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사파의 대부?
    어느 한 선진노동자의 죽음
    고 심진구 선배의 영면을 추모하며
        2014년 11월 30일 09: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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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경북 구미공단 내 스타케미칼 공장 내 45m 굴뚝 위에 올라 187일째 고공농성 중인 차광호를 응원하는 스타 희망버스를 타고 구미엘 다녀왔다.

    내려가는 내내 온몸에 힘이 없었다. 꼬박 밤을 새운 터였지만 낭송하기로 한 시도 쓰지 못했다. 이깟 글이 무슨 힘이 될지 무력감이 저 진도 팽목항 앞에서 본 바다처럼 드넓게 내 온 영혼을 감싸고 있었다.

    차광호와 그의 동료들은 스타케미칼의 전신인 한국합섬 때부터 알던 친구들이었다. 한국합섬 당시 해고되어 법정 매각 관련 투쟁을 몇 년 하는 동안 자연스레 친해졌는데, 그들이 고용승계 투쟁에 승리해 스타케미칼로 복직되었다는 소식은 당시 오랜만에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기쁜 소식도 만 3년을 못 넘겼다. 스타케미칼은 위협을 통해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강제 희망퇴직으로 정리하고 자산 분할매각이라는 먹튀를 준비 중이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구조조정 정리해고에 합의서를 써준 노동조합, 그러나 이렇게 30여년 일한 일터를 빼앗기고 내쫒길 순 없다고 차광호와 그의 남은 동료들이 싸우고 있다.

    아,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 잔인한 구조조정이 만연한 시대의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처지였다. 도대체 무엇도 안정적이고 안전할 수 없는 불안정노동과 삶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죽지 않고, 쓰레기인간, 잉여인간이 되지 않고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평지에서 살지 못하고 저 하늘로 쫒겨 올라가는 인간들의 시대를 목도해야 하는 것일까. 기운이 빠져 더 이상 시도 쓸 수 없겠다는 무력감이 시시때때로 나를 엄습한다.

    세월호 진상규명 투쟁을 하는 동안 다시 가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했던 유성기업 2차 희망버스는 끝내 출발시킬 수 없었다.

    노사 간에 이미 시행이 합의되어 있었던 주간 2교대제 교섭을 하자는 요구에 사측은 용역깡패 투입, 직장폐쇄 등을 통해 민주노조 파괴에 나섰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검경, 노동부까지 가세된 총체적인 민주노조 파괴 말살 공작의 일환이었다.

    거기에 항의해 충북 옥천 경부고속도로변 광고탑에서 고공농성 중이던 유성기업 영동지회장 이정훈은 처절한 고립감 속에서 결국 256일차가 되던 지난 6월 24일 탈진한 상태로 엠브란스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지난 11월 9일 노동자대회 당시 누군가 어깨를 살며시 잡아 돌아서보니 그였는데, 얼마나 눈물겹고 미안했던지 모른다.

    작년 8월 8일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천의봉과 최병승이 울산 현대차 공장 앞 철탑에서 275일간을 버티다 교섭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실려 내려와야 했다. 얼마전 비정규직 대토론회 준비 과정에서 만난 최병승 동지는 아직도 기운이 빠져 있는 모습이어서 뭐라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기도 했다.

    현대차는 명백한 불법파견으로 정규직화가 필요하다는 대법원 판결도 무시한 채 얼마 전에도 신규채용을 미끼로 10여년에 걸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분열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몇 달전 5월 9일 날엔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옆 철탑에 올라가 있던 쌍용자동차 해고자 한상균, 복기성이 171일만(함께 올라갔던 문기주는 150일만에 실려 내려와야 했다)에 아무런 성과 없이 실려 내려 와야 하기도 했다.

    이젠 목숨을 걸고 고공농성을 해도 제대로 된 교섭 한번 해보기가 쉽지 않다. 이 비정한 시대에 한 줄 시가 무슨 힘이 될 수 있을 것인가. 304명의 생목숨이 죽거나 실종되어도 끄떡없는 이 시대가 무섭기도 하다.

