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호선 시청역, 둘째칸 흰장갑을 주목하라"
    [아빠의 현대사 39] '주간 진보정치'의 기억 & 여의도에서 맞은 2000년
        2012년 04월 27일 02: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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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여/ 또 우리는 살아왔다/ 잘못 살아왔다고 말하지 않으마//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잘못 살아왔다고// 우리는 묵묵히 걸어왔을 뿐/ 소리 없이 바스라져 사라지는/ 물방울처럼/ 그러나 아우여// 잘못 살아왔다/ 단 한 번 그렇게 말하지 않기 위하여/ 늙어서 죽지 않기 위하여// 죽도록 살자/ 죽도록 살자” (배창환 시 ‘죽도록 살자’ 전문)

    1999년 그해 11월 네 동생 은수가 태어났다. 너랑 일곱 살 차이다. 사실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나와 네 엄마는 아이를 가질 생각을 못했다. 당시에는 군사정권을 몰아내는 것이 삶의 목표였고, 아이를 나서 기르는 것을 ‘욕심’ 혹은 ‘사치’로 생각했던 때였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감옥이라도 가게 되면 더 어려워질 게 뻔했다.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아이를 낳겠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도 너와 은수를 낳아도 될 정도로 한국사회가 바뀌어서 고맙기도 하다.

    엊그제 네 고등학교 졸업식 앨범을 보면서 유난히 ‘민주’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많음을 새삼 알았다. 차민주, 박민주, 김민주 등등. 새날 언니 이름도 그렇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모두가 자신들의 염원을 아이들의 이름에 담은 걸로 나는 이해한다. 너는 ‘민주’라는 노래를 알까? “너는 햇살, 햇살이었다…”로 시작되는.

    내가 만난 어떤 사람은 성씨가 백씨인데 하나는 ‘두산’이고, 작은 놈은 ‘록담’이다. 백두산과 백록담이 하나로 되는 통일세상을 바라는 마음이었겠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 중에는 우리 부부와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만나는 일본 사람들 중에서 요모노라는 동경대 출신 노동운동가가 있다. 가끔 이메일도 주고 받는다. 일본의 유명한 학생운동 중 하나인 1968년 동경대 투쟁을 겪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제 환갑이 넘은 그 부부는 정말로 아이를 낳지 않고 살고 있다.

    집회에 참석한 둘째 은수.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둘째 은수가 태어날 때도 나는 집에 없었다. 마침 민주노총 수련회가 충북에 있는 산골짜기에서 열리는 바람에 삐삐가 터지지 않았다.

    산을 내려와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삐삐가 연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지 아빠, 통증이 오기 시작했어. 빨리 연락 줘”로부터 시작된 문자는 마지막에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낳았어.”라는 원망으로 끝났다.

    괴산에서부터 일산으로 가는 길은 지금도 멀다. 내 대신 외할아버지가 은수를 받았다. 두고두고 네 엄마와 은수에게 미안한 일이다. 네 엄마가 사주팔자를 공부하면서 나보고 가정보다는 조직이 우선인 팔자라고 했는데 정말 그런가 보다. 지금도 아빠로서의 책임을 다 못하고 있는 셈이다.

    신문을 만들다. ‘진보정치’

    은수를 생각하며 ‘진보정치’가 생각난다. 99년 봄에 인사동 작은 술집에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는 기존의 신문이 아닌 우리 언론매체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세상을 바꾸려면 여론을 바꾸어야 했다.

    이에 앞서 김태현, 신언직, 오동진, 박점규 등은 당시 국민승리21 이후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당면 과제를 노조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현장 노동자들을 위한 ‘전국적인 정치신문’을 만들자고 ‘사전 모의’를 한 바가 있다.

    지금도 민주노총에 있는 김태현 선배가 마침 일본을 다녀올 기회가 있어서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인 적기(赤旗, あかはた) 편집국장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고, 신문도 가져왔다. 비록 일본공산당이 실패해서 소수당이 되었지만 공산당 기관지는 일간지 경우 수십만 부, 일요판은 수백만 부가 팔린다고 했다. “우리도 그런 신문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의기투합했다. 스무 명도 안되는 사람들이었지만 거기서부터 일이 시작되었다.

    무언가를 하려면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돈과 사람’이다. 사람은 있었다. 네가 ‘연수 아빠’로 아는 현재 레디앙 편집국장인 이광호 선배는 일요신문 노조 위원장을 거쳐, 전노협 준비위 사무처장, <미디어오늘> 창간 편집국장 그리고 초대 민주노총의 기관지인 <노동과 세계>의 편집장을 했었는데, 마침 그 당시 민주노총을 그만 둔 상황이었다.

