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키 '민중의 집'은
    ‘있어야 할 곳’에 늘 있었다
    급진성과 대중성, 투쟁과 지역활동의 양 측면 모두 갖춰
        2014년 11월 18일 03: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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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와 마포 민중의 집 관계자들이 최근 스웨덴과 터키의 <민중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운동에 대해 몇 차례 강상구 구로 민중의 집 대표가 기고할 예정이다. 그 첫 글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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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팔트가 끝나가는 지점에 거대한 계곡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저 ‘밸리’라고 부르는 곳. 앙카라 중심부에서 승용차로 20여분 만에 도착한 그곳은 철거촌이었다. 벌써 8년째 싸우고 있는 이 오래된 철거촌의 입구에는 민중의 집이 있다.

    “터키 전통기타 강습도 하고, 음악교실, 시각예술 강좌, 문학강좌도 연다. 20명쯤 모여서 하는 여성학 세미나도 있다. 잠깐 들러 차를 마시거나 이야기하다 가는 주민들은 굉장히 많다.” 민중의 집 활동가 이케르(Iker, 23)의 설명이다.

    물론, 민중의 집 활동이 이런 ‘소프트’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중의 집은 철거반대투쟁에도 늘 함께 했다. 부서진 집들이 곳곳에 방치된 철거촌은 80-90년대 한국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이 골목 저 골목에는 간간이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철거반대대책위원회 사무실에는 그 동안의 투쟁을 생생히 보여주는 신문기사 스크랩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8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내쫓기 위해 정부는 전기와 물을 끊었다. 주민들은 빗물을 받고, 밸리 위를 지나는 전신주에서 전기를 끌어 왔다. 경찰이 번번이 진압에 실패하자 마피아가 동원됐다. 마피아들은 언덕 위에서 총을 쏘며 마을을 습격했다고 한다. 앙카라 시내 대학의 학생들과 민중의 집 활동가들이 밸리에 집결해 이들과 맞섰다. 희생자가 적지 않았다.

    철거촌에 비가 오면 계곡으로 물이 휩쓸려 늘 홍수가 난다고 한다. 방문하기 며칠 전에도 비가 왔다는 데 곳곳이 빗물에 떠내려 온 쓰레기 천지다. 그 쓰레기 더미 옆에 빨강, 파랑, 노랑으로 예쁘게 단장한 놀이터가 생경하다. 민중의 집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만든 놀이터다. 아이들은 어디서나 놀아야 하니까.

    투쟁 속에서도 삶은 지속되고, 민중의 집은 투쟁과 삶 모두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다.

    터키 민중의 집은 1932년 처음 생겼다.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케말 아타투르크가 개혁의 지지를 조직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민중의 집은 17개 도시에서 시작됐는데 곧 500개로 늘었다. 시골 지역에서는 민중의 집의 지소 같은 형태의 ‘민중의 방(people’s room)’이 만들어졌고 1940년대 말 무렵에는 4,000개를 넘어섰다. 하지만 1950년 야당이 집권하면서 민중의 집은 폐쇄되었다.

    민중의 집이 다시 부활한 건 1963년 ‘혁명의 길’이라는 맑스레닌주의자 그룹에 의해서다. 이들은 민중의 집을 전국적 혁명운동의 컨트롤센터이자 주민접촉거점으로 운영했다. 터키 민중의 집 역사의 2기에 해당하는 시기다. 2기 민중의 집 운동은 1980년 군부 쿠데타로 전국의 민중의 집이 모두 폐쇄되면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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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민중의 집이 재건된 건 1987년이다. 민중의 집은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터키 민주노총(DISK)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특히 ‘주거권’, ‘무상의료’, ‘무상교육’, ‘여성과 장애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매진하고 있다.

    이스탄불 ‘게지 공원’ 개발 공사 저지 시위에서 촉발되어 작년 한해 터키를 휩쓸었던 반정부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시위 국면에서 9명이 경찰의 총이나 최루탄 등에 맞아 사망했는데, 이 가운데에는 민중의 집 활동가도 있었다.

    투쟁적인 운동 단체는 마을 주민을 직접 만나는 사업은 잘 하지 않고, 마을단체는 투쟁하지 않는 경향이 한국에는 있는데 터키 민중의 집은 양쪽에 모두 열성적이다.

    어느 민중의 집을 가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름학교가 있으며, 모든 곳에서 여성학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노동영화제도 민중의 집이 주최한다. 앙카라에는 민중의 집이 세운 여자대학생 기숙사까지 있다. 민중의 집이 투쟁과 삶을 모두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이유다. 현재 터키에는 이런 민중의 집이 약 70여 곳 있다.