    저의 아버지가 오늘 돌아가셨어요

    이런저런 슬픈 상념에 빠져 구미공단 도로 행진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모르는 번호라 망설이다 받아보니 앳되고 조심스러운 여자 목소리인데, 너무 가늘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간신히 귀를 기울리니 ‘심진구 씨를 아시나요.’라는 말이었다. ‘심진구 선배님요. 아, 아는데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만난 지 벌써 5-6년은 되는 듯하다.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용접일은 잘 다니는지, 그러고 보니 어떻게 사는 지 참 오랫동안 소원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안산에서 건설일용노동자들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하고 있다고, 언제 꼭 안산 한번 놀러오라고 만날 때마다 두 손을 꼭 붙잡고 정성을 다해 말해주던 선배였다.

    심진구

    심진구씨 모습(사진=박상규님 사진자료)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저는 심진구 씨의 딸인데요. 저의 아버지가 오늘 돌아가셔서요.”

    아,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갑자기 받은 오랜만에 소식이 부음이라니. 누구에게 알려야 하나 아빠의 핸드폰을 보니 전화번호가 있어서 불쑥 연락을 하게 되었단다. 40여일 전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입원해 몇 번의 항암치료를 받던 중 급작스레 오늘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큰 딸이 있었나. 늘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하던 아버지를 닮았나 보다. 깊은 그늘을 거느리고 다니던 아버지라는 다 헤어진 우산 속에서 볕 많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겠지. 함께 챙겨줄 주변도 많이 없을 텐데, 얼마나 외로웠으면 누군지도 모를 나에게까지 전화를 했을까. 알았다고 심진구 선배를 기억할만한 주변 선배들께 빨리 연락드리겠다고, 구미에 내려와 있어 미안하다고 내일 들리겠다고 하는데, 연신 너무 고맙다고 한다. 고맙다고, 누가 누구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까.

    <강철서신>, <선진노동자의 임무>

    1980년대 중반 한국 사회운동에 흔히 얘기하는 ‘주체사상파’의 출현과 형성을 주도했던 비합법 문건들이었다. 그 문건의 작성자는 지금은 골수 반공주의자로 전향한 김영환으로 알려졌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일약 주사파의 대부로 불리며 하나의 신화가 되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신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얼마 전 북한민주화 운동을 위해 중국에서 활동하다 중국 공안들에게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구속당하기도 했다. 그를 애써 빼내 온 것은 한국의 공안 기관들이었다. 그와 함께 전향한 이들이 만든 <시대정신>이라는 잡지를 초기에 한번 보고는 질리기도 했었다.

    한때 북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면서, 주체사상을 전파하던 이들이 이제는 전쟁을 통한 북한민주화를 주장하고 있었다. 전쟁을 통한 통일 비용이 현재의 분단으로 인한 비용, 평화적 과정을 통한 통일 연착륙론에 비해 훨씬 저렴한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고 고려의 가치조차 없는 극우파시즘의 논리들이었다. 거기엔 평범한 이들의 생명의 가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거기엔 인성과 사회성을 결여한 어떤 짐승들의 냉혹하고 차디찬 머리만이 있었다.

    심진구 선배는 그런 김영환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쳐준 실제 선생이었다. 그는 특별한 인간이긴 했다. 당시만 해도 ‘깡촌’이었던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중고교 시절부터 일찍부터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떴다. 차츰 헤겔 철학과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자생적으로 입문했고, 고교 졸업 후 1980년 5월부터 1년여 동안 라디오로 김일성 방송대학 주체철학 강좌를 청취하기도 했다. 어떻게 사는 게 인간인가,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라는 지극히 도덕적인 물음들이었다.

    김영환이 서울대 공법학과 2학년생이던 새파란 시절, 구로공단에서 함께 자취를 하며 그에게 자꾸 머리 쓰는 일을 하려하지 말고 공장으로 가라고 설득하던 선배이기도 했다.

    <한국사회 선진노동자의 임무>는 심진구 선배가 1986년 구로공단 내 신흥정밀에서 분신했던 박영진 열사 등과 함께 ‘구로독산지역 선진적 노동자회’를 꾸리고, 이 모임에서 토론을 위해 작성했던 문건이기도 했다.