    돈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책임지고 만들기로 했다. 말처럼 쉬운 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열리는 것’이다. 좋은 기자들이 모여 들었다. 지금은 다 뿔뿔이 헤어졌지만 쥐꼬리만한 급여를 받으면서도 발로 뛰는 신념을 가진 젊은 기자들이 함께 했다.

    마포 민중의 집을 만든 정경섭, 얼마 전 마포구의원이 된 진보신당 오진아, 최근 진보신당으로 간 윤재설, 이지안 진보신당 전 부대변인 등의 열정이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었다. 지금도 기자를 하고 있는 고동우, 현재 진보정치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동원도 초기에 고생을 같이 했다.

    활기차고 헌신적인 젊은 후배들을 중심으로 당시 마포 가든 호텔 뒤의 조그만 공간에서 이후 민주노동당 기관지가 되는 ‘진보정치’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진보정당의 기관지로 자리매김 되더라도 당과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설령 당이 어려움에 봉착하더라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신문, 그리고 이후 신문의 질이 확보되면 거리에서 판매되는 신문을 꿈꾸었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우리는 당 기관지를 만들었고, 당을 창당할 즈음에는 5천 명에 가까운 정기구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진보정치의 후원인이 되어 주었다.

    은수와 같이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진보정치는 지금도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중간에 당 내 문제로 기관지 책임자가 바뀌면서, 수년간 발행해오던 대중적 가치를 버리고, 민주노동당의 ‘당 선전물인 찌라시’로 변질해 버렸다. 나는 지금도 그게 제일 아쉽다. 또 월간으로 발행되던 당 기관지인 ‘이론과 실천’을 거의 혼자서 만들던 울산에서 같이 운동한 최영민이 쫓겨난 것도 그 즈음이다.

    이후 크게 문제가 되는 민주노동당 안의 정파 문제가 그 때부터 싹을 트기 시작했다. 설마하고 사람을 믿었던 순진했던 우리의 문제였다. 지금도 나는 <진보정치>를 그렇게 만든 당시 주역을 아주 많이 미워한다. 울산에서 같이 운동했지만 크게 변절하여 한나라당의 수구꼴통이 되어 버린 신지호처럼 가장 싫어한다.

    “<진보정치>는 반드시 ‘위대한 시작’으로 역사에 새겨져야 한다. 정치와 언론의 두 줄기에서 이제 진보는 모험이거나 실험으로만 끝날 수 없는 역사의 필연이기 때문이다.”라고 창간 때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신 유명한 언론인인 김중배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읽으며 새삼 부끄럽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나 억압, 착취와 차별이 모두 사라진 해방의 세상’의 실현을 지향했던 신문 ‘진보정치’는 지금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교회를 오래 다닌 나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욥기8장7절)”라는 구절을 좋아했었다. 지금도 간혹 음식점에 가면 걸려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구절을 별로 믿지 않는다. 네 엄마는 ‘진보정치’가 변질되기 시작했을 때 “당신들은 왜 만날 회의하고 열심히 한 다음에 항상 죽 쒀서 개를 주냐?”고 힐책했었다. 거의 10년에 걸친 노력 끝에 이제는 진보적인 대중 매체로 갈 수 있었을 ‘진보정치’는 그렇게 무대 뒤로 사라졌다.

    민주노총으로

    수많은 투쟁이 일정한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던 99년 9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전노협 위원장 출신이면서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았던 단병호 위원장이 선출된다. 은수가 양경규 위원장을 “빼빼로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더 빼빼로 아저씨”라고 부르는 그 분이다.

    전노협 당시 두 번이나 구속됐었고, 98년에도 감옥에 있다가 99년에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나와 있었을 때다. 같이 활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자주 뵙기는 했었다. “14~15년 동안 집에 들어간 게 1년 남짓하고,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한 건 불과 한달 남짓하다.”고 언젠가 연맹 간부수련회에서 말씀하신 게 떠오른다. 5번에 걸친 구속과 수배가 말해 주듯 평생을 노동운동에 앞장 선 지도자다. 그 당시 새로 선출된 단 위원장은 나에게 민주노총 조직실장을 제안했고, 연맹은 파견 결정을 내려 주었다.

    수배 중이던 단병호 위원장과 명동성당에서

    4월 19일 진행된 서울지하철 파업과 관련되었던 양경규 위원장은 불구속으로 풀려나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되었다.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학교 은사인 이수호 선생님이 사무총장이었다. 연맹 생활을 시작한 이래 참으로 여러 군데를 돌아다닌 셈이다. 민주노총 추진위를 거쳐 준비위, 그리고 국민승리21, 이어 민주노총까지 경험하게 된 독특한 경우겠다.

