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과 혁명의 이야기
    [책소개] 『여울물 소리』(황석영/ 창비)
        2014년 11월 29일 02: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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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가 출간되었다. 작가는 초판본(2012)의 오류를 바로잡고, 1년여에 걸친 치열한 퇴고를 통해 한결 정갈한 작품으로 『여울물 소리』를 재탄생시켰다.

    또한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현장으로 기록될 동학혁명과 천도교(소설 속 ‘천지도’)를 주소재로 한 작품이 혁명 120주년에 맞춰 재출간되었다는 점도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1894년 사회적으로 고착된 부패와 외세의 내정간섭에 맞서 들불같이 타오른 혁명의 현장을 배경으로 작가는 피폐해진 민중의 삶과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서사의 부재가 고착화된 작금의 한국문학에서 황석영 작가 특유의 이야기 솜씨는 두 주인공의 애절한 사랑, 혁명의 좌절과 희망, 당시 질박한 민중들의 삶을 아우르며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은 물론 답답한 오늘의 현실을 견디고 헤쳐나갈 지혜를 얻게 한다.

    여울물 소리

    끝나지 않은 혁명, 지울 수 없는 사랑!

    소설은 ‘반동의 시대’인 19세기 후반부를 시대적 배경으로 이야기꾼(전기수 傳奇叟)이자 혁명가인 주인공의 생애를 무게감 있게, 때때로 판소리처럼 구성지고 경쾌하게 그려낸다. 임오군란(1882)과 동학혁명(1894), 청일전쟁과 갑오개혁(1894)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전면과 배면에 등장함으로써 마치 대하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도 만든다.

    소설의 주인공은 서자 출신인 ‘이야기꾼’ 이신통과, “오입쟁이는 아니었지만 어리숙하고 주변머리 없는” 시골 양반과 “재예가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남자 후리는 솜씨가 남달”(9면)랐던 관기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 박연옥이다.

    소설은 연옥이 “내 마음 정한 곳은 당신뿐이니, 세상 끝에 가더라도 돌아올 거요”(76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신통의 행적을 쫓는 이야기로 전개되면서 동학혁명 등과 같은 근대화 과정의 역사적 사건과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의 모습이 씨줄날줄로 얽히며 숨가쁘게 펼쳐진다.

    방대한 내용들을 한 권의 소설로 밀도 있게 담아낸 압축미와 작가 특유의 입담과 필력은 ‘과연 황석영’이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로서 반세기를 넘긴 작가로서의 황석영과 그의 문학인생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작가적 에너지를 집약하여 ‘이야기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응답하며 작품을 집필한 것과 관련이 깊다.

    이 소설은 혁명의 이야기다: 서얼의 서자로 태어나 전기수로 떠돌다가 천지도(동학)에 입도하여 혁명에 참가하여 쫒기는 신세로 전국을 떠돌며 종내에는 활빈당의 유수로 활동하다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하는 이신통의 삶은 당대의 현실을 현장감 있게 증언한다.

    작가는 ‘새로운 시대, 더 나은 세상은 무엇인가’ ‘사람이 곧 하늘이다’ ‘세상은 반드시 바뀔 것이다’를 필생의 화두로 삼았던 이신통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통해 격동 시대의 얽히고설킨 아픈 역사를 오롯이 담아내면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같은 화두를 던져준다.

    물론 혁명이 실패하고 말 거라는 암시는 소설 전반부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실패를 각오하더라도 뜻을 세우고 피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근본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봄꽃도 먼저 피면 반갑고 이쁘기는 하더라만 그것이 천기를 보는 거여. 꽃샘바람 불고 눈보라 치면 속절없이 지는 법이니라. 세상이 만화방창할 제 더불어 피어나야 절기를 누리는 거란다.

    그러면 어여쁜 본색을 어찌 드러낼 수 있나?(57면)

    이 소설은 사랑의 이야기다: 세상을 품고 변혁시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 곁에 머물 수 없는 사내와 그런 사내의 세상까지 품어 안기 위해 그의 행적을 쫒아 전국을 떠도는 여자.

