 이후 과학기술이 우리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면서 과학주의가 내면화되는 과정을 검토한다.

    일본 과학계의 성장은 조선인들을 착취하며 이뤄낸 성과였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은 한국 근대문학의 이정표를 세웠으며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라비틀어진 존재로 자신의 불운을 자조했던 시인이다.

    경성의 ‘모던보이’에게 식민지의 현실은 가혹한 운명의 굴레였다. 일제의 강제병합이 일어났던 1910년에 태어난 이상은 28세가 되던 1937년에 꽃다운 생을 마감했다. 식민지가 낳고 기른 불쌍한 청년은 폐결핵에 시달리다가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는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한 식민지적 근대화였다. 식민지 최고 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전문기술자로 일했지만 이상은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는 자괴감을 떨칠 수 없었다.

    기하학과 뉴턴 과학을 겉핥기로 배웠으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시로 풀어낸 천재 이상에 비해 식민지 본국 일본에서 이상보다 3년 일찍 태어난 유카와 히데키는 일본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28세에 중간자를 발표하고 세계 무대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면 이상은 28세가 되던 1937년에 도쿄에서 ‘불량한 조선인’으로 체포된 뒤 폐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4장에서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시인 이상을 비롯해 도상록, 이태규, 신건희, 리승기 등 식민지 과학기술자의 삶과 애환을 돌아본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등 물리학의 혁명에 관한 이론적 내용을 쉽게 설명한다.

    이와 연결하여 당시 일본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유카와 히데키와 나가오카, 니시나 등을 통해 일본 물리학계가 유럽의 과학을 어떻게 수용했는지 살펴보면서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과학적 토양을 비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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