    앙카라시 ‘마막(Mamak)’ 지역은 ‘리틀 모스크바’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좌파 지역운동이 워낙 활발한 탓에 붙여진 별칭이다. 이곳에만 5개의 민중의 집이 있다. 5곳 가운데 한 곳은 도서관으로 운영된다. 작년 반정부 시위 중 사망한 소년의 얼굴이 벽면에 그려져 있는 이 도서관에는 전국에서 기증 받은 책들이 꽂혀 있다. 이곳에서도 역시 회원들과 함께 하는 여성학 세미나, 아이들을 위한 여름학교, 작가 초대 사인회 등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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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모두 함께 터키를 다녀온 마포 민중의 집 정경섭 대표의 페이스북

    동네에는 민중의 집이 최근 들어 벌이고 있는 전쟁반대 캠페인 포스터가 구석구석까지 붙어 있다. 터키와 맞닿아 있는 시리아의 도시 ‘코바네(Kobane)’에 IS(이슬람 국가)가 진입한 후 그 곳에 살고 있던 쿠르드 족들이 학살당하고 있고, 학살을 피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들을 돕고, IS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을 터키 정부에 요구하는 캠페인이다. 그렇지 않아도 앙카라의 ‘명동’ 키즐라이(Kizilay) 거리에서, 민중의 집 활동가들의 서명운동 탁자 옆에 시민들이 후원한 물품이 가득 쌓여 있는 걸 관심 있게 지켜봤던 터였다.

    활동가와 함께 마을을 걷는 동안 주민들이 끊이지 않고 다가와 말을 걸고 악수를 한다. 누군가 보여준 사진에는 이 거리에서 민중의 집 조끼를 입은 활동가가 최루탄 발사 차량과 맞서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한국의 전투적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경찰에 대항하던 장면과 닮았다.

    동시에 민중의 집은 지방선거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해 왔다. 민중의 집에 따라서는 5~6명의 당선자가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가부장제와 싸우기 위해 주로 여성활동가들을 후보로 내세우고 있다.” 함께 있던 하디(Hadi, 28)의 설명이다.

    앙카라뿐만 아니라 이스탄불에도 ‘리틀 모스크바’와 유사한 곳이 5~6개 있다. 그 가운데 한 곳인 오크메이다니(Okmeydan)는 2013년 반정부 시위 당시 빵을 사러 나온 14세 소년이 경찰의 최루탄에 머리를 맞은 사건이 일어난 지역이다. 그는 9개월간의 투병 끝에 결국 사망했다. 오크메이다니 한 가운데 민중의 집이 있다.

    이곳의 한 활동가는 “이 동네 인구가 4만4천 명 정도인데, 동네 사람들 반 이상이 봉제공장에서 일한다. 공장의 대부분은 영세하고, 노동자들은 다 비정규직이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민중의 집은 비정규직을 조직화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한 봉제공장은 공장 사장을 포함하여 총 9명이 근무하는 곳이었는데, 사장님도 민중의 집 회원이었다. 왜 민중의 집 회원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민중의 집이 우리들의 삶에 깊이 들어와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민중의 집에 가서 의논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다.”

    원래 그는 큰 의류회사의 직원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이후 대기업들이 노동자들을 대거 내보내면서 현재와 같은 하청구조가 생겼고, 이 때 그도 노동자였다가 사장이 되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사장인 그는 실제로 노동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노동자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가 민중의 집에 가입한 이유이다.

    대기업에 지배된 작은 회사들, 그리고 그 작은 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처지는 한국이나 터키나 다를 바 없었다. 이곳에서 민중의 집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

    오크메이다니 민중의 집 활동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역주민들의 서명을 모아 정부에 공공보건센터를 세워달라고 요구하여 성공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들의 복지 서비스를 가난한 회사가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크메이다니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지역차원으로 결집해 정부에 요구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현재 이들의 또 다른 목표는 직장 여성들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돌봄센터를 동네에 세우는 것이다.

    터키 민중의 집들은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 2014년 5월 터키 소마(Soma)에서 광산이 매몰되어 30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난 직후 민중의 집은 소마에 ‘광부의 집’을 열었다. 광부의 집은 참사 전부터 사고의 징후가 있었으나 이를 무시한 어용노조, 안전 예산 줄이기에 혈안이 되었던 회사, 수차례의 안전점검에서도 문제없다는 말만 되풀이한 관계 당국에 맞서 광부와 그 가족들이 스스로 자기 권리를 찾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최근 소마에서는 콜린(Kolin)이라는 기업이 정부의 비호 아래 올리브 나무를 베어 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주민들은 이를 막기 위해 연일 규찰을 서고 있지만 이미 6,000그루의 나무 가운데 1,000그루가 사라졌다. 올리브 나무가 다 사라지면, 올리브에 의지해 살아오던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소마 광부의 집은 생태주의자들과 함께 이 투쟁에도 함께 한다.

    터키 중남부 하타이(Hatay)지역의 민중의 집은 주민들과 함께 반전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쿠르드 족에 대한 학살을 멈출 것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 난민들에 대한 후원 조직, 반전 캠페인 등이 민중의 집의 주요 역할이다.

    터키 민중의 집은 다양한 문화활동으로 주민들과 함께 하는 걸 잊지 않으면서도, 지역 곳곳에서 비정규직 조직화, 철거반대, 안전한 노동 확보, 올리브 나무 지키기, 전쟁 반대 등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1987년 민중의 집을 다시 열 때,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서 한국 노동운동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게 아주 많았다.”

    터키 민중의 집 운동은 한국의 운동이 노동현장에 밀착했던 그 정신과 태도로 지역에 밀착했고, 자신들만의 급진성과 대중성을 나름의 방식으로 조화시키고 있었다. 한국 노동운동으로부터 배웠다는 터키 민중의 집 운동.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배워야할 때이다.

    필자소개
    구로 민중의 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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