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의 시대정신이란?
        2014년 12월 08일 10:46 오전

    Print Friendly

    제 나이는 아직 41세에 불과합니다. 노르웨이의 평균 기대 수명으로 봐서는 아직 절반도 못산 셈입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제가 관찰해온 러시아를 생각해보면, 이 젊은 나이인데도 적어도 5,6개의 별도의 나라들을 본 것 같습니다.

    “현실 사회주의” 시기와, 그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폭력적인 거부로 특징지어진 페레스트로이카 후기 시기만 해도, 같은 나라인데도 서로 두 개의 다른 사회처럼 느껴집니다.

    1989년, 레닌그라드대 동양학부에 입학했던 시절, 입시 면접을 봤을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체제는 어떤 거냐”는 질문에 저는 “전체주의 국가”라고 당연하듯이 답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 즉답을 하는 데에 하등의 의심도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기억이 나죠. 그 당시로서는 “스탈린주의적 과거”를 무조건 거부, 부정하는 게 “시대정신”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어떨까요? 수많은 러시아 블로거들은 북조선을 아주 애호합니다. 그쪽 노래나 영화, 사진 등을 앞을 다투어 실어 나릅니다. 그들이 주체사상을 숭배하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자국 본위의 좌파 민족주의자들이거나, 아예 반서방적, 반미적 보수주의자들이죠. 그들에게는 주체사상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수긍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어떤 사상으로든 비교적 약소한 사회가 내부적 결속의 도를 높여 고난 속에서 세계 패권 질서에 맞설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상이야 달리 할 수 있어도, 그들이 그런 “패권질서에의 저항”을 러시아의 바람직한 미래로 생각하는 나머지 북조선에 대한 연대를 하려고 하죠. 예컨대 중국학 전공자이기도 한 이 블로거는 대표적입니다:(링크)

    러시아의 주류 매체들들도 북조선의 “자주적인 지정학적 행위자”로서의 능력 등을 높이 평가해 대체로 관련 보도를 꽤나 존중해주는 투로 합니다. 페레스트로이카 후기의 “완전한 거부”와 아주 판이하죠? 그만큼 시대정신이 변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룡해와 푸틴

    러시아 푸틴과 북한의 최룡해

    이 시대정신이라는 게 뭘까요? 왜 사회는 1989년과 2014년에 그 구성원에게 180도로 다른 생각을 하게끔 유도하나요?

    저는 마르크스주의자인 이상, 그런 헤게모니적인 사회적 통념들을, 대개는 가장 여론주도력이 강한 사회적 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한 그 계급 “유기적 지식인”들의 의식, 무의식적인 합의가 만들어낸다고 봅니다.

    여론주도력이 가장 강한 사회적 계층이란 대개는 대도시의 중간/고소득의 고학력자들이고 특히 매체/교육/연구계의 종사자 등입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자율적”이라고 자기 정의하지만, 기실 꼭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 자신들의 이해관계도 의식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직장을 만들어주고 그 수입을 보장해주는 계급적 상위자들의 이해관계도 어느 정도 고려하기도 합니다. 그 밸런스의 결과물은 대개 바로 저들이 생산, 유포시키는 “사회적 통념”이죠.

    1989년의 레닌그라드의 고학력의 매체/교육계 종사자들은 대체로 보다 많은 소비와 보다 많은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사회를 원했으며, 그런 사회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는 얼마든지 다수의 사회적 인권(보장된 직장 등등)을 침해할 결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수의 생계는 보장돼도, 대도시 고학력자들의 소비력과 자기 표현의 반경이 서방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북조선은, 그들에게 딱 “원하지 않는” 사회의 모범이었죠. 그들에게 직장을 주었던 공산당의 간부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북조선과 달리 중국식이나 그 이상의 자본화를 희구했습니다.

    그렇다면 2014년의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상당수 여론주도자들이 북조선을 긍정하는 이유는? 러시아의 대자본으로서 북조선에서의 이권(항만, 철도, 광산 등등)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이미 성장할 대로 성장한 러시아의 관료형 자본층이 대미 길항 관계 속에서 지역대국으로서의 자국의 새로운 위상을 구축하고자 하는 게 주된 동기일 것입니다. 대미 대치에서는 북조선의 모범, 대북 연대 등이 필요하니까요.

