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케티와 좌파,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가?
    다른 언어와 다른 담론틀로 분석하는 같은 현실, 같은 모순
        2014년 10월 28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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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에 대한 남종석씨의 독서노트 2부를 게재한다. 피케티가 바라보는 자본주의 분석과 함의, 대안에 대해 필자는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맑스주의의 담론과 분석틀과 다른 각도에서 사물과 현실을 바라보지만 그와 맑스주의는 동일한 측면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극복하고 지적하고 싶은 자본주의의 모순, 불평등과 양극화, 저성장  체제의 지속, 사회의 불안정화 등 다른 언어로 표현되지만 같은 모순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좌파는 피케티를 수렴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단 그의 해법과 의견은 우리의 현실과 조건, 힘과 방향성에 근거하여 변형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의 힘에 근거할 때 그의 해법과 우리의 해법은 해후할 수 있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남종석의 독서노트 1부 링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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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마르크스와 피케티

    마르크스에 대한 피케티의 편견은 책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이윤율 저하 경향이란 매우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운동적인 과제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민주적 토론공동체에서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상적 담화 공간’을 염원하는 하버마스의 추종자이다. 혹은 그는 자신이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면 부르주아들이 그 주장에 동의할 것을 기대하는 점에서 ‘공상적’ 유토피아주의자이다. 그는 사회변동에 있어서 계급투쟁의 효과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피케티는 생산과정에서의 계급 갈등을 다루지 않는다. 자본간 경쟁도 다루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통계자료를 통해 장기적인 역사적 추세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불평등을 논하기보다 생산과정 내에서의 착취와 계급투쟁에 더 주목했다면 피케티는 그 모든 과정의 결과로서 어떻게 부가 재분배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의 종속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노동의 소외, 억압, 배제 따위는 그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생산과정은 주어져 있는 것일 뿐이다. 생산과정이 어떻든 제대로 분배만 된다면 자본주의는 제대로 굴러갈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렇듯 피케티의 방법론이 마르크스주의의 그것과 뚜렷이 구별되지만 그의 주장이 마르크스의 그것과 완전히 대립되는 것만은 아니다. 피케티는 자본주의의 제1법칙을 논하면서 자본수익률이 일정하게 주어진 조건에서 자본-소득 비율이 상승하면 자본소득배분율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수식1

    반면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법칙은 자본소득배분율이 역사적으로 일정하게 주어지는 조건 하에서 자본생산성이 하락하면 이윤율이 하락한다고 주장한다.

    수식2

    간단히 말해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법칙은 자본생산성 하락 법칙이다. 그런데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소득 비율은 자본생산성의 역수이기 때문에 자본-소득 비율이 상승한다는 것은 자본생산성이 하락한다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둘 다 자본생산성이 하락한다고 주장하지만 마르크스는 이윤율이 저하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피케티는 이윤율이 고정되고 자본소득배분율이 상승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대체탄력성이 1보다 크다는 주장도 마르크스주의의 주장과 완전히 다른 주장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다수 자본의 경쟁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절약적인 기술진보를 강제 받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가치 구성이 고도화된 자본가일수록 그렇지 못한 자본가들이 생산한 잉여를 영유하기 때문이다. 개별자본가들은 고정자본을 더 많이 소모하고 노동의 수요는 점차 줄이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문제는 노동에 비해 고정자본을 많이 소비할 경우 노동생산성이 같은 속도로 증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동에 비해 고정자본 소모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노동생산성 증가는 둔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법칙이다.

    피케티는 앞에서 보았듯이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절약적 기술진보로 인해 대체탄력성이 1보다 작다고 주장한다. 대체탄력성을 구성하는 자본-노동간의 비율은 마르크스가 쓰고 있는 자본의 기술적 구성과 같은 개념이고, 노동의 한계생산성의 상대적 하락은 노동의 평균생산산성의 하락과 매우 유사하다.