    이 문건은 자취방 이사 과정에서 이 문건을 챙겨 간 김영환에 의해 대중적으로 뿌려지게 되었다. 결국 그는 김영환에게 보여주었던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라는 문건과 평소 대화 내용 때문에 주체사상과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론(NLPDR)을 김영환에게 전파한 수괴가 되어 안기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게 되었다. 결혼식을 올린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인 1986년 12월 10일, 시흥 7동 대로변에서였다.

    먼저 잡혀 간 김영환을 통해 심진구를 잡게 된 공안당국은 월척을 낚았다는 식으로 ‘민족해방노동자당’이라는 공안사건을 조작해 내었다. 불법연행에 대부분이 조작이었지만 무법의 37일 동안의 ‘살인적인’ 고문은 인간으로선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안기부의 고문과정에서 정형근 단장과 만난 것은 1986년 12월 크리스마스이브 전인 22일 경, 정형근 당시 대공수사단장이 고문을 받고 있던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정형근은 담배연기를 한 모금 내뿜더니 “심진구, 이제는 간첩이라고 불 때가 됐는데. 여기 잡혀오면 15일 이내에 다 불지 않은 사람이 없어. 여기가 어딘 줄 알아? 국회의원도 잡아다 줘 패는 곳이야. 간첩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돼. 그러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죽어. 네가 뭔데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안성 촌놈(심씨는 어려서부터 경기도 안성에서 자랐다.)이 서울에 올라와 문익환, 계훈제 야당놈들과 박영진(1986년 임금투쟁 중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분신) 장례 싸움을 걸어? 네가 뭔데 총대를 매! 아무래도 이상해. 고등학교만 졸업한 놈이 아는 게 너무 많아, 너 어릴 때부터 포섭됐지. 너 북에 갔다 왔지?”하면서 “간첩소리 나올 때까지 더 족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실장과 대머리에 눈이 치켜 올라간 부하가 몽둥이로 내 가슴을 후려쳤습니다. 내가 심문대 책상 뒤로 넘어지자 6명의 부하들이 달려들어 구둣발로 머리를 짓밟아대기 시작했습니다. 온몸을 몽둥이로 난타하더니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벌거벗긴 채 손목과 발목에 수갑을 채우고 나서는 6명이 교대로 두들겨 패대는데 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온몸을 타이어처럼 둥그렇게 말면서 심문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고, 온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심문실 바닥에 범벅이 되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내 발목에 묶인 수갑을 풀고 “일어서! 일어서! 새끼야!”하며 벽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나에게 “일보 앞으로! 일보 앞으로!”하면서 심문대 책상까지 다가오게 하였고, 나의 성기가 심문대 책상에 걸쳐지자 그 중의 한 사람이 몽둥이로 툭툭 치면서 “이것 아직도 살아 있구만”하더니 1미터 정도의 길이의 몽둥이로 내려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명을 지르면서 철제 심문대 책상 앞으로 고꾸라지자 이번에는 뒤에서 어깨와 머리를 쳐 뒤로 젖혀지면 또 앞에서 성기를 내려치기를 수십 차례, 나는 대들면 죽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개새끼들아! 차라리 죽여라, 죽여! 제발 죽여다오!”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나는 몸둥아리 하나로 먹고사는 ‘노동자’로서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고민했다는 것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안기부에서 갖은 수단을 동원해 자신을 간첩으로 몰아붙이려 고문․조작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나 자신을 기점으로 당시 문익환, 백기완, 계훈제, 이소선, 이창복 등 소위 군부독재의 ‘반체제인사들’로 알려진 재야세력들을 모두 간첩으로 엮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나를 남산 국가안전기획부 지하복도 중앙 근처에 있는 샤워실로 끌고 가더니 온몸에 범벅이 된 피를 물로 씻어내라고 하였습니다. 눈물이 마구 쏟아지면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통곡하였습니다. 이 통곡은 정형근 패거리 때문에 운 것이 아니라 이 가혹한 민족의 운명에 울고 또 울었습니다. 내 눈물과 핏물은 수돗물과 섞이며 남산 지하 하수구를 소용돌이치면서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다 87년 1월 어느 날 갑자기 대우가 달라져 구치소로 오게 됐는데 그 이유가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영향 때문임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국가폭력피해자 증언대회> 증언록 중에서. 2005년 1월 25일. 국회도서관 대강당)

    고등학교만 나온 놈이 아는 게 많아?