    강렬한 첫사랑 이후 평생을 어긋나기만 하는 인연과 그리움은 읽는 내내 독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남아 부담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빈자리를 남겨두고 떠나오는 여자의 애절한 결단은 진정한 사랑과 그리움의 가치를 상기시킨다.

    어찌 그와 함께 살았던 날을 하루씩 쪼개어 낱낱이 이야기할 수 있으랴. 나중에 그가 곁에 없게 되었을 때, 가뭄의 고로쇠나무가 제 몸에 담았던 물기를 한방울씩 내어 저 먼 가지 끝의 작은 잎새까지 적시는 것처럼, 기억을 아끼면서 오래도록 돌이키게 될 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76~77면)

    나는 기왕에 사방으로 거처를 옮겨다니는 신사의 도소를 따라가지 못할 바에야 신통의 짐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불승들처럼 단칼에 마음의 집착을 휙 베어낼 수야 없겠지만, 내 몸이 먼저 떠나면 마음은 타래에서 풀린 실처럼 서서히 따라오다가 모르는 결에 어디선가 툭 끊어져나가게 될 것 같았다. 혹시 누가 알까, 그이가 끊어진 실의 끄트머리를 잡고 내가 간 길을 되짚어 돌아오게 될지. 그이에게 부담이 되기보다는 내 빈자리를 그의 곁에 남겨두고 싶었다.(381~82면)

    이 소설은 예술의 여향(餘響)이다: 주인공 이신통은 혁명가이기도 하지만 저잣거리에서 책 읽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로서 특출난 재능을 발휘한다.

    흥미로운 것은 동학 2세대 교주인 최시형을 이야기꾼으로 파악하고 소설에 녹여낸 것인데, “이야기꾼이야말로 민중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혁명가”(최원식 추천사)로 설정하는 것은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또한 주인공은 전기수, 재담꾼, 연희대본가로서 판소리 소리꾼, 악사, 광대패 등과 어울려다니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신재효(작품 속 ‘손동리’)의 입을 빌려 펼치는 음악관과 예술관 역시 별미를 선사하는 이 작품의 장점이다.

    평조(平調)가 소리의 기본이니라. 한밤중에 달이 중천 하늘에 높이 떠 있는 것처럼, 또는 한들바람이 잔잔한 수면을 스쳐가듯이 맑고도 시원한 소리다. 우조(羽調)는 맑고 격하고 장하고 거세며 엄한 가락이니라. 사납게 들어올리기 때문에 맑고 장하고 격동하여 한말이나 되는 옥이 부딪쳐서 깨어질 때에 옥 부스러기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것과 같도다. 계면조(界面調)는 처절하고 슬픈 소리니 아득하게 멀고 숙연한 가락이다. (…) 평계면은 평조에 가까운 잔잔한 애조로, 단계면은 슬픔이 아직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가슴속에 쌓여 있는 울적함으로, 진계면은 슬픔이 북받쳐 통곡으로 터져나온 소리니라. 그리고 여향(餘響)이 있으니, 들보 위의 티끌이 떨리고 흘러가는 흰 구름을 멈추게 하는 가락이다. 새벽의 먼 산사에서 마지막 타종소리가 끊길 때와 같도다.(307면)

    이 소설은 세태풍자이다: 이 소설은 무겁기만 한 역사소설이 아니다. 임오군란과 청일전쟁의 배경으로 드러나는 외세의 폭압과 조선 백성의 처참한 일상은 자괴와 비애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조선말 망가진 사회시스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과거시험장의 대리시험 풍경은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세태풍자의 압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더불어 수차례 등장하는 소리꾼, 광대패들의 노는 장면은 풍자와 해학과 기지가 넘쳐난다.