    피케티2

    토마 피케티

    피케티의 논의 자체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정상상태(stationary state)에 대한 논의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상태란 성장이 정체되는 구조적 불황기를 일컫는다. 마크스주의자들은 다수 자본의 경쟁 속에서 개별 자본가들은 고정자본 소비를 더 많이 해야 하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생산성을 하락시킨다고 주장한다. 자본생산성이 하락하면 이윤율이 저하하며, 이윤율 저하는 자본의 투자회피로 경제가 지속적으로 침체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피케티는 이것을 경제적 정세와 상관없이 역사적으로 관철되는 법칙이라고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것은 언제나 관철되는 법칙이 아니라 불황기 즉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의 시기에 관철되는 법칙이라고 주장한다.

    피케티가 제시하는 역사적 평균은 경제의 성장국면과 하강국면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경제적 정세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이윤율이 저하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율 반등시킬 수 있는 반경향을 이루는 힘들이 소진되면,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피케티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의 불황기의 특징으로 묘사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마르크스는 불황기에 이르면 투자가 감소하고, 기업들은 경쟁자들을 인수합병하거나 시장에서 퇴출시킴으로써 시장지배력을 확대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아리기와 같은 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산업 이윤율이 낮은 상태에서 자본은 점차 금융부분 투자에 더 큰 매력을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금융부분의 이윤율이 산업 이윤율을 넘어섬으로써 금융주도적 축적국면이 전개되는 것이다. 더불어 금융부분은 그 가속도의 원리에 따라 불안정성은 더 커지며, 붕괴의 위험도 훨씬 높아진다. 피케티가 제시하는 자료들은 마르크스주이자들의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 한다. 벨 에포크의 시대에 부의 불평등이 더 커진다는 피케티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더불어 피케티는 자본수익률을 논함에 있어서 이자와 배당, 임대료를 모두 자본수익률에 포함시켰는데, 이것은 금융주도적 축적국면에서 산업자본조차 금융부분에서의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금융주도적인 축적국면에서 자본은 생산적인 기여를 통한 성장보다 이자, 임대료, 배당을 통한 수익을 추구한다. 이렇듯 자본을 자산과 동일시한 피케티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금융자본주의 비판과 유사한 점이 있다. 자본주의는 점차 수탈성을 뛰는 퇴행적인 체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의 장기 전망에 있어서도 마르크스주의와 피케티는 수렴되는 측면이 있다. 피케티는 자본주의는 장기적으로 저성장 상태로 수렴한다고 주장한다. 윤소영 선생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현재의 이윤율 저하 경향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제도적 혁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저성장 상태가 지속된다면, 노동에 대한 자본의 공격은 지속될 것이고 자본 간의 경쟁 역시 더 격화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노동의 불안정성을 증대시키고, 저임금화를 지속시킬 것임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금융주도적 축적국면이 지속된다면 경제의 불안정성은 더 강화될 것이며, 사회적 혼돈은 더 커져갈 것이다.

    이와 같은 불안정은 민족 간, 인종 간 갈등을 격화시킬 수도 있다. 로버트 실러와 같은 경제학자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를 저성장과 불안정성의 증대가 낳은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헛소리가 아니다. 피케티가 불평등이 지속되는 체제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큰 범위에서 같은 주장이다.

    그는 비록 체제의 정당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갈등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불평등이 지속된다면 또 다른 파국이 초래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관적인 논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그의 해법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해법은 근본적으로 다르겠지만 말이다.

    6. 세습사회의 재등장?

    [21세기 자본]에 대한 대부분의 논쟁은 그가 제기하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법칙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제2법칙이 과연 맞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핵심적인 쟁점이 되었다. 앞의 논의들은 이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필자는 그가 비록 신고전파경제학의 논리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불황기를 분석하는 것과 유사점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물론 피케티가 사용하는 생산함수에 대해 필자는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그의 분석에 논리적 결함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논의가 갖는 맥락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21세기 자본]에 대한 대부분의 논쟁이 그가 제시한 자본주의의 법칙에 관한 것으로 흘러가다보니 이 저작이 갖는 다른 매력이 종종 간과되는 경우가 있다.

