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주목해야 할 쇼펜하우어
[책소개] 『쇼펜하우어, 돌이 별이 되는 철학』(이동용/ 동녘)
    2014년 11월 15일 12: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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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지금인가? 수많은 현대들은 말한다. 힐링이 필요하다고. 생존의 갈림길에 선 사회의 약자들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안착한 이들조차도 삶을 버거워한다.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0년 연속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이제 누군가의 자살은 익숙한 기삿거리다. 죽음에 무뎌진 만큼 너무도 쉽게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 만연화되어 있다.

몸도 마음도 병들어가는 시대. 그래서 그들은 치유를 위한 방법을 좇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과 삶에 대한 본질을 망각한 일시적인 치유에 불과하다. 허상을 좇는 셈이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미생>에 수많은 시청자가 열광하는 이유는 일상의 고단함을 사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감 없이 드러나는 현실을 마주하며 공감하고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쇼펜하우어의 철학도 이와 같다. 그의 철학은 현실을 마주한다. 낭만에 빠져 헛된 희망을 꿈꾸게 하지 않는다. 외려 진실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일종의 비관주의 철학으로 부정을 힘을 길러 준다. 쇼펜하우어 철학은 부정과 거부의 방법을 통해 속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바로 삶에 대한 수많은 독설에도 불구하고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익숙하지만 낯선 이름, 쇼펜하우어. 수차례 들은 이름이건만 그의 사상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고 허무주의와 영원회귀라는 철학적 사상을 정립한 니체만큼의 독자층이 없다. 그의 명성에 비해 턱없이 부끄러운 현실이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를 둘러싼 수많은 오해(특히, 그가 자살을 예찬했다는 오해)를 바로 잡고,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가진 진가를 전달한다. 그의 염세주의 철학은 고통에 짓눌려 삶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위로의 해결책으로 다가온다.

그의 철학은 자살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답답한 순간에 새로운 세상으로 확 트이는 탈출구를 제시한다. 삶의 무게를 극복하면 마치 육중한 돌이 별이 되어 은하수로 충만한 우주 공간의 한 일원이 되는 듯한 행복감을 얻게 된다.

모든 것을 부정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쇼펜하우어의 목소리는 존재의 무거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지금 우리 시대에 다시 주목할 만하다. 일시적인 치유나 회피는 삶의 본질에서 오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쇼펜하우어를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독자다. 그의 책 첫 페이지를 읽은 후 확고하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을 것을 알았고, 그가 한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독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곧 그를 신뢰했고, 지금도 9년 전과 똑같이 신뢰한다. 나는 그가 마치 나를 위해 책을 쓴 것처럼 그를 이해했다. _프리드리히 니체

쇼펜하우어

<책 소개>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인정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하면 떠올리는 수많은 선입견과 오해들이 있다. 우선 염세주의 철학에 대한 선입견이 그렇다. 염세주의 철학이라는 말과 함께 어김없이 따라오는 것이 우울한 철학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부정적 시각을 떠올린다. 모든 것이 다 쓸모없고 가치 없다는 의미만을 두고 보면 죽음 혹은 자살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인정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끊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염세주의 철학은 삶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것은 버림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안 된다. 신체는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신체는 결코 폐기의 대상이 아니다. 자살은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자살은 하나의 욕구가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정신적 고통이 너무도 커서 육체의 생명을 끊어 버리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즉, 자살은 고통에 희생 되는 꼴이다.

자살은 “이 비참한 세계로부터의 참된 구원이 아니라 외관적인 구원일 뿐”이며, 또 이 “참된 구원을 위한 최고의 윤리적 목표에 도달하기를 거부하는 도피”에 불과하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바로 이 점에서 자살은 그가 원하는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을 극복하는 사람에게는 세계가 열린다._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오직 우리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시작에는 여행을 통해 넓힌 식견에 있었다. 그중 소년시절, 툴롱에 있는 옛 감옥에서 고야가 그린 <범죄만큼이나 야만적인 감금>을 본 쇼펜하우어는 불쌍하고 비참한 인간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지학(志學)의 나이를 조금 넘긴 열일곱 살에 쇼펜하우어는 “어렸을 때 부처처럼 병, 고통 그리고 죽음과 같은 인생의 비참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긴다.

고통으로서의 인생에 대한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그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모든 인생은 깊은 비참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식이 그를 철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이어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염세주의의 특징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문장과 함께 그의 철학이 형성된다.

염세주의 철학의 핵심은 자기 인생의 진정한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 인생에 진정한 구원의 손길을 뻗을 수 있는 이는 오직 자신뿐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명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가 현재를 가치 있게 보는 이유는 그곳에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삶을 인식하기 위한 필수요소다. 고통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강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일정 기간의 견딤을 거쳐 인식에 이른다. 염세주의 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계와 인생으로부터, 즉 속세로부터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다.

니체는 왜 쇼펜하우어에게 열광했나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처음 출간된 당대에만 하더라도 그는 철저히 외면 받았다. 심지어 그의 책은 20년 동안 전혀 읽혀지지 않았고, 출판된 지 16년 만에 폐지가 되는 운명을 감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를 추종하는 열렬한 독자들이 있었으니 바그너, 니체, 릴케, 프로이트, 헤세, 토마스 만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추종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호기심을 유발한다. 심지어 니체는 어느 고서점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처음 접했을 때, 어떤 정령이 내 귀에다 대고 “이 책을 집으로 가져가라”고 말했다고 기록한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 구석에 몸을 던지고 쇼펜하우어의 책을 탐독한다. 무려 14일 동안 정확히 6시에 일어나 새벽 2시까지 먹지도 않은 채 그 책만을 읽었다.

