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아직도 ‘여류’라고 부르는가
    [빵과 장미] 성차별적 언어에 집단적 무감각에 빠진 현실
        2012년 07월 05일 11: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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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류 감독?

    지난 달 26일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씨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등 인기 있는 로맨틱 코미디를 연출했던 미국의 영화감독 노라 에프런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 글을 즐겨 읽던 한 여성 영화평론가가 이 소식을 전하며 ‘여류 감독’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 보며 몹시 당혹스러웠다. 왜 아직도 ‘여류女流’라는 이 성차별적 언어가 쓰이고 있단 말인가.

    노라 에프런의 모습

    여성 바둑 기사들을 위한 기전의 이름은 아예 ‘여류 명인전’이다. 현재 응모 기간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인 ‘동서문학상’은 ”수많은 여류작가들의 둥용문이 되어온”이라는 문구로 홍보를 하고 있다. 2012년에!!! 개화기 당시에 탄생한 신조어 ‘신여성’처럼 구시대적 언어인 ‘여류’라는 표현이 아직도 21세기에 통용되는 사회라는 걸 발견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성별을 표현하고 싶다면 ‘여성’이라고 하면 될 텐데 굳이 ‘여류’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은 심지어 언론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이 언어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서 그렇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사회적으로 이름을 알린 여성 작가들을 향해 ‘여류 작가’라고 칭해왔다.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객관적 표현이 아닌 ‘여류’는 여성의 전문적인 사회 활동을 지극히 남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말이다. ‘남류’라는 말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여성군’을 별도로 묶어 ‘여류’라 부르는 관념에 대해 오래 전부터 많은 비판이 있어왔음에도 이미 굳어버린 언어 습관은 쉽게 바뀌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언어는 대부분 ‘남자=인간’의 공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그래서 우리 말의 경우 여성에게 해당될 때 앞에 ‘여’자를 붙여서 사용한다. 여학교, 여선생, 여배우, 여직원, 여신도…… 나아가 여류작가까지.

    그렇게 뭐든지 남자를 주체에 놓고 언어는 만들어졌는데, 딱 한가지만은 ‘여자=인간’이라는 예외 공식이 적용된다. 바로 ‘미인美人’. 우리가 ‘미인’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곧 ‘미녀美女’를 뜻하는 말이다. 잘 생긴 남자에게 보통 ‘미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미남美男’이라는 표현을 쓴다. 수많은 단어에 ‘여’자를 추가하는데, 아름다움 앞에서만큼은 ‘여미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다니. 여성의 정체성에서 ‘미’를 최우선으로 하는 의식이 고스란히 반영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남성은 ‘미’에 있어서만 인간의 주체적 자리를 양보(?)하고 ‘남’을 붙여주는 대신 그 외 다른 모든 것에서 뿌리 깊은 주체가 되어 있다.

    2. 여성의 언어를 가지기 위한 싸움

    우리와 다르게 성별이 구별되는 언어를 가진 서구에서는 여성주의자들이 지속적으로 ‘여성의 언어’를 가지기 위해 애쓰는데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여성의 ‘직업 명칭’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명사와 형용사에서 성별 구별을 열심히 하는 프랑스어에도 글 쓰는 작가를 뜻하는 ‘écrivain’이나 교수를 뜻하는 ‘professeur’는 성별에 상관없이 하나의 단어로 쓰인다.

    작가와 교수를 성별 구별 없이 그냥 하나의 단어로 쓴 이유는 특별히 그 영역에서 양성평등의 개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작가와 교수만큼은 ‘남성의 영역’이라는 관념 때문에 여성을 이르는 단어가 애초에 탄생하질 않았던 것이다.

    14세기 이후부터 글 쓰는 여성들을 지칭하는 언어가 생겨났는데 이런 저런 변화를 거치다가 écrivaine로 자리 잡았다. 그래도 줄곧 여성 작가(femme écrivain)라고 쓰여져 오다 프랑스어 사전에 이 écrivaine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건 불과 3년 전인 2009년부터다. 변호사(avocat)나 박사(docteur)도 마찬가지다. 1900년에 프랑스에서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탄생하고 1902년에 최초의 여성 박사가 탄생한 이후 ‘avocate’와 ‘docteuse’ 혹은 ‘doctoresse’의 사용이 지속적으로 제안되었지만 이 여성명사는 남성들 사이에서 조롱을 위한 언어로 소비되곤 했다. 현재는 avocate나 doctoresse가 물론 통용되며 변호사의 경우 femme avocate도 함께 쓰인다.

    3. 엽기적 언어, ‘미망인’ – 아직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사람?

    어느 언어에나 이처럼 성차별적 의식이 관습적으로 내재되어 있기에 꾸준히 싸우지 않으면 절대 바뀌지 않는다. 여성을 순결한 미적 대상으로 여기며 ‘꽃’에 비유하는 관념은 비단 우리만의 문화는 아니다.

    원래는 ‘꽃을 딴다’는 뜻에서 시작된 defloration이라는 언어는 영어나 프랑스어(défloration)에서 ‘처녀성을 뺏기’라는 개념으로 쓰인다. ‘처녀성을 뺏는다’는 개념도 웃기지만 그것이 곧 꽃을 꺾거나 지는 것에 비유될 성질이라는 관념은 더욱 기가 막힌다. 물론 첫 성관계 연령이 남녀 모두 평균 17.5세 즈음인 오늘날 프랑스에서 이런 개념은 거의 무의미해졌다. 그러나 언어 속에는 여전히 그 관념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대체 이 언어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지적을 하고 또 지적을 해왔지만 사회는 지속적으로 들은 척 만 척 쓰던 말을 묵묵히 써오고 있다. 뭐 어때, 여태 쓰던 말인데, 별 걸 다 따진다, 라며 거북해 할 것이 아니라 이 언어의 불균형적 감수성을 제발 인식하고 반성해야 할 필요를 느꼈으면 한다.

    물론 이런 언어의 사용자들이 비하의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사회가 주입시킨 의식이며 입에 붙은 습관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무심결에 쓰는 말이지만 바로 그 ‘무심결’에 뱉는 언어 습관이야 말로 더욱 심각하게 여겨진다. 성차별적 언어에 집단적으로 무감각하다 보니 ‘아직 남편을 따라 죽지 않았다’는 뜻을 가진 ‘미망인未亡人’이라는 그 엽기적인 언어도 언론에 버젓이 등장하는 것 아닌가.

    필자소개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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