    [21세기 자본]의 진정한 매력은 그가 불평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3부에 있다. 그는 19세기가 세습자산에 의한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20세기는 노동소득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주장한다. 2000년 현재 노동소득에서 상위 10%는 미국 국민소득의 50%를, 유럽 국민소득의 35%를 차지하는 반면 하위 50%의 인구는 미국 국민소득 20% 유럽 국민소득 25%밖에 갖지 못한다.

    노동소득 불평등이 자산소득 불평등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상식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20세기에 와서 상속자산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대부분의 가계들에게 있어 세습자산은 주택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케티가 제시하는 자료는 충격적이다. 그는 상위 10%가 소유한 부의 크기는 19세기보다 점차 줄어들었지만 20세기 자본주의도 자산 불평등은 매우 뚜렷하며, 자산소득에 따른 불평등은 21세기 더 큰 문제로 부각될 것임을 주장한다. 세습에 의한 불평등이 사라진 것인 아니라 점차 더 뚜렷하게 부의 불평등을 강화시키는 지표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세습은 19세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세습과 관련하여 19세기와 21세기의 차이를 뚜렷이 보여주는 것은 중산층의 지위이다. 피케티는 중산층을 소득분위 50%에서 상위 10%의 계층으로 분류한다. 19세기에는 대부분의 부가 상위 10%에 집중되었던 반면 중산층이 점유하는 부는 매우 미미했다. 중산층과 노동자계급의 차이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상위 10%에서 50%의 구간에 이르는 인구들은 국부의 1/4~1/3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가구는 자식에게 주택과 교육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줌으로써 지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된다. 물론 이들 계층의 자식들은 자산소득보다 노동소득에 의존해야 하고, 이런 노동소득을 얻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지위를 꾸준히 확보해야 하지만 말이다. 반면 하위 50%는 전체 국부의 5% 밖에 갖지 못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중산층의 의식형태이다. 세습 중산층의 자식들은 자신들이 성공한 것이 그들의 능력에 따른 결과라고 믿고 있다. 자신들이 전문직 종사자로서, 고소득 직업을 갖게 된 것은 절제, 금욕, 지적 노력, 헌신성이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누리는 상대적인 특권은 노력의 결과이지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지위로부터 얻게 된 특권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자신이 누리는 소득과 부는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들 세습 중산층들은 그들이 고등교육에 접근할 수 있었던 특권적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것은 오늘날 중간계급 전문가들이 능력주의 신화에 빠져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습

    피케티는 자본-소득 비율이 증가하면 과거의 자산이 했던 역할이 점차 커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피케티는 상속은 사라지지 않았고 부의 세습규모는 더 커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다만 19세기의 세습 대상은 상위 10%였던 것이 21세기에는 그 범위가 상위 10%만이 아니라 다수의 ‘상층 중간계급’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그는 현재와 같이 자산-소득 비율이 증가한다면 19세기와 같은 세습사회의 출현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미 프랑스와 같은 국가들에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상속자산이 전체 부의 2/3이며, 노동을 통한 저축으로 획득한 자산은 1/3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피케티는 이런 상태로 불평등이 지속된다면 2050년 경 프랑스의 상속자산이 전체 자산에 차지하는 비중이 90%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한다.

    자산 자체의 불평등에 대한 논의는 마르크스의 주장과 대립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확대재생산 표식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자계급은 저축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노동자가구는 모든 소득을 저축하지 않고 소비한다. 물론 이 소비는 노년의 소비를 대비하는 연금저축을 포함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는 극단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전혀 현실성이 없는 가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피케티의 자료가 보여주듯이 소득분이 50%이하의 계층 즉 인구의 1/2은 자신의 당좌예금 구좌 외에 아무런 부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총 국부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부는 고작 5%도 안 된다. 피케티에 따르면 이는 역사적으로 변화가 없었다. 이들 계층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이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트라고 정의한 바로 그 집단이 21세기 인구의 반이라는 점만 기억하자.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성장국면에서 노동자계급이 부를 축적하지 못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소득을 통해 임대료를 내고 생계를 꾸려갈 수 있다. 자본주의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노동소득 배분율이 일정하다면 노동자계급의 실질임금도 지속적으로 상승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의 삶의 조건이 지속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고용이 안정되고 실질임금이 상승하고 연금 수급자가 될 수 있다면 노동자들이 부를 축적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자본주의 체제가 저성장 상태에서 정체한다면 노동자계급의 소득 역시 정체할 수밖에 없으며, 실업이 확대되고 그들의 삶은 불안정한 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실업이 증가하고 노동조합의 힘조차 약화되면,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물질적인 삶이 개선되어도 불안정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반면 세습 중산층이나 그 위의 상위계층은 상속받은 자산과 자신의 노력을 통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으며, 물질적으로도 더 풍요로워 질 수 있다. 이들 세습 중산층의 능력주의 신화는 이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론을 주도하는 중간계급들이 증가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속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가 된다면 그런 사회적 상태의 변화 가능성은 매우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7. 피케티적인 대안?