    연맹에서 일한 시간보다 파견 기간이 더 길었다. 그 긴 기간 동안 여전히 연맹의 많은 사람들이 큰 힘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프린터를 사준 사람도 있고, 가맹노조에서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빈 공백을 메워주기 위해 두 배로 일한 사무처의 많은 동지들이 있었다.

    민주노총에서 일하자고 했을 때 사실 겁부터 났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나보다 훨씬 치열하게 살아 온 사람들,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민주노총을 지켜 온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민주노총을 그만두고 연맹으로 돌아 온 이후 당시 조직국장이나 부장이었던 사람들이 모두 조직실장을 했던 것이 보여 주듯이 대단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주엽이 아빠인 신언직도 그 때 같이 일했다. 돌아보니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가기 전에 전노협과 민주노총, 연맹의 수년에 걸친 조직실 사업계획과 평가서를 모두 복사하여 공부했던 기억이 새롭다.

    암호를 통해 가야 했던 전국노동자대회

    민주노총은 매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 날을 전후하여 전국노동자대회를 한다. 예전에는 집회 자체를 경찰이 봉쇄하여 비밀스런 ‘작전’을 통해서만 대회 장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장소도 거리에서 하면 바로 잡아가기 때문에 학생회와 얘기를 해서 대학교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당시에는 핸드폰이나 삐삐도 없었을 때였다.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가는 두 번째 칸에 타고 흰 장갑을 낀 사람을 주목하라.” 딱 그렇게만 가르쳐 준다. 마구 상상력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건국대인가? 아님 세종대? 한양대일지도 모르지..’ 지하철 2호선 주변에는 대학교가 너무 많다. 갑자기 흰 장갑이 불쑥 치켜 오르다. “하차해서 4호선으로 갈아타십시오.”

    이미 빽빽하게 그 칸을 채운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거기서 놓치면 대회에 못들어갈 판이다. 조금 더 간 후에 갑자기 내리란다. ‘아 성신여대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뛰어” 소리에 정신없이 뛰기 시작한다. 그렇게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성신여대 뒤를 넘어 한참을 뛰어서 도착한 곳은 고려대학교였다. 산 중턱에는 이미 사수대가 지키고 서 있다. 정문에는 학생들이 화염병을 들고 경찰의 침탈에 대비하고 있기도 했다. 91년도로 기억된다. 아무튼 그런 시절이 있었다.

    99년에 들어서서는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직접 대학교를 찾아다니며 장소 협조 요청을 했다. 물론 대부분의 학교에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중앙대학교를 찾았다. 학생처를 갔는데 누가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어, 이게 누구야? 이근원 아니야?” “누구시죠?” 그리고 기억을 살려보았다. 그는 내가 82년에 시위를 할 때 앞장서서 시위를 막고, 잡기도 했던 학생처 직원이었다. 그 사이에 승진을 해서 높은 지위에 있었다. 그 덕분인지 그 해의 전국노동자대회는 중앙대학교에서 열 수 있었다. 교실에 스팀도 넣어 주었던 기억도 난다. 그 이후 다시 합법적으로 대학을 빌렸던 기억은 별로 없다.

    여의도 농성장에서 맞이한 2000년

    밀레니엄이라고, 새로운 천년을 맞이한다고 분위기가 들떠 있었지만 노동자를 둘러싼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정리해고를 막고, 주5일 노동시간제를 쟁취하기 위해 여의도 국회 앞 농성을 결정한다.

    우리는 국회 앞에 천막 대신 컨테이너를 설치하기로 한다. 그리고 새벽 5시 전격적인 ‘작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컨테이너를 내렸다. 내 기억으로는 처음으로 시도한 컨테이너 농성이었다.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에 안도한 우리는 오후에 중앙위원회를 하러 모두 자리를 비웠다. 장소에는 조직실 두 명과 이수호 사무총장만 있었다.

    우리가 떠난 것을 본 경찰은 바로 침탈하여 지게차를 동원해서 컨테이너를 가져가 버렸다. 그 와중에 이수호 사무총장님이 다리를 다쳤다. 경찰을 만만하게 본 우리의 과오였다. 그렇게 시작된 여의도 농성은 25일 동안 진행되었다.

    그리고 새 천년이 온다는 12월 31일 자정 “2000년을 20대 80의 불평등한 현실을 개혁하고, 나눔과 평등 연대가 물결치는 공동체 사회를 만드는 출발점으로 삼자”는 단위원장의 연설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한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2000년은 그렇게 거리에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필자소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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