니체는 마치 자신을 위해 쇼펜하우어가 그 책을 쓴 것처럼 그를 이해했다고 말했고, 그의 철학에 열광했다. 그 흥분은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그의 열정은 바그너와의 우정으로 이어졌다. 쇼펜하우어를 통해 삶에 대한 시각을 갖게 된 니체는 그것을 시발점으로 삼아 이 시대에 ‘저항’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염세주의 철학으로부터 니체의 철학은 탄생한다. 니체의 유명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루는 영원회귀 사상은 바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고독도 능력이다

진리를 위해 고독한 싸움을 했던 쇼펜하우어. 당대의 유명한 철학가였던 헤겔과 적대적 관계에 있던 쇼펜하우어는 헤겔 철학의 주류를 이루는 낙천주의를 일종의 “엉터리 물품”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외양은 거짓된 빛깔을 띠고 있고, 고통스러운 것은 언제나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쇼펜하우어의 눈에 비친 세상과 삶은 오로지 고뇌로 가득 차 있었다. 삶의 본질은 오직 고통뿐인데, 낙천주의 사상은 그 반대를 말한다는 점에서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그런 발언에 대해 “어리석은 사고방식”, “비양심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인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뇌에 대한 쓰라린 조롱”이라고 가차 없는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판 서문을 쓰기 전인, 1833년부터 그는 세상과 단절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고독도 능력이라고.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능력은 오로지 고독에 대한 능력으로만 판가름된다. 그것은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인식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제시된다.

모든 의욕과 결핍으로부터 벗어나, 진지해지고 관조하라는 쇼펜하우어의 외침은 모든 것이 사물 그대로 인식되는 순간을 위한 철학적 실천이기도 하다. 언제나 궁극적으로는 혼자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 고독이 가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고통이 있기에 삶은 존재한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듯한 막막함, 미궁 속에 갇힌 듯한 답답함,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안타까움, 어떻게 해도 안 될 것만 같은 무기력 등 인간이 처한 모든 문제 앞에, 고통이란 끔찍한 녀석이 버티고 서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지닌 존재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삶은 견디기 힘들다.

삶, 그 자체가 고통이라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이 고통스러운 삶과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은 불가능한 것일까? 세상은 고통의 도가니이자 감옥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고통의 필요성을 인식한 철학자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생철학인 동시에 염세주의 철학이라고 불린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의욕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모든 욕망이 고뇌의 뿌리다. 하나의 소원을 이뤄 낸다 하더라도 열 가지 소원이 눈 빠지게 기다린다.

지속되는 욕망과 계속되는 요구는 고통과 고뇌를 지속시킨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인생은 순환의 사슬로 꽁꽁 묶여 있다. 마치 고야의 그림 속에 있는 노예처럼 말이다. 욕망을 불태우며 긴장과 갈등을 일삼는 우리 모두의 모습에서 고통은 반복된다. 그렇기에 고통을 안고 방황하는 정신에게 쇼펜하우어는 삶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제안을 한다. 삶에의 맹목적인 의지를 완전히 버리라는 것. 그것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핵심이다.

가장 오해되고 왜곡된 철학자, 쇼펜하우어

고독한 저항가였던 쇼펜하우어. 당대 최고의 철학가인 헤겔을 거침없이 비판했으며, 사회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은둔을 자처한 철학가. 칸트의 철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완성한 철학가. 현대철학의 시발점이 된 철학가. 니체, 바그너, 프로이트, 릴케, 헤세, 토마스 만 등 각계의 대가들은 쇼펜하우어에게 열광했고 그의 철학을 지지했다.

고통으로 얼룩진 타인을 향한 시선에서 출발한 쇼펜하우어의 경험적 철학은 다수의 학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삶에의 의지의 부정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맹목적인 본능으로 내몰린 도시 생활에 대해 비판의 거리를 갖게 한다.

그의 사상은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던 욕망의 불꽃을 잠시 식히고 냉정한 인식으로 충만한 새로운 삶으로의 문을 열어 준다. 삶의 어려움과 그에 동반되는 고통을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는 자에게 염세주의 사상은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삶을 복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염세주의 철학의 목적을 다시 한번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 돌이 별이 되는 철학》은 쇼펜하우어가 서른 살에 완성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현대인의 관점에서 읽기 쉽게 리라이팅한 책이다. 우리의 삶에 좀 더 친숙하게 다가온 쇼펜하우어의 사상 해설서인 셈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독파하고자 시도했던 이들은 수많은 외래어와 심지어 인도 고대어까지 인용문으로 등장하는 쇼펜하우어의 문체를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읽기를 포기한다. 그의 문체는 칸트나 헤겔보다는 서술적인 면에서 다소 호흡이 짧아졌지만 그래도 독일 전통의 만연체와 분석적 서술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독자들의 입장에서 여전히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책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했고, 각 부분에서 서로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철학자는 이 네 부분들을 각권으로 해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 놓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각 권의 내용을 대변하는 모토를 하나씩 달아 놓았다는 점이다. 《쇼펜하우어, 돌이 별이 되는 철학》은 그 네 가지 모토인 루소, 《파우스트》, 플라톤, 《우파니샤드》의 인용구를 언급하며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만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또한 쇼펜하우어 사상의 뿌리가 된 칸트의 철학을 비롯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니체의 철학을 언급하며, 이들의 철학과 쇼펜하우어 철학의 차이점을 밝히며 쇼펜하우어 사상을 좀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클림트와 호도비에키, 뒤러, 로세티, 몬토르솔리, 라파엘로, 다비드, 부쉬 등의 그림과 그 외 조각 작품들, 그리고 영화화 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예술들을 언급하며 내용을 풍부하게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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