    피케티는 1980년대 보수주의 혁명을 크게 두 가지로 규정한다. 하나는 노동소득의 정체와 슈퍼연봉을 받는 CEO와의 격차 증대, 다른 하나는 누진세 체계의 약화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소득 최고 구간의 높은 과세가 중단되자 기업 리더들은 앞 다투어 자신들의 임금을 인상했다. 반면 지난 30년간 노동소득은 정체한다.

    같은 맥락이지만 과세체계도 근본적으로 변한다. 노동소득에 대한 과세는 지속되지만 최상위 소득구간의 소득을 보장하는 자산소득에 대해서는 세율이 지속적으로 낮아진 것이다. 더불어 상속세의 세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소득세보다 훨씬 낮게 책정된다. 피케티에 따르면 오늘날 누진세는 지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피케티는 이런 흐름을 거슬러 사회국가의 강화를 주장한다. 피케티가 사회국가라 부르는 것은 서구 복지국가를 의미한다. 의료와 공교육이 누구에게 개방되고, 노년층의 생활안정을 보장하는 국가체제. 그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토대로 누구나 기본적인 사회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불평등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그 불평등이 공동체 전체의 편익을 증진시킬 수 있을 때 한해서만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프랑스 인권선언의 내용이기도 하지만 롤즈의 [정의론]에서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그 사회의 최저의 상태에 있는 약자에게도 이익인 된다면 사회적 불평등이 용인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평등 자체는 악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권리의 평등만으로 사회적 불평등이 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시장은 근본적으로 고장 난 체제다. 피케티가 주장하는 것은 상속세 등에 강력한 누진률을 적용하고 자본세를 도입하고 누진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피케티의 자본세란 소득세가 아니라 소유하는 자산에 부과하는 세를 일컫는다. 이것은 한국에서 논의되었던 부유세와 같은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현재와 같은 불경기 상태에서 일률적으로 세금을 인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세계인구의 최상층에 대해서 자본세를 부과한다고 해서 이들의 경제활동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것도 아니며 경제의 침체를 야기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본세는 최상위계층의 부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방지하고 사회 국가의 필수항목이라 할 수 있는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유세보다 더 흥미로운 주장은 금융정보가 투명하게 공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피케티는 현재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자본도피가 존재하고 비밀을 엄격하게 보장하는 역외 금융센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각 국가는 자국 부유층들이 보유하고 있는 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개별 국가에서 투명하게 금융정보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높은 누진세를 적용한다면 자본도피가 더 광범위하게 이루어 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피케티는 미국과 EU가 자국 시민들의 금융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국가와 금융기관들에 대해 경제적 제재조치를 취한다면, 금융정보 공개는 전혀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금융정보 공개에 대한 국제적 노력은 충분히 실현가능한 추진과제가 될 수 있다. 물론 현재와 같은 로비집단이 정치권을 완전히 포획한 상태에서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와 같은 시도가 진지하게 검토되려면 광범위한 사회적, 시민적 압력이 행사되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미국이나 유럽의 정치권들은 여전히 금융계의 이권을 실현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