    자아, 우리는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집 삼아 조선팔도 길이란 길은 휘뚜루마뚜루 쓸고 다니는 초라니 광대패인데, 날이면 날마다 영동장에 오는 게 아니외다. 내일 이 자리서 우릴 찾아봐, 없어, 재 너머 옥천 가면 있지만. 예, 오늘 딱 하루만 놀다 갑네다. 펄쩍 뛰었다 제천장 신발이 없어서 못 보고, 바람이 불었다 청풍장 시원해서 못 보고, 청주장을 보잤더니 술이 취해서 못 보고, 황간장을 보잤더니 땡감이 많아 못 보고, 예산장을 보잤더니 예산이 없어 못 보고, 온양장을 보잤더니 전다리 많아 못 보고, 돈 안 내고 술 먹기는 공주장이 제일이요, 아산에도 둔포장은 큰애기 술장사 제일이요, 청산 보은 대추장은 처녀 장꾼이 제일이요, 엄벙중천에 충주장은 황색 연초가 제일이요, 서산 태안 가을장은 어리굴젓이 제일이요, 한산 서천 여름장은 세포 모시가 제일이요, 천안 삼거리 옛 장터는 능수버들 척 늘어졌네. 자아, 쳐라!(91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체로 실존 인물이다. 작가는 리얼한 역사적 사건의 재생을 피하고 소설문학적 전개를 보여주고자 ‘천도교’를 ‘천지도’로 바꿔 쓴 것처럼 지명이나 실제 인물의 이름을 바꾸어 등장시킨다. 이를테면 서일수는 서장옥, 김봉집은 전봉준, 최성묵 대신사는 최제우, 최경오 신사는 최시형, 손천문은 손천민, 손동리는 신재효, 그리고 심백화는 조선 최초의 여성 명창 진채선을 가리킨다.

    작가는 또한 당대의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간 민초들의 이야기 속에 해학과 풍자의 언어유희와 말재간이 어우러진 당시의 민요, 연희 대본, 언패소설 등 다양한 소재를 곁들여 소설 읽는 재미를 더한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는 삶의 무게, 그리고 희망

    현재 우리의 시대와 120년 전의 세상을 비교해보면 역사는 진일보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현재 이 땅의 민주주의는 후퇴했고 권위주의 시대의 작태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또한 억울한 죽음은 도처에 만연하며 민의는 땅에 떨어졌고 권력과 유착된 부정부패의 사슬만이 더욱 견고해졌을 뿐이다.

    이러한 작금의 세태를 살펴보건대, 『여울물 소리』는 오래전 지나간 옛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생생한 이야기이자 현재와 미래를 되비추는 역사의 거울이 된다. 때가 아니었음을 알았고 “패망할 줄 알”았으나 싸울 수밖에 없게끔 내모는 현실의 무게는 죽음을 각오할 만큼 무거웠을 것이다.

    “다들 싸우겠다는데 망해두 함께해야”(73면) 한다는 비장하고 한 맺힌 결의는 결국 수많은 민중의 목숨을 앗아간 실패한 혁명이 되었으나 그 아름다운 정신만은 살아 숨쉬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위로를 준다.

    날선 시대정신을 한결같이 작품에 반영해온 작가 황석영의 숱한 명작 중에서도 이 작품에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은, ‘세상은 반드시 변할 것’이라는 신념과 희망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동학혁명과 그 정신은 작품의 표제가 암시하듯 ‘여울물 소리’처럼 선명하게 모여들어 거대한 강물로 합수되면서 현재를 관통하고 미래를 향해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갑오년에 시작된 혁명이 이제 다 끝났지요. 그러나 아주 끝나버린 것은 아니외다. 물이 말라 애를 태우던 가뭄이 지나면 어느새 골짜기와 바위틈에 숨었던 작은 물길이 모여들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고 강물은 다시 흐르겠지요. 백성들이 저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어찌 죽은 이들의 노고가 잊히겠습니까? 세상은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396면)

    가만히 숨죽이고 그 소리를 들었다. 여울물 소리는 속삭이고 이야기하며 울고 흐느끼다 또는 외치고 깔깔대고 자지러졌다가 다시 어디선가는 나직하게 노래하면서 흐르고 또 흘러갔다.(4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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