    세월이 흘러 그는 당시 그를 고문했던 정형근 단장과 네 명의 고문기술자들의 얼굴을 잊지 못하고, 2005년 캐리커쳐로 그려 사회적으로 고발했다. 저명한 국회의원이 된 정형근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발뺌을 했고, 아직도 다른 10명의 고문기술자들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대법에서조차 공소시효가 지나 조사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UN인권위원회에 제소를 해두기도 했다.

    정형근

    고문수사관들1

    고문수사관 4인의 특징

    여우 : 고문 수사관 중에 직위가 가장 높았으며 운동노선 이론에 밝았다. 부하들이 ‘상무’라고 불렀지만 나는 ‘여우’라고 별칭을 정했다. 여우는 ‘독사’와 ‘불독’에게 ‘군복 벗겨, 팬티 벗겨, 발목·손목 수갑채워’, ‘머리, 가슴, 무릎 쳐’ 등 신체부위까지 지목하며 고문을 지시했다. ▲특징 = 턱이 뾰족하고 코가 우뚝하며 쌍꺼풀이다. 미남형이며 머리 결을 단정하게 빗고 다녔다. 당시 나이 = 40대 후반(현재 60대 후반). 신장 = 1m76cm 정도. 체격 = 마른 편. 직책 = 실장(정형근 단장 바로 밑). 말투 = 서울 말씨

    불독 : 몸이 뚱뚱하고 얼굴에 살이 많이 쪄 ‘불독’이라고 별칭을 붙였다. 고문 받던 도중 허벅지에서 진물이 흐르자 불독이 몽둥이로 허벅지를 쑤시면서 ‘네 집안 조사했는데, 너는 몸뚱이 밖에 없는 놈 아니냐. 몸뚱이 썪기 전에 불어라’며 족쳤다. 불독은 ‘내 동생이 구로동에 있는 고려대병원 의사’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특징 = 눈두덩이가 두껍고 눈과 눈썹사이 그리고 이마와 눈썹 사이가 넓었다. 눈이 가늘고 길었으며 얼굴이 사각형이고 살이 많았다. 당시 나이 = 40대 중반(현재 60대 중반). 신장 = 1m75cm 정도. 체격 = 뚱뚱한 편. 직책 = 계장(구 계장이라고 불리기도 함) 말투 = 경상도 말씨

    독사 : 그에게 고문을 당하면서 ‘인간이 아니라 살모사 독사’라는 생각이 들어 ‘독사’라는 별칭을 붙였다. 다른 수사관들은 한 두 시간 정도 고문하면 스스로 지치는데 독사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고문했다. 독사는 86년 12월 10일 저녁 5시 해질 무렵, 서울 시흥본동에서 나를 불법 체포할 때 수사관 3명 가운데 1명이다. ▲특징 = 대머리에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입술이 얇으며 입꼬리가 치켜 올라감. 당시 나이 = 40대 중반(현재 60대 중반). 신장 = 1m70cm 정도. 체격 = 마른 편. 직책 = 대리(추정). 말투 = 경상도 말씨

    곰 : 몸이 뚱뚱하고 배가 불룩 튀어나와 ‘곰’이라고 별칭을 붙였다. 곰은 위협했다가 달래는 등 심리전을 펼쳤다. 곰은 ‘하나님의 품에 왔으니 다 이야기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같이 기도하자’며 진술을 유도하는 등 심리요원으로 파악됐다. 고문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지만 온 몸이 찢겨져 야전침대에 쪼그리고 잠시 눈을 붙이는데 갑자기 정강이를 걷어차기도 했다. ▲특징 = 안경을 썼으며 머리칼이 곱슬머리고 코는 주먹코, 입술이 두툼, 특히 볼이 만두처럼 튀어나옴. 당시 나이 = 30대 후반. 신장 = 1m70cm 정도. 체격 = 뚱뚱한 편. 말투 = 경상도 말씨.

