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섯 번째 만난 임자
    [산하의 가전사] 중국 현대사를 관통한 두 남녀
        2014년 11월 21일 11: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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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나이로 태어나서건 여걸로 태어나서건 웬만한 팔자 아니면 세 번 이상 장가, 시집 가기는 힘들다.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드 테일러가 8번의 결혼식을 올렸다지만 이건 정말 슈퍼스타급에 해당하는 일이고 ‘화류계’(?)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천국보다 낯선 얘기가 되겠지. 사실 그렇게 끈질기게 결혼하기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도 결혼 서너번 하라면 하겠냐? 그 서너 번 모두가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다면 말이야.

    그런데 여섯 번씩 줄기차게 결혼을 했고 그 마지막에야 진정한 반려라 할 사람을 만났던 행운아 겸 불운아가 있지. 중국의 전 국가 주석 유소기(류사오치)야.

    (중국 혁명가들은 결혼을 서너 번 정도는 우습게 했던 이력의 소유자들이기는 하다마는) 나는 중국 인명에 관한한 원음 표기보다는 우리 식 표기에 익숙하니 유소기라고 칭하기로 한다. 유소기는 내가 몇 달 전 다녀온 중국 호남성 출신이야. 즉 모택동하고 동향이지. “음식이 맵지 않을까봐 무서워한다.”는 호남성 사람이니 어지간히 매운 음식을 좋아했을 것이고 모택동이 즐겨 먹었다는 홍소육을 함께 탐닉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중학교에 다니던 중 전보를 받아. “모친위독급래” 허둥지둥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강녕하셨고 전보의 이유는 자신을 불러내려 혼사를 치르게 하려는 것임을 알게 돼.

    어찌어찌 예식은 치렀지만 즉시로 학교로 돌아간 뒤 다른 데 시집가라는 편지를 보내지만 이 시골 처녀는 요지부동이었지. “나중에 다른 여자하고 아들 낳으면 하나만 나한테 보내 주세요.” 이게 첫 번째 ‘아내’의 요청이었고 유소기는 자신의 땅을 그녀에게 주고 후일 다른 부인과 태어난 아이를 보내 키우게 함으로써 의리를 지켜.

    두 번째 결혼한 여자는 하보정이라는 혁명 동지였어. 유소기는 하보정을 깊이 사랑했고 아이도 셋 낳지만 하보정은 국민당군에 체포돼 감옥에서 살해돼. 그때쯤 유소기는 나는 백년해로 할 팔자가 아닌갑다, 직감을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유소기 주변에는 자의건 타의건 끊임없이 여자가 맴돌았고 유소기도 굳이 마다하지 않아. 세 번째 결혼한 이도 혁명 동지였는데 무척 성정이 드세고 독립적인 여자였지. 남편을 쥐고 흔들고 주방으로 들여보내 요리를 시킨 뒤 그 음식을 즐기는 무서운(?) 중국 여자의 전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여자는 남편이면서 혁명 지도자이고 당 간부인 유소기의 존재를 힘겨워했고 결국 유소기의 곁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어.

    첫 번째는 듣도 보도 못한 시골 처녀, 두 번째는 애틋하지만 비극으로 끝난 사랑, 세 번째는 “당신 명령을 받는 건 싫네요.” 하고 떠나버린 왈가닥, 그리고 네 번째는 뭐게?

    슬프게도 바람둥이. 왕건이라는 이름의 이 여자는 신사군 간호사 출신이었는데 유소기는 이 여자가 자신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줬다고 술회하기도 했지. 상당한 바람둥이였던 이 여자를 유소기는 감당하지 못했고 이혼 후 이 여자와 사이에서 난 아이들도 엄마와 만나지 못하게 했는데 이후 문화혁명 때 이 왕건은 작심을 하고 유소기를 물어뜯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유소기는 절감했을 거다.

    다섯 번째 여자는 뜻밖에도 건강상 문제가 있었어. 그래서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평생 그곳에서 산다.

    이거 어쩌나 다섯 명의 여자를 설명하는 데만 숨이 차구만. 하지만 유소기에게는 진짜 사랑이 남아 있었어. 나이 쉰에 애들은 다섯 명의 홀아비. 거기다 늦게 낳은 1남 1녀 (왕건의 아이들)은 아직 어린애들이었으니 장가 가기에는 거의 최악의 조건이었다고 봐야지. 아무리 혁명 지도자라고 해도 말이야. 그때 나타난 게 왕광미라는 명민한 아가씨였지.

    유소기

    왕광미와 유소기

     원래 그녀는 이과였어. 북경의 명문 중학교에서 ‘수학여왕’이라는 찬사를 얻었던 재원이었고 ‘퀴리부인’을 꿈꾸는 물리학 석사였지. 하지만 중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와중에 공산당의 영어 통역으로 나서게 됐고 어찌어찌 유소기와 엮어지게 됐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이였고 또 국공내전 한창이던 시절 유소기가 “같이 움직입시다.” 해도 “그냥 여기 있을래요.” 하면서 멀뚱멀뚱 바라보던 감성 제로의 아가씨였다고. 후일 “내가 공부한다고 연애를 못해 봐서 그랬다.”고 투덜거렸다고 하는데.

    나이 차이와 감성 차이와 전공 차이와 이력 차이를 뚫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왕광미에게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전혀 ‘물리학 석사’답지 않아 “이전에 그이의 책도 읽었고 그이를 존경합니다. 남자가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림하는 것을 보니 측은했고 내가 잘 보살펴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그이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니까요.”