    금융정보에 대한 투명한 공개를 실현할 수 있는 토대는 미국과 유럽의 사회운동의 힘이다. 피케티 자신은 공론장에서의 민주적 토론을 통해 합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그와 같은 공론장의 형성 자체가 사회적 요구와 압박이 존재하지 않고서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피케티 자신은 현존하는 체제를 너무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피케티의 주장이 유토피아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진보좌파가 이런 주장을 두고 유토피아적인 발상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자본도피의 수단으로 역외금융센터에 있는 자금을 추적하면서도 이런 도피자금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단 가운데 하나를 주장한 것을 두고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주장은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들, 일본, 중국 등이 동의하면 충분히 실행가능한 과제이다. 물론 한발 더 나아가 자본세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해볼만하다.

    피케티 자신의 주장처럼 어떤 자산규모에 대해 얼마의 세금을 부과할 것인가는 좀 더 고민해보아야 한다. 자본세의 도입을 개별 국가가 아니라 모든 국가들에게 공식적인 규범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분명 역사의 진전이라 할만하다.

    68

    68혁명 당시 열띤 집회 모습.http://projects.brg-schoren.ac.at

    8. 노동자운동은 피케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에릭 홉스봄은 러시아혁명의 가장 큰 성과는 유럽 복지국가라고 했다. 전후 자본주의가 친노동적인 정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혁명과 서유럽 국가들 내부에서 강력한 노동자계급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반면 피케티는 이와 같은 좌파들의 역사의식을 전혀 공유하지 않는다. 그는 800여 쪽에 달하는 글에서 노동소득 배분율이 하락하는 이유를 논하고 불평등을 논하면서도 단 한 번도 노동자운동이나 노동조합에 대한 언급하지 않는다. 필자는 800쪽까지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노동자운동에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반면 그가 줄기차게 언급하는 것은 보편적 시민권, 정의, 민주적 토론공동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이다. 피케티 자신은 매우 급진적이고 어쩌면 유토피아적인 발상으로 대안을 제시하지만 그는 어떤 정치적 급진성을 요구하기보다 정치적 담론공동체에서의 합의를 통해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길 바란다. 왜 그가 노동조합을, 노동자운동을 자신의 논의에서 일체 제외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는 계급투쟁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가 대안으로 삼는 것은 ‘이성적 시민사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월한 복지체제, 사회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개혁을 실행해야만 한다는 것이 피케티의 주장이다. 그의 아버지가 68세대라고 했는데, 피케티 자신은 아마도 반체제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갖고 있는 듯하다. 급진주의 운동에 대한 피케티의 거부감은 그가 미국이나 한국 주류 사회에서 환영받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좌파들은 이와 같은 태도를 단지 좌파에 대한 편견이나 노동운동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없다. 한국의 진보주의 진영이나 활동가들 역시 피케티와 유사한 입장을 갖고 있다. 그들은 진보적이고 심지어 급진적인 대안을 주장할 때조차 노동자운동이 추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성적인 시미사회’가 그와 같은 급진적인 요구를 담론화 하고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운동에 대한 진보주의의 거부감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진보주의의 이념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또한 노동운동의 대중적 정당성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피케티는 노동자운동이 자신의 주장하는 제도적인 혁신을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 될 수 있음을 일관되게 부정한다. 이 점에서 피케티는 진보적 시민사회와 노동자운동이 현재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필자는 한국 노동운동이 피케티의 논의를 전적으로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피케티가 민주적 담론공동체 내의 토론과 합의만을 주장했다고 해서 노동자운동이 그의 ‘온건성’만을 탓할 이유는 없다. 노동자운동은 피케티가 제기한 불평등에 대한 대안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자본세, 금융투명성 확대, CEO의 급여에 대한 통제, 공정한 교육기회의 확산, 의료적 기회에 대한 동등한 접근성 등 그 어느 것도 노동자운동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과제이다. 다만 노동자운동은 이것을 부르주아적인 시민사회의 ‘담론공동체’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한 선결과제는 노동자운동의 정당성 획득과 노동자내부의 계급적 연대의식의 복원이다. 노동자운동의 힘과 정당성 없이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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