    그는 그 과정에서 안기부의 협박에 의해 구치소에 감금된 상태에서 KBS 등 언론매체를 통해 마치 ‘전향’한 이처럼 꾸며지기도 했다. 안기부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아니, 이 잔인하고 비극적인 분단체재는 한 청년의 삶 모든 것을, 그의 가족들의 삶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그와 그의 가족들은 평생 ‘빨갱이’라는 주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막내 동생은 정신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또한 정신을 놓아야 했다. 노동자로서 하나밖에 없는 몸은 골격이 상하고 모세혈관이 터져 혈액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일조차 하기 어려웠다. 걸을 때조차도 마비와 통증이 오고, 피로해서 주저앉고 가슴이 답답하고 뒷골이 쑤셨다.

    전향 공작에 유린되며 사회적, 역사적 생명조차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그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힘들었다. 긴 어둠의 시절이었다. 사는 내내 불안신경증, 만성두통, 근육신경통 등 고문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던 2003년 시절이 되어서야 그는 간신히 밖으로 나와 옛 친구들을 조심스레 만날 수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조금만 얘길 나누는 동안에도 식은땀을 흘리며 불안증을 견디지 못하던 그였다.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견디지를 못한다고도 했다.

    주로 만나던 곳은 초봄의 볕이 내리쬐던 마석모란공원이었다. 그와 함께 모임을 하던 중 동일제강, 신흥정밀 등에서 노조민주화 투쟁을 하다 분신을 했던 고 박영진 열사의 묘소 앞이었다. 박영진 열사도 구두닦이, 껌팔이 등을 전전해야 했던 깡노동자 출신이었다. ‘삼반 세력 타도하자’, ‘노동법을 준수하라’, ‘민주노조 쟁취하자’고 외치며 그는 갔다. 그는 그런 박영진을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김영환을 만난 것을 평생 후회한다고 했다. 그 친구는 최소한 그때 조언대로 공장으로 가서 진짜 노동자들의 삶과 자세를 배웠어야 했다고 했다.

    조금씩 생활이 가능해지며 그는 내내 안산지역에서 건설일용노동자 생활을 하며 살았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에 함께 하기 위해 노력했다. 넉넉하지 못해 박영진 열사 추모사업회 회비 한 번도 못 냈다고, 평생을 추모사업회를 지키며 살고 있는 김명운 선배에게 미안해했다. 그때마다 김명운 형은(지금도 여전히 박영진열사 추모사업회를 지키며 <전국민족민주열사추모단체협의회> 의장으로도 일하고 있다.) “야 이, 거지야. 니가 잘사는 게 도와주는 거지 뭐.”라고 웃으며 핀잔을 주곤 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 후배들에게 삶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어주는 작은 일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비정규 일용 노동자 무상취업 지원 단체였던 ‘일사랑’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일하기도 했다. 근래엔 도저히 건설일용일을 감당할 체력이 안 돼 평생을 지켜 준 아내와 함께 식품 관련 일을 하며 살았다.

    고난 많았던 그의 삶의 고통도 이젠 모두 덜어지는 걸까.

    구미에서 올라와 한숨 부치고 와 본 영안실이 휑하다. 아무도 없어서인지 너무도 예쁜 두 따님이 와서 무슨 말이라도 듣게 될까 너무도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이 글을 마무리해가는 지금, 저녁 무렵에야 모두가 구로공단 노동자들이었던 박영진 열사 추모사업회 회원분들 몇 분이 오신다.

    ‘그가 갔다.’해도 누가 그를 기억하고 알아줄까. 하지만 이대로 한국근현대사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한 선진노동자의 삶이 이렇게 쓸쓸이 잊혀져 간다는 것이 가슴 아프기도 해 이렇게 짧은 추모의 글을 남겨본다.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마지막까지 선배의 사건을 조사했던 이명춘 변호사는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그가 끝내 올해 2014년 봄에 재심을 받았고, 결국 ‘무죄’를 확정 받았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늘 무표정에 말이 없던 고 김근태 고문과 평상심을 잃고 눈이 충혈되며 말이 장황해지던 심진구 선배는 고문 피해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두 가지 유형이라고 한다. 화려한 사회적 조명과 갖은 헌사와 조사 속에 갔던 고 김근태 고문과 평생을 어둔 그늘 속에서만 살아가야 했던 한 선진노동자의 삶 또한 그렇다면 두 가지 어떤 사회운동의 전형적인 두 모습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나마 살아남아 최소한의 활동이 가능했던 이들과, 그조차도 쉽지 않아 온 삶이 파탄나야 했던 이의 두 가지 전형적인 모습이라고나 해야 할까.