    이 결혼은 유소기에게는 그야말로 뒤늦게 찾아온 축복이었어. 결혼 후 그가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온갖 수모를 당하고 유폐된 끝에 사망한 1969년 11월 12일 이전까지의 20여년 간, 왕광미는 스물 세 살 연상의 남편을 받들고 내조하면서 전처의 아이들까지 살갑게 거두는 현모양처의 역할을 다한다.

    전처의 아이들도 이 어진 새어머니에게 예를 다했고 유소기는 국가 주석으로서 새로이 설립된 신생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반 항해를 주도했지. 또 국가 주석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는 중국의 ‘제일 부인’ 즉 퍼스트 레이디로서도 세계에 알려졌지.

    그런데 유소기는 고향 친구 모택동에게 배신을 당한다. 모택동은 중국 혁명 직후 유소기에게 “지금 우리는 자본가들과 단결해야 한다. 동지들이 감히 말을 못하지만 자본가가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다”고 말했고 유소기는 자기들 세상이 왔다고 기세등등한 노조 지도자들에게 “자본가들은 투쟁대상이 아니다. 쟁취대상이다. 합작과 투쟁을 병행해야 한다. 투쟁만 하고 합작을 거부하는 것은 착오다. 합작만 강조하며 투쟁을 뒤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면서 유연함을 발휘했었지.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중) 그러나 모택동은 그의 이전까지의 업적을 송두리째 지워버릴 만한 만행을 기획했어. 알다시피 문화혁명이야.

    주자파, 즉 자본주의 주장하는 족속들, 그리고 봉건주의자, 전쟁범죄자, 미 제국주의자의 간첩 등등 별의별 희한한 죄목들이 모택동 어록을 들고 설치는 홍위병들에 의해 창조됐고 단죄됐고 내걸리고 조리돌림을 당했어.

    칠십 노구의 노혁명가 유소기는 그 죄수(?)들의 맨 앞에 있었지. 유소기가 고향 친구에게 당했다면 왕광미는 그 마누라 강청의 질투 때문에 다치지. 자기보다 예쁘고 우아한 여자가 중국의 퍼스트 레이디로 행세하는 것을 배 아파 못견뎌했던 이 모진 여자는 왕광미에게 최대한의 복수를 퍼부어.

    버마 방문했을 때 너무 장식품 없으면 없어 보인다는 관료들의 강권으로 진주 목걸이를 했는데 그걸 바다에 빠뜨렸어. 당시 버마의 실력자 네윈이 “버마 땅에서 잃었으니 버마가 보상한다.”면서 버마 특산 루비 목걸이를 선물했는데 강청은 이를 보고 득득 이를 갈았고 후일 왕광미는 홍위병들이 그 목걸이를 비난하며 조롱삼아 둘러 준 탁구공 목걸이를 걸고 인민재판정에 서야 했지.

    강청은 왕광미의 친정 오빠가 국민당군 출신으로 미국에 있음을 기화로 간첩으로 몰아 죽여 버리려고까지 해. 막판에 모택동이 그건 너무하다고 막았다지만.

    유소기는 자신을 구타하고 모택동 어록으로 찔러대면서 악을 쓰는 홍위병들에게 이렇게 피를 토한다. “여러분들이 나 개인에게 어떻게 대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미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광기에 사로잡힌 홍위병들은 모택동 외의 주석 따위는 안중에 없었어.

    그는 두 팔을 뒤로 뻗고 허리를 굽히는 치욕적인 자세로 대중 앞에 선다. 그렇듯 곤욕을 치르고 있는 유소기를 본 왕광미는 자신의 목을 잡고 있던 홍위병을 뿌리치고 유소기 앞에 다가서 그 손을 잡아 준다. 아마 적어도 그 해 시뻘건 모래에 뒤덮인 중국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숨구멍 같은 장면이었을 거야.

    끝내 유소기는 유폐 끝에 죽었고 왕광미는 장장 12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한다. 그녀는 모택동이 죽고 그 아내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이 숙청된 뒤에야 복권된다. 그녀는 여전히 유소기의 아내였어.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다.”라는 남편의 말을 되새기기라도 하듯, 그녀는 ‘행복공정’이라는 이름의 빈민 돕기 봉사 활동을 여생 동안 하다가 여든이 넘어서 생을 마치게 되지.

    그녀가 죽기 전 했던 가장 감동적인 풍경 중의 하나는 자신이 거느린 유씨 집안과 모택동의 집안 사람들을 죄다 불러서 화해의 자리를 만든 거란다. 유소기뿐 아니라 유소기의 장남은 핵물리학자로 중국 핵폭탄 개발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었지만 홍위병에게 시달리다 자살(또는 타살?)했고 그 외 가족들의 고생도 말도 못했었지. 하지만 왕광미는 그 자리를 만들고 화해의 웃음꽃을 피운다.

    이때 모택동의 외손녀가 했다는 말은 가히 왕광미라는 여자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해.

    “바다보다 넓은 것은 하늘이며 하늘보다 넓은 것은 사람의 마음”

    아마 하늘에서 유소기와 모택동도 (모택동 이 사람은 하늘에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너무 사람을 많이 죽여서) 그 자리를 바라보며 웃었을 거다. 그러면서 유소기는 고향 친구 모택동의 어깨를 치며 이렇게 얘기했겠지. “이거 봐. 내가 마누라복은 자네보다 열 배 낫다고.” 그러면 모택동은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 “이거 봐 나도 여섯 번씩 결혼했으면 저런 여자 만날 수 있어. 난 네 번밖에 안하지 않았나.”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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