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남은 한 철학자의 고백
    [책소개] 『죄의 문제』(카를 야스퍼스/ 앨피)
        2014년 12월 07일 12: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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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정치적으로 예민한 국면에서 국가폭력과 관계된 인간 군상들의 죄와 책임을 성찰한 정치철학서.

    20세기 실존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알려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개인을 넘어선 시민의, 국민의, 더 나아가 인류의 ‘책임’ 문제를 논한다. 무슨 책임인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른 구성원들에게 갖는 공감과 연대의식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책임과 죄의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굳이 어려운 철학적·법률적 개념과 용어가 필요치 않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이 이 책의 출발점이자 문제의식이다. 우리는 왜 타인의 불행을 안타까워하고,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는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 때문이다.

    “만약 내가 있는 곳에서 불법과 범죄가 자행된다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나의 죄다.”

    죄의 문제

    철학자가 쓴 ‘신곡神曲’

    실존철학자 야스퍼스의 내면에서 이 목소리를 일깨운 것은, 1930~40년대 독일이 유대인을 상대로 저지른 ‘홀로코스트’이다. 1945년 1월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포로수용소 문이 열릴 때까지 무려 6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학살되었다.

    그러나 이 책 《죄의 문제Die Schuldfrage-Von der politischen Haftung Deutschlands》(1946)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폭로하는 역사서도, 엄청난 고통을 겪고 살아남은 자의 증언 기록도 아니다.

    야스퍼스는 독일의 패전 직후 정치적으로 예민한 국면에서 거센 비난을 무릅쓰고 밑도 끝도 없이 죄의 문제를 꺼내들었다.

    죄의 문제를 강연하던 당시 하이델베르크대학 강당은 학생들로 가득 찼지만, 독일의 일반 대중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죄와 책임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패전이 가져다준 극심한 물질적·정신적 비참 속에서 내면의 각성을 촉구하는 철학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홀연히 홀로코스트라는 ‘지옥’ 이후를 준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지옥을 지난 자, 천국에 입성하려면 반드시 연옥煉獄에서 불로써 단련 받아야 한다. 연옥의 ‘불’은 무엇인가? 처절한 반성과 각성이다. 야스퍼스는 이 책을 통해 기꺼이 연옥의 ‘불’이 되고자 했다. 그래야만 천국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비극을 감내한 시민에게 주어진 4가지 죄

    야스퍼스는 법학과 의학, 철학을 섭렵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하이델베르크대학과 뮌헨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전공을 바꿔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정신과 의사로 근무하다가, 다시 철학을 공부하여 1921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철학 교수가 되었다. 이러한 인문학 전반에 관한 연구와 경험이 이 책에 녹아들어 있다.

    《죄의 문제》는 전쟁과 잔혹행위에 대한 독일의 정치적 책임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국가폭력이 자행된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이 져야 할 책임을 가리는 준거 틀을 제시한 책이다. 범죄국가에서 태어난 죄로 인류사의 치욕으로 기록된 대참사를 묵묵히 감내해야 했던 독일의 보통 시민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크게 4가지 죄가 있다. 법적인 죄, 정치적인 죄, 도덕적인 죄, 형이상학적 죄가 그것이다.

    좋은 정치를 상상하는 출발점

    이 4가지 죄는 크게 개인적 죄와 집단적 죄로 나눠 볼 수 있다. 어떤 집단에 속했다는 사실만으로 죄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야스퍼스는 ‘공식적으로’ 법적인 의미에서도, 도덕적 의미에서도 민족의 집단적 죄를 거부한다. 그는 집단적 죄나 집단적 사고방식을 ‘범속하고 무비판적인 사고’라며 비판하지만, 실제로는 《죄의 문제》 여러 곳에서 집단적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법적인 죄는 유사 이래로 범법자와 피해자, 그리고 법률가의 집요한 관심사였다. 형이상학적 죄는 인간의 비참한 운명에 공명하는 예술가적 인간에게 영감을 부여한다. 도덕적 죄와 정치적 죄는 윤리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의 사유를 자극한다.

    그러나 이 모든 죄가 겨냥하는 대상은, 실제로 책임을 생각하고 추궁하려는 우리 자신이다. 야스퍼스가 펼쳐 보이는 다채로운 죄 개념을 우리는 현실에서 어떻게 사유하고 구사해야 할까? 바로 이 지점에서 좋은 정치에 대한 상상이 시작된다.

    충실한 한국어판 해제와 부록

    이 책의 앞뒤에는 이 책을 옮긴 이재승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한국어판 해제>와 <한국어판 부록>이 실려 있다. 전문 철학자가 아닌 역자가 야스퍼스의 저작을 번역한 데에는, 이 책 《죄의 문제》가 과거 청산과 책임론의 이정표 같은 저작이기 때문이다.

    “야만적인 폭력 앞에서 나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무엇을 잘못했고, 지금 개인으로서 그리고 동료와 연대해서 무엇을 해야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가?”

    국가폭력과 과거사 청산 문제에 오랫동안 천착해 온 역자는, 독자들이 야스퍼스와 《죄의 문제》라는 가시덤불 투성이의 숲에서 헤매지 않도록 앞에서 길을 밝히고 뒤에서 수풀을 헤쳐 주는 안내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카를 야스퍼스의 생애와 주요 저작, 베버·하이데거·아렌트 등과의 교류와 상호영향, 정치적 행로는 물론이고, 책 뒤에는 2005년 유엔총회가 채택한 <인권피해자 권리장전>에 비추어 야스퍼스의 저작이 위치한 지점과 그 책임론에 내재된 약점과 한계 및 가능성까지 촘촘히 재구성하여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야스퍼스의 역작이 시민의 정치적 책임 문제를 논하는 확고한 토대를 제공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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