    형편이 되면 묘소라도 쓰겠지만 어려워 화장을 해서 마석모란공원 납골당에 모시기로 했다. 그곳엔 박영진 열사 아버님도 계시니, 외롭지는 않겠다. 그와 함께 박영진 열사 아버님 납골묘를 찾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젠 그를 그곳에서 만나야 한다니 참 무상하다.

    더 무상한 건 이 세상이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여전히 악독하다. 분단의 바이러스는 시시때때로 우리 모두의 일상을 뒤흔들고 침탈한다.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들을 아무 때나 ‘빨갱이’로 낙인찍는다. 조금 바른 소리만 해도 ‘빨갱이’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을 주장만 해도 금세 붉은 딱지를 찍는다. 국가와 대통령에게 세월호 참사의 올바른 진상규명만을 요구해도 금세 ‘종북’이다. 합법적인 진보정당 활동이 ‘종북’이 되어 초유의 정당해산 심판이 진행 중이기도 하다. 그가 한때 신봉했던 북도 온전치 않다.

    다시 이 땅의 ‘선진 노동자’들은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며칠 전 만났던 코오롱 해고자 최일배는 벌써 단식 30여일차를 앞두고 있다. 고공농성 190일차인 스타케미칼 차광호는 결코 내려올 수 없다고 한다. 프레스 센터 옆 전광판에 오른 씨엔엠 비정규직 해고자 강성덕과 임정균도 벌써 고공농성도 벌써 보름이 넘어간다. 굶지 않고, 오르지 않고, 죽지 않고, 끌려가지 않고 이 땅의 노동자들이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그날은 언제 올까.

    몇 명만이 쓸쓸히 지키는 이 영안실이 우리 모두의 시린 삶의 자리인 듯 아프다. 내일이 발인이라는데 누구라도 기억은 해주면 좋겠다. 마석까지 따라 갈 수 있는 이들도 거의 없다. 김명운 선배와 박영진 열사의 손아래 누이였던 박현희 선배 정도가 갈 것 같다. 내일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 곁에서 아프게 살다 간 한 ‘선진 노동자’가 있었음을 함께 기억해주자.

    역사는 어떤 영웅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무수했던 ‘선진 노동자’들의 아픔과 노력들에 의해서 이만큼 진전되어 왔다는 것도 기억해주면 좋겠다. 어디에서던 물 한 잔 따라주는 이들이, 소주 한 잔 들이켜 주는 이들이 있어주면 좋겠다.

    그리곤 다시 가는 것이다. 지금 다시 목 눌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현장으로, 다시 억눌리고 있는 모든 삶의 현장으로 다시 아낌없이 가는 것이다.

    이 땅의 진정한 해방과 변혁이 이루어지는 날. 그의 작은 납골당 앞에도 작은 국화 한 송이 놓여지기를 바라며 마친다. 모두가 평화로운 저 세상에서 부디 이제 그만 모든 고문에 의한 억눌린 기억들, 쫒기는 마음들 모두 놓고 환하고 편안하시길.

    * 모금 계좌라도 넣어서 유족들 도와야 하는 것 아닌가 했더니 모두 그만 두잔다. 부디 잘 가시길.

    – 2014년 11월 29일(토) 췌장암으로 영면

    영안실 : 안산고려대병원 영안실(202호)

    발인 : 2014년 12월 1일(월) 아침 9시

    화장 : 수원연화장

    장지 : 마석모란공원 납골당 안치(2시 30분)

    상주 : 이정미(010-4569-9771)

    박영진열사추모사업회 : 박재민(010-3005-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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