    대자본의 이해관계도 그렇지만, 이미 자기 표현권과 소비력을 확보한 여론 주도층으로서도 이제는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민족적 자긍심”입니다. 그걸 북조선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죠.

    결국 대북 태도로 본 러시아에서의 시대정신은 “무조건적 서방 추수”에서 “자기 본위주의”와 “반외세론”으로 이동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예컨대 같은 기간 동안 남한에서의 시대정신의 변화의 추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여러 가지 시좌에서 볼 수 있지만, 저로서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사회”에서 “개인”으로의 무게 중심의 이동이었습니다.

    1989년의 한국 여론 주도층은, 꼭 모두들 민중민주 투사가 아니었음에도 좌우간 급진적 민주화운동이 들고 나온 주된 화두들을 어느 정도 공유했습니다. 대미 예속 속의 자주의 문제라든가, 소외층의 희생이라든가, 철거민이나 도시빈민 등이 겪는 사회적 고통 등은 그래도 다수에게 당위적으로 “관심사”가 돼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회적 통념에 등 밀려 노태우 정권도 어쩔 수 없이 국민의료보험이라든가 국민연금 확대 적용, 토지공개념 도입 등의 부분적 복지 확대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완의 1987년 혁명 이후 민심 수습 차원에서 불가피했던 거죠.

    오늘날은요? 사회적 통념의 무게중심은 여지없이 “개인”으로 이동하고 말았습니다. 개인의 웰빙이든 개인의 스트레스든, 개인의 자기계발이든 개인이 쌓아야 하는 영어 등 문화자산이든, 또 개인의 흥미 위주의 조선시대 암살 사건 탐구든, 문화현상들의 중심은 “개인”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도 많은 경우에는 아무리 벌어도 마이너스통장으로 살고, 계속 불안에 부들부들 떨어야 하는 개인으로서의 불안노동자 문제로 취급하려는 태도가 확연히 보입니다.

    개인이 없는 사회 본위주의는 아주 위험하죠. 한데, 모두들과 모두들의 경쟁 사회에서의 무조건적 “개인 본위주의”는, 개개인을 갈라놓고 착취하고 소외시키는 “구조”의 문제에 대한 망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비정규직 문제라는 것도 결국 사회공익이나 노동자, 소비자, 주민 등의 모두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이윤추구만 하는 사기업의 “수익성 집착”의 문제이고 그 본질적인 해결이란 바로 대규모 사기업들의 공유화, 사회화일 터인데, 사회적 화두의 중심이 “개인”으로 옮겨진 사회에서 이와 같은 “거대담론적” 이야기 자체가 잘 통할 리가 만무합니다.

    무조건적 “멸사봉공” 식의 국가주의적 (관제) 사회 본위주의는 국가/사회를 괴물로 만들듯이, 현실적으로 여전히 관벌과 재벌들이 다스리는 사회에서의 완전한, 여지없는 개인화는 바로 개인의 무력화와 고립을 의미합니다.

    “개인, 개인”하지만, 비정규직으로서 매일 모욕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개인으로서 다른 개인들과 대사회적인 유대가 어려운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는 저항수단이란 분신자살과 같은 극단적 선택입니다.

    그러나 한 명의 아파트 경비원이 분신자살하면 같은 업체 소속의 나머지들이 바로 집단 해고를 당하는 최근의 사례에서 보듯이, “개인”을 그렇게도 선호하는 중상층들은 “아랫것”들에게 아주 쉽게 연대책임을 덮어씌우기도 합니다. 좋은 의미의 개인주의라기보다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으로 작동되어지는 사회에서의 개개인의 원자화, 고립, 연대 차단과 경제동물화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후기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체제에 딱 알맞는 한국적 “개인” 담론을 만들어내는 게 한국의 주류 “지식인”들이지만, 과연 이 담론이 누구에게 유리할까요?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죠. 한데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정신을 충분히 반성적으로 반추해봐